요즘 애들 - 최고 학력을 쌓고 제일 많이 일하지만 가장 적게 버는 세대
앤 헬렌 피터슨 지음, 박다솜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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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깝게 혹은 다행히도 밀레니얼 세대가 아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IMF가 터졌고 졸업 전후까지 이 여파로 여러 대기업 공채들이 취소되거나 규모를 줄여 취업난을 호되게 겪기도 했다. X세대로 명명되어 거침 없는 자기 표현, 문화의 소비 주체로 인식된 시기를 잠시 겪기는 했지만 그것을 나의 정체성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적은 없는 것 같다. 당시만 해도 어떤 세대의 명명은 하나의 마케팅 전략의 일환으로 이용된 감이 있다. 그 세대의 본질적 특성에 대한 진지한 사유의 결과는 아니었다는 느낌이다. 모두의 삶은 개인적인 것이고 구조적인 것이 아니라는 얕은 사견이 깨어지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노동자로서의 삶, 기성세대가 구축해 놓은 체제에 대한 비판적이고 심오한 인식이 따라온 것은 아니었다. 


반면 오늘날의 세대의 명명은 진지한 만큼 더 어두운 그 세대만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밀레니얼 세대. 198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에 태어나 IT 기기를 필수품처럼 접하며 자라난 세대. 경제적 풍요와 번영을 누리며 집중 육아로 자라나는 가운데 미래의 꿈을 선언하며 그 꿈에 가 닿는 직진 경로로 교육을 통한 명문대에 진학하는 게 모범답안처럼 제시되던 세대. 그러나 막상 사회로 나왔을 때에는 약속 받았던 직장도 미래도 실종된 곳에서 그 어느 세대보다 많은 시간 고되게 일하며 번아웃되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 이 책의 저자 앤 헬렌 피터슨 본인이 속한 세대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는 저자 피터슨이 자신의 "사적 이야기를 확장하고 상술하려는 시도의 결과물"로서 "우리 자신을, 우리의 번아웃에 기여한 체제들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어휘와 틀을 창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비단 미국에 사는 밀레니얼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2022년 이 지구상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을 도모하느라 분투하고 있는 우리 모두가 열렬히 공감할 수 있는, 인간 존재가 시장 논리 안에서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을 소모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명징한 분석틀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애들>은 요즘 애들이 아니어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거시적인 그림 안에서 나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의미 있는 프리즘을 제공해준다. 


밀레니얼들은 수십 년 동안 특별하다는 말을 듣고 살았다. 우리 개개인은 잠재력으로 가득하다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잠재력을 부모와 달리 돈 걱정 없는 완벽한 삶을 만드는데 발휘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베이비붐 세대는 자녀들을 일자리에 맞추어 기르고 최적화하는 사이에 그런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보호 장치들을 사회적, 경제적으로 해체시켰고, 직장에서 없애버렸다. 

-pp.165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야기다. 밀레니얼들의 부모들은 자녀들의 기대치 자체를 무한하게 끌어올림으로써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비전을 주고 정작 산업 현장에서는 최대한의 이윤을 내 주주들에게 이익을 돌려주기 위해 노동자들을 절감해야 하는 비용으로 치환 시켜버렸다. 우리는 산업 현장에서 최소한의 보호 장비도 없이 청년들을 착취한 사례를 잊을 만하면 듣게 된다. 그들의 비참한 처우는 사고가 나야 비로소 수면 위로 떠오른다. 표면화되지 않은 은밀한 착취들은 헤아릴 수조차 없을 것이다. 

이는 양육 과정 자체를 근사한 이력서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뛰어들었던 마음과 그 시장 가치가 곧 존재 가치로 치환될 때 무시할 수 있는 인생과도 통하는 이야기다. 즉 기업의 이익에 기여하지 않는 노동자의 삶은 이야기될 가치도 없는 것으로 무화되는 경향성이다. 그러니 이 모든 일은 하나의 부수적인 부작용이 아니라 "요즘 애들"을 양육하며 그들을 통해 키웠던 그 자본주의적 계층 상승의 꿈과 떨어져 이야기될 수 없는 맥락을 가지고 있다. "요즘 애들"과 우리 모두의 번아웃은 결국 우리 모두가 공모한 결과라고 이야기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이 책의 한계는 그런 구조적인 문제들을 노출함과 동시에 결국 거대 담론화시킴으로써 개인의 역할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 것과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살 필요는 없다"고 각성 시키는 지점이다. 우리가 이렇게 하루하루 탈진할 정도로 자신의 에너지를 일에 쏟고 그 틈새에  SNS의 타인들의 자기 과시적 삶을 순회하며 비교와 불안으로 소진되는 하루하루가 삶을 채우는 것을 방관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그 가능성의 통로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상황이 급진적으로 개선되기는 어렵겠다는 절망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생존과도 통하는 이야기다. 사는 일은 많은 것들을 합리화한다. 기업이 이윤을 창출해내지 않는 일은 실패로 규정된다. 그리고 그 이윤을 가장 쉽게 가시화시키는 것은 더 많은 비용을 절감하는 것이고 그것이 인건비가 될 때 근로자들의 삶은 간과된다. 더 많은 사적인 시간을 포기하고 회사의 공적인 삶에 자신을 복무시킬 때 그것은 미덕으로 간주된다. 소비자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은 물가가 안정되기를 바라고 주식 투자자가 되면 배당을 받고 싶어진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 이면의 노동자의 착취를 의도적으로 간과하겠다는 의도를 가졌던 것은 아니다. 부모가 되면 자녀가 이왕이면 공부를 잘 하길 바라고, 이름 있는 대학 졸업장을 들고 취업을 잘 해서 빠른 경제적 독립을 이루기를 바라게 된다. 그것은 결국 이런 사회적 시스템에 순응하기를 바라는 지점에 저도 모르게 자녀를 던져 넣게 되는 것이다. 아이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지만 이왕이면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기를 바란다. 이런 상충하는 욕망들의 집합소가 인간이라는 복잡다단한 존재들을 이루는 요소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세대의 번아웃은 출구가 없는 영원한 쳇바퀴다. 우리의 자식은 누군가의 근로자가 된다. 입으로 대의와 노동자의 기본권을 외치지만 정작 자영업자가 되어 아르바이트생의 노동에 기대다 그들이 어느 순간 4대 보험 보장을 요구하면 난감해 한다. 이렇게 자신의 번아웃을 주장하며 저도 모르게 타인의 번아웃을 조장하게 된다. 결국 피터슨의 냉소는 하나의 단서이자 전조가 된다. 

자신의 번아웃을 줄일 생각만 하지 말고, 당신의 행동이 어떻게 남의 번아웃을 부추기는지 생각해 보라는 말이었다. 

-pp.367


이렇게 살 필요는 없다. 그 말만큼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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