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를 감동깊게 읽었지만 시인의 스승인 황순원 선생의 얼굴은 모르겠다. 분명 신문이나 잡지에서건 한 번은 보았을 텐데, 하긴 직접 만난 사람들 얼굴도 다 기억하지 못하니, 일면식도 없는 노소설가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겠지.

시인은 틀니 낀 인생, 덜미 잡힌 인생에 대해 노래한다. 연한 단고기를 한 점 먹고 술잔을 거푸 비우는 것으로 그 그악스런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투명한 얼음 같은 산문을 쓴 소설가에게도 그런 행운은 오지 않는다. 나는 좋은 스승을 둔 시인이 부러웠다. 나에게도 은사라고 부를 만한 분이 두 분 있지만, 그 분들도 인생에 대해서는 내게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황순원 선생의 틀니 (정호승)
  

  황순원 선생님 단고기를 잡수셨다
  진달래 꽃잎 같은 틀니를 끼고
  단고기 무침이 왜 이리 질기냐고
  틀니를 끼면 행복도 처참할 때가 있다고
  천천히 술잔을 들며 말씀하셨다
 
  아줌마, 배바비 좀 연한 것으로 주세요
  우리들은 선생님의 틀니를 위해
  일제히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황선생님만큼은 틀니 낀 인생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술을 마셨다
 
  틀니를 끼면 인생은 빠르다
  틀니를 끼면 봄은 다시 오지 않는다
  틀니를 끼기 시작하면서부터 인생의
  덜미를 잡히기 시작한다
  틀니를 끼는 순간부터 인간은
  육체에 비굴해진다
 
  서울대입구 지하철역
  경성단고기집을 나오자 봄비가 내렸다
  황선생님을 모시고 우리들은 어둠속에서
  밖을 향해 계속 길을 걸었다
  걸으면 걸을수록 틀니를 끼고 이를 악물고
  살아가야 할 날들이 더욱 두려워
 
  더러는 지하철을 타고 가고
  더러는 택시를 타고 가고
  더러는 걸어서 가고
  평생에 소나기 몇 차례 지나간
  스승의 발걸음만 비에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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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신자 (김경희)


  그대 마음은 중환자실ㅡ
  대기된 죽음이 무심히 窓을 만드는 거기
 
  오늘은 혼자서 흥행영화를 보았고
  어제는 물잔을 헹궜으며
  새의 모이가 떨어진 걸 알았다
 
  내일은 무반주의 빗소리를 들으며
  교회에 가고 돌아오는 길엔
  일용할 양식의 몇 톨 감자와
  有限락스 한 병도 구입하고
 
  ……
  아파트의 열쇠를 꺼낼 땐 신호처럼
  우리들과의 선서를 생각할 것이다
 
  ……
  스위치를 올리자 기침소리도 없이
  영접해 오는 자기의 그림자는
  간단히 일별하고, 커튼이 밀리고
 
  ……
  물이 끓는 동안 신문을 읽고 접으며
  小食의 식단과 내일의 차트를
  운명, 또는 절멸처럼 떠올릴 것이다
 
  ……
  다시 단독의 유서 깊은 달빛이
  길 너머 길을 보이는 거기
  그대 마음은 중환자실ㅡ
 
  ……
  가령, 차고 푸르른 자신의,
  메스의, 심연의, 간호원
  흰빛 까운의 ㅡ 혹은 뜨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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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묘사하는 이런 느낌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하교길은 늘 그랬던 것 같다. 언제나 여름 햇살이 약간 기울어진 각도로 담장을 치고 골목을 데우고 있었다. 길바닥의 잔돌을 밟으며 집에 가면 엄마는 늘 자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그 때는 가라고 가라고 해도 시간이 가지 않았다. 고여서 흐르지 않는 연못물처럼 시간은 눈 가는 곳 어디에나 차 있었다.

여러 카테고리를 만들어 놓았지만 속으로 내가 제일 끔찍이 여기는 것은 이 곳이다. 남들에게 읽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읽으려고 고른 시를 이 곳에 올려놓는다. 올려놓고 읽고도 종종 까먹으니 가끔 들어와 내 서재에 내가 올린 시들을 내가 다시 읽는다. 사실은 순전히 이 목적으로 만들어놓은 코너다. 시집이라고는 기형도 전집 한 권만 달랑 들고 집을 떠나온 나는 그러니까 선견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한 때 나는 내가 반짝이는 싸구려 비닐구두에 담긴 늙은 영혼이라고 생각했었다. 이제 구두는 다 낡아서 많이 길이 들었나? 그런데 내 영혼은 이제서야 겁을 집어먹는다.

 

  아주 가까운 피안  (황지우)

  어렸을 적 낮잠 자다 일어나 아침인 줄 알고 학교까지 갔다가 돌아올 때와 똑같은, 별나게도 노란빛을 발하는 하오 5시의 여름 햇살이 아파트 단지 측면 벽을 照明할 때 단지 전체가 피안 같다
  내가 언젠가 한번은 살았던 것 같은 생이 바로 앞에 있다
 
  어디선가 웬 수탉이 울고, 여름 햇살에 떠밀리며 하교한 初等學生들이 문방구점 앞에서 방망이로 두더지들을 마구 패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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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9-13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오랫만에 놀어왔어요. ^-^ 요즘 컴 상태가 별로 안좋아서요 ㅋㅋ
오늘 이곳은 날씨가 겁나. 사납답니다. 낮인데 천둥도 우르르 쾅쾅!! 치고요..
비도 무지 왔어여. 그곳은 어떤가여? 새벽이겠죠? 안녕히 주무세요. ^-^*

검둥개 2005-09-13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방가 *^^* 여기는 너무 더워서 비가 왔으면 차라리 좋겠는 날씨에요. 아, 늦었는데 바톤 받아 숙제하느라고 땀 뻘뻘. 이제 가서 자야겠네. 장미님은 잘 금연하고 있는 거죠? ;) 아자아자, 좋은 하루!
 

대학 시절  (기형도)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 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토리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은백양  은백양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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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느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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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9-08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일 매일 시를 소개 해 주고 계셨군요. 오늘 첨 왔는데, 가을이라 님이 올리신 시가 더 좋습니다..

파란여우 2005-09-08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80년대 곽재구는 민주화의 광기로 들끓는 이 나라에 그닥 저항적인 냄새가 별로 없는 글을 주로 썼던 것 같아요. 참 별로였죠. 전 개인적으로 지금도 곽재구의 흐물해보이는 감성은 별로에요. 근데 서정적 감성의 시각으로 보면 이만한 부르조아도 없을 듯...^^아 참 전 곽재구의 이 초기시집을 갖고 있답니다.

검둥개 2005-09-08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개비님 안녕하세요. ^^ 시가 맘에 드신다니 기쁩니다.

80년대에 저는 어렸기 땜시롱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모른다지요. 헤헷 최루탄 냄새를 열심히 맡으며 초-중학교에 다녔습니다. ^^ 오늘 저도 이 시를 올리면서 좀 상투적이라는 생각을 하기는 했어요. 그러나 옛날에 알던 선배가 열심히 싸지고 다니던 바로 그 시집의 표지 생각을 하면서 올렸답니다. (지금 찾아보니까 표지가 바뀌었군요.) 여우님 그걸 가지고 계시다구요? 아이고 배 아파요. ;)

잉크냄새 2005-09-08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자가 너무 작아 안보입니다. ^^

검둥개 2005-09-08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진짜요. 제 컴에서는 시 글자가 댓글 글자보다 더 커보이는데 이상하네요.
크기를 키워보겠습니다. ^^

줄리 2005-09-09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평역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사진에서는 굉장히 낭만적으로 보이네요. 시도 그렇구 소설도 그렇구 영화두 그렇구 가을이나 겨울 배경이 나오면 더 끌려요.

검둥개 2005-09-09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이 잔뜩 온 겨울 풍경은 시나 소설 속에서나 영화로나 정말 더욱 멋지지요. ^^ 눈 치우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멋있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나 봐요.

잉크냄새 2005-09-09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은 한줌의 눈물을 던졌다는데... 전 역사안의 아늑한 풍경이 그저 따스하게만 느껴지네요.

검둥개 2005-09-12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 안은 좀 춥지 않을까 저는 그런 걱정이 되는데요 헤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