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크는 앞에서는 욕망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없다. 한 마디로 발자크는 다 꿰뚫어 본다. 가식, 위선의 가면을 여지없이 벗겨버린다. 살기 위해 더 가지기 위해 추락하는 그 저열한 생존을 그는 적확히 묘사한다. 그래도 그는 대부분 복합적인, 다면적인 인간을 그리려 애썼다. 오늘은 추악한 욕심을 드러내더라도 내일은 그 욕심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평범한 사람들을 좋아했다. 그런 사람들한테 기꺼이 속아주고 굴복하는 유약하고 순한 사람들을 그는 포기하지 않았었다. 다만 생의 말년에 이르러 그는 인간, 삶 그 자체에 대하여 완전히 절망한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 작품의 인간 군상은 정말이지 다 한 마디로 천박하고 사기꾼에 아첨꾼, 모사꾼, 욕망 덩어리들이다. 일말의 선의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이 모습이 작위적이다,라고 폄하하기엔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의 한 어두운 단면이 시대만 고쳐쓰고 나타난 듯한 기시감이 든다. 
















19세기 중반 파리의 이탈리앵 대로에 나타난 퐁스의 우스꽝스러운 복고풍의 옷차림은 그의 초라한 뜨내기 식객으로서의 삶을 암시한다. 몰락한 노음악가 퐁스는 비슷한 처지의 피아노 선생인 독일인 친구 슈뮈크와 함께 살게 된다. 이 둘은 서로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지지하며 초라한 노년을 버틴다. 퐁스라고 전적으로 순수한 사람은 아니다. 온갖 예술품을 수집하는 데에 집착했고 부르주아 상류 사회에 속한 사촌 카뮈조 집안에 비굴하게 아첨하며 지내다 그집 딸 혼사에 잘못 관여하게 되어 미움을 사게 된다. 여기에서부터 사촌 퐁스의 이야기는 다이나믹한 국면을 맞는다. 퐁스의 죽음이 임박한 것으로 보이자 그의 재산을 둘러싸고 그들의 집 수위, 공증인, 의사, 사촌 등 온갖 친인척, 지인들이 저마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공모하고 속이고 속는 천태만상의 대사기극이 펼쳐진다. 대단치도 않은 한 노음악가의 죽음 앞에서 생전에는 그를 무시하고 상대도 하지 않았던 많은 이들이 그가 평생에 걸쳐 수집한 예술품들을 차지하려고 눈이 벌게지는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그려내는 발자크는 스스로를 '필경사'로 칭할 만하다. 욕망의 축약도는 인간 삶의 사실적인 축도다. 그의 서사는 언제나 현실을 파고든다.


평등에 도취된 이 나라에서는 파리 어디서든, 무슨 일이든, 불평등이 터져 나온다. 죽음에 있어서도 그런 불변의 이치가 드러난다. 부잣집에서는 친척, 친구, 대리인들이 비탄에 빠진 이들에게 역겨운 그런 잡일들을 면하게 해준다. 그러나 세금의 분배와와 마찬가지로, 서민들, 도움을 받지 못하는 프롤레타리아는 슬픔의 무게로 고통 받는다.

p.336


과연 이 풍경은 비단 발자크 시대의 모습에 국한되는가? 현상에 대한 예리한 지적은 정확히 한 세기를 훌쩍 지나와 지금 여기에 와 꽂힌다. 평등에 도취된 시대는 여전히 자본 앞에서 난무하는 불평등으로 소외를 낳는다. 생존은 욕망을 뛰어넘지 못하고 욕망은 한정된 재화를 둘러싸고 여전히 현대판 퐁스 영감들을 둘러싸고 반목하고 불화한다. '기생충'은 새로운 발상이 아니다. 그의 절망은 답이 없다. 발자크가 갑자기 죽지 않았다면 완성했을 거대한  '인간극'의 어느 한 작품은 그의 절망의 톤을 중화해 줄 아름답거나 이상적인 이야기였을까 궁금해진다. 아니면 더한 절망과 인간의 추락으로 마침표를 찍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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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0 1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9-07-11 07:08   좋아요 0 | URL
작가 의도 맞을 것 같아요. ^^;; 전 이언 랜드가 실제 작가라는 걸 알고 어찌나 놀랐는지. 꼭 읽어보고 싶던걸요. 아. 발자크는 정말이지 능력자 맞아요. 사람 마음 속을 뒤집어 보여주는 수준인 것 같아요. 그냥 다 짐짓 아닌 척 하고 사는데 발자크는 투시경 쓰고 다 들여다보는 것처럼 얘기하니까요. like님 좋아해주시니 부지런히 써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