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은 나에게 어떤 의미였나. 2년 가까이 여러 가지 의도에서 해 온 채식이 심각한 빈혈로 중지되었다. 완전 채식도 아니었겄만 고기를 피하려는 나의 마음은 이렇게 좌절되었다. 오랜만에 세상에서 이런 기쁨이 있었나, 싶게 열중했던 프랑스 자수는 바늘에 찔린 상처가 지속적으로 염증을 일으켜 포기해야 했다. 바늘땀 하나는 별 것 아니지만 그것의 시간과 인내가 모여 완성되는 그림이 주는 감동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바늘에 찔리지 않고 바느질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종종 습진이 생기는 손가락에 바늘이 들어가면 사소하지 않은 염증이 생긴다. 그것을 또 각오할 자신이 없다. 항생제를 먹고 손가락에 주사를 맞는 일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번거롭고 고통스러웠다. 


아이가 큰다는 것은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을 자아낸다. 몸도 마음도 서서히 분리해 가며 아이를 기꺼이 세상에 내어 놓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쉽지 않은 과정이다. 사춘기가 오고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보다 친구들과 혹은 핸드폰과 함께 하는 기회를 더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솔직히 참 씁쓸하다. 나의 열네 살을 생각해본다. 그냥 지켜보고 크게 잔소리 하지 않은 엄마 마음도 헤아려본다. 나는 나 같은 아이는 솔직히 못 키울 것 같다. ㅋㅋㅋ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나는 세상에서 가장 모범적인 사춘기를 보냈던 것처럼 아이를 붙잡고 훈계를 한다. 정말 되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는데... 10년쯤 뒤의 내가 와서 현재의 나에게 방향 지시를 좀 해줬으면 좋겠다. 넌 지금 이러면 안 돼!, 이 길로 가, 저 사람과 시간을 더 보내.

















문학동네 북클럽에서 보내온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인 강희영의 <최단경로>를 읽었다. 두 여자와 한 남자의 시점이 교차하는 이야기는 작가 자신의 라디오 피디 경력과 사이언스 커뮤니케이션 전공의 이력이 투영되어 신선하다. 상실과 이별이 남긴 어떤 윤리적 책임에 대한 상기는 그것을 방기한 한 남자와 그의 후임자로서 그의 경로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이야기를 낳는다. 이야기의 속도감 있는 전개, 빅데이터 세계에서의 진부하지 않은 여러 신기술과 신조어의 순발력 있는 재치로 굉장히 탄력적인 이야기라는 인상을 받았다. 다만 아이를 키우고 잃는다는 그 처절한 상실의 서사의 깊이와 호소력에서는 전통적인 글쓰기의 해법이 담아낼 수 있는 스펙트럼을 포용하지 못한 면이 있어 아쉬웠다. 


요즘의 이야기들은 영화나 드라마의 시놉시스 같은 인상을 받을 때가 많다. 모두가 활자의 때로 지루하고 해독하기 힘든 심리적 묘사보다는 화면에서의 동적인 움직임에 탐닉하는 시대에 그러한 변화는 당연한 것이기도 하고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이야기들만 담아낼 수 있는 그 무엇이 때로 그리워질 때가 있다. 이미지와 활자는 사실 싸워 이기고 지는 구도가 아닌데 어느새 그렇게 되어버리는 세태가 안타깝기도 하고. '최단경로'만 추구하는 지금 이 시대에서 아날로그적 감수성 운운하는 게 나이듦인 건가 싶기도 하고.


나는 내 모든 시간 강렬함 속에 '쉬기'를 원한다. 그리고 '세상의 모습들'로 풍부해지기를 원한다. 지각으로 느낀 세계가 지적인 세계로 이어지기를 원한다.지성, 인내, 열정, 기발함으로 산 삶(반드시 내 삶이어야 하는 건 니고 공식적인 나, 작가로서의 삶)을 나타내기를 원한다.

-메리 올리버 <휘파람 부는 사람>
















"지각으로 느낀 세계가 지적인 세계로 이어지기를"... 소망해 보는 202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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