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느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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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9-08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일 매일 시를 소개 해 주고 계셨군요. 오늘 첨 왔는데, 가을이라 님이 올리신 시가 더 좋습니다..

파란여우 2005-09-08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80년대 곽재구는 민주화의 광기로 들끓는 이 나라에 그닥 저항적인 냄새가 별로 없는 글을 주로 썼던 것 같아요. 참 별로였죠. 전 개인적으로 지금도 곽재구의 흐물해보이는 감성은 별로에요. 근데 서정적 감성의 시각으로 보면 이만한 부르조아도 없을 듯...^^아 참 전 곽재구의 이 초기시집을 갖고 있답니다.

검둥개 2005-09-08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개비님 안녕하세요. ^^ 시가 맘에 드신다니 기쁩니다.

80년대에 저는 어렸기 땜시롱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모른다지요. 헤헷 최루탄 냄새를 열심히 맡으며 초-중학교에 다녔습니다. ^^ 오늘 저도 이 시를 올리면서 좀 상투적이라는 생각을 하기는 했어요. 그러나 옛날에 알던 선배가 열심히 싸지고 다니던 바로 그 시집의 표지 생각을 하면서 올렸답니다. (지금 찾아보니까 표지가 바뀌었군요.) 여우님 그걸 가지고 계시다구요? 아이고 배 아파요. ;)

잉크냄새 2005-09-08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자가 너무 작아 안보입니다. ^^

검둥개 2005-09-08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진짜요. 제 컴에서는 시 글자가 댓글 글자보다 더 커보이는데 이상하네요.
크기를 키워보겠습니다. ^^

줄리 2005-09-09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평역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사진에서는 굉장히 낭만적으로 보이네요. 시도 그렇구 소설도 그렇구 영화두 그렇구 가을이나 겨울 배경이 나오면 더 끌려요.

검둥개 2005-09-09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이 잔뜩 온 겨울 풍경은 시나 소설 속에서나 영화로나 정말 더욱 멋지지요. ^^ 눈 치우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멋있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나 봐요.

잉크냄새 2005-09-09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은 한줌의 눈물을 던졌다는데... 전 역사안의 아늑한 풍경이 그저 따스하게만 느껴지네요.

검둥개 2005-09-12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 안은 좀 춥지 않을까 저는 그런 걱정이 되는데요 헤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