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 때의 내 모습을 언어로 정교하게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일어났던 사건들, 스쳐갔던 사람들의 단편적 모습 정도다. 흔한 십 대의 소녀가 기성 세대들의 치열한 나날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는 없겠지만 상대적으로 내면에 품고 있었던 숱한 착각, 망상, 지적 허영심 같은 것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허, 참, 이 작가 봐라. 다 소환시킨다. 낯설지 않은 오만이다.


당신, 이게 당신 꿈이야?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굽실대면서, 티눈과 무지외반증이 있는 발을 허시퍼피에 쑤셔넣는 게?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뭔데? -중략- 겁쟁이! 멍청이! 인간은 날아오르기 위해 태어난 존재야. 그런데도 당신은 무릎 꿇기를 선택하다니!

-토바이어스 울프 [올드 스쿨]


















이것이 자신에게 걸맞지 않은 상류층 기숙학교를 다니는 문학도였던 소년이 무심코 보게 된 신발 가게 종업원이 손님에게 신발을 신겨주는 장면에서 느낀 경멸이다. 나는 결코 저렇게 되진 않을거야! 왜 저렇게밖에 못 살지? 난 특별한 고양된 삶을 살 건데. 삶은 저러라고 주어진 게 아니라고. 당신이 꾸던 꿈이 고작 이렇게 추락한 거야? 행간에 스민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기억이 난다. 우리들이 품었던 사춘기의 오만이다. 착각이다. 


토바이어스 울프의 소년기가 투영되어 있는 [올드 스쿨]의 소년은 자신의 처지에 벅찬 사립 학교에 입학함으로써 소위 금수저 동급생들에게 예민하게 계급의식과 긴장 관계를 감지한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더욱 소년은 특별해지고 싶었다. 그리고 그러한 전도된 욕망은 지독한 탐식을 통해 접하게 된 작가를 통해 더욱 부풀어오른다. 아인 랜드의 [파운틴 헤드]가 그 도화선이다. 이 작가가 그려낸 삶에 나날의 자잘한 생존을 둘러싼 고충들, 삶의 그 불가피한 평범성과의 화해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작가는 십대 소년들의 지적 오만과 비현실적 이상주의에 불을 지른다. 그 대척점에 헤밍웨이가 있다. 찌질하고 상처받고 패배한 영혼의 나날을 영웅의 그것으로 격상시킨 헤밍웨이에 대한 거대한 오마주가 [올드 스쿨]에는 강렬하게 스며 있다. 문학 경연 대회에 참가해서 우승하면 직접 헤밍웨이를 독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주인공 소년은 헤밍웨이와의 만남 직전에 거대한 반전을 맞이한다. 


그 둘은 결국 만났을까? 소년이 삶의 그 찌질한 속내를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헤밍웨이가 그린 그 숱한 패배자들의 고투에 공감하게 되면서 결국 소년은 소년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된다. 그게 바로 불가피한 성장이다. 우리 모두는 어른이 되면서 비로소 그 손님의 더러운 발에 신발을 신기려 무릎을 꿇게 되는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우리와 동떨어진 풍경이 아니라 내 자신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삶의 풍경은 다른 색깔로 옷을 갈아입게 된다.


굳이 날아오르지 못하더라도 괜찮다고 자신을 설득하는 데 누구나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의 무게에 대한 암시는 이 이야기의 후반부다. 그래도 여전히 [올드 스쿨]의 강렬한 매력은 그 사라진 소년들의 왜곡된 욕망, 근시안적 시각, 지적 오만, 유치한 경쟁심들에서 비롯된 그 시절만이 가질 수 있는 엉뚱한 자질들의 생생한 묘사다. 그 사이사이마다 잊어버렸던 자신의 사춘기적 치기를 발견할 때 왠지 반가운 건 덤이다. 그러한 자질들이 세계와 부딪혀 아프게 흩어지면서 우리는 그 생기와 체념적 정서를 교환했으니까. 남은 게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니다. 작가는 그 지점을 정확히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독자들은 그에게 설복당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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