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살이었다. 잦은 논란의 중심에 설 위대한 작가가 될 소년은 장차 역사에 남을 위대한 화가가 될 소년을 만난다. 아름다운 자연을 쏘다니며 그들은 각자 그림과 글로 파리를 정복할 것을 꿈꾸었다. 삼십 년의 우정은 한 소년이 다른 소년을 자신의 [작품] 속의 인물에 투영하며 무참히 끝나버렸다. 에밀 졸라와 폴 세잔의 이야기다.
















에밀 졸라의 '루공 마카르 총서'의 열네 번째 작품은 [작품]이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자전적이라는 평을 듣는다. 실제 이 이야기 안에는 그의 페르소나라 할 작가 상도즈가 등장한다. 정작 이야기의 주인공은 예술에 투신했지만 끝내 시대의 버림을 받고 파멸하고 마는 화가 클로드지만 말이다. 주인공 클로드에는 에밀 졸라와 친분을 나누었던 화가 마네와 세잔이 골고루 투영되어 있다. 오직 예술 그 자체의 완성을 위해 자신의 삶까지 방기하는 클로드의 모습은 처절할 정도로 극단적이다. 오늘날 우리가 경매장, 미술관에서 완상하는 그들의 유작이 삶의 온갖 유희와 편의, 타협까지 모조리 제단에 바친 결과라는 상기는 대단히 강렬하다. 시대의 인정도 지지도 응원도 받지 못한 수많은 예술가들의 묘사는 정밀하고 형형하다. 클로드의 모습이 전적으로 세잔의 그것이라 하지 않더라도 세잔 입장에서는 대단히 불쾌했을 수도 있겠다 싶은 삶의 부적격자로서의 묘사는 사실 더 큰 예술적 차원에서의 자연주의적 묘사를 위한 하나의 제단이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끝내 둘은 불화하고 말았다. 이것은 에밀 졸라가 세잔에게 바치는 경의, 애정이 없이 하기 힘든 이야기였음에도 예술과 생활의 불화, 반목의 이야기는 마치 등장 인물들을 건강한 삶을 살 수 없는 무능력자들로 극대화시키는 것 같아 불편하다. 일말의 진실은 아무래도 이야기 안에서 극대화되었고 이 대목에서 주위의 친구들은 불쾌함을 느꼈을 것이라 짐작이 간다. 누구나 사실과 진실을 구태여 친구의 이야기 안에서 듣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보게, 난 말이야. 가끔 진땀이 나...... 자네, 혹시 이런 생각해 본 적 있나? 어쩌면 우리의 다음 세대는 우리가 생각하 듯이 그렇게 공정한 심판관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네. 인간이란 현재 모욕받고 인정받지 못해도, 다가올 공정한 미래를 믿기 때문에 위로받는 법인데, 마치 신앙심 깊은 사람이 모든 공정한 보상을 받는 내세를 굳게 믿음으로써 현재의 추악함을 견디듯이 말일세. 만약 카톨릭 신자와 마찬가지로 예술가에게 천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미래의 세계도 현재와 마찬가지로 계속 속임수와 오해가 난무해서 우수한 작품보다 겉만 번지르르한 형편없는 작품을  좋아한다면!......

-p.548


소년 시절의 꿈, 이상, 예술에 대한 열망이 현실과 타협할 때 끝내 그 타협의 지점에서 돌아서서 묵묵히 고독하게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하며 자신의 사랑, 생계까지 포기하며 끝까지 밀고 나가려 하다 마침내 비장한 결말을 맞고 마는 클로드의 모습은 꼭 예술이 아니어도 현실과 세상의 속된 가치관과 어느 정도 타협하며 살아나가야 하는 많은 평범한 우리들에게 삶의 태동이 품는 그 생래적 모순을 형상화한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잃어버린 잊어버린 소년, 소녀 시절의 수많은 몽상과 이상들에게 바치는 제사로 뒤덮여 있는 [작품] 속에는 너무 많은 우리들이 녹아 있어 쉽게 돌아서 나오기 어렵다. 아마, 폴 세잔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이야기를 공공연히 해버린 친구의 죽음 앞에서도 그를 쉽사리 용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작품]은 이렇게 그 안의 이야기와 그 밖의 사연이 함께 만나 완성되는 이야기다. 어릴 때 만난 친구와는 끝내 석별해야 그 나머지의 삶을 살아나갈 수 있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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