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 (리커버 특별판)
메리 셸리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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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이가 들면서 절대선과 절대악에 대한 확신이 흔들린다. 특히 한 인간이 선의 구현 그 자체이거나 악의 화신이라고 단정짓기 어려워졌다. 모든 상황 논리 앞에서 선악의 경계 그 자체를 모호한 것으로 지워버리자는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선한 얼굴 뒤의 어두운 비도덕적 행위나 악행들에 묻힌 선한 대목들을 끊임없이 목도하다 보면 생명이 가지는 가변성과 역동성은 인간이 추구하는 불변의 것들의 근간 자체를 뒤흔들 수도 있겠구나 싶다. 사람은 너무나 복잡하고 삶은 점액질이다.


너무 많이 들어 진부해진 고유명사는 어느덧 대명사처럼 녹아들어가 그 고유의 본질 자체를 놓치기도 한다. 나에게는 '프랑켄슈타인'이 그랬다. 잘 알지 못했던 이 괴물은 어느새 너무나 자라버려 나에게는 '악의 '화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으로 다가왔다. 나는 '프랑켄슈타인'을 오해했다.


<프랑켄슈타인>의 화자는 프랑켄슈타인도 그가 만들어 낸 괴물도 아니다. 청자는 독자가 아니다. 북극점 탐험을 떠난 로버트 월턴이 누이에게 보내는 서간문은 프랑켄슈타인의 서사를 두 겹, 세 겹으로 감싼다. 말하여지는 진실은 이미 날것 그대로가 아닐 것이다. 의도하지 않은 탄생은 그것이 어떻게 삶의 우연들과 불가역성과 만나 악으로 변질되는지에 대한 자기 서사를 다른 이의 삶을 관통하여 해명한다. 이 세 개의 삶은 어쩌면 애초부터 별개의 것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결국 대원들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야망을 접게 되는 탐험가도 의도치 않게 자신의 야망 너머에서 악의 결론을 몸소 경험해야 했던 남자도 선의와 애정을 기대했던 만큼 돌아온 배신에 절규하며 악으로 갚게 되는 괴물도 기실은 한 인간의 내면에 다 함께 지니고 있는 본성으로 치환된다. 관찰하는 자, 욕망하는 자, 그 욕망의 화신은 모두가 다 '나'이다.


괴물은 바로 나 자신의 흡혈귀, 무덤에서 풀려나 내게 소중한 것들을 모두 파멸로 몰아넣을 내 자신의 생명이었다.


빅토르의 고백은 괴물의 탄생 그 자체가 자신의 내면 그 자체에서였음을 보여준다. '나 자신의 생명'은 그렇게 나 자신의 금제를 뛰어넘을 욕망의 숨결을 통해 세상에 마침내 현현한다. 이쯤 되면 프랑켄슈타인 자체가 괴물로 육화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사랑하는 것들을 마침내 파괴하고 마는 그 욕망의 종착점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나 자신이다. 


창작 당시 십 대의 메리 셸리가 선과 악, 인간과 괴물의 경계 자체를 지워버리고 확장하는 지점의 언어는 역설적으로 아름답고 투명하다. 괴물의 목소리는 떨리고 그의 어휘는 때로 자신의 어두운 숙명을 그 자체로 이해받을 수 있을 정도로 예리하고 설득력이 있다. 참담한 현실은 언어의 집에서 안식을 찾는다. 이야기해질 수 있을 때 인간은 산다. "불행이 나를 악마로 만들었다."는 괴물의 절규는 메리의 이야기가 나아가는 과녁이 인간과 삶이 만날 때 벌어지는 일들 속에 인간이 강제로 부여한 규약, 관습, 통례 들은 판단의 준거가 되기 힘듦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괴물의 이야기가 아니다. 누구나 될 수 있는 사람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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