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ue Day Book 누구에게나 우울한 날은 있다 블루 데이 북 The Blue Day Book 시리즈
브래들리 트레버 그리브 지음, 신현림 옮김 / 바다출판사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우울한 날이 찾아온다. 아무 생각이 없거나 대략 보통 행복한 날들보다 우울해서 머리 속을 비우고 싶은 날이 더 많고 자꾸 속이 상해서 마음이 피곤한 사람들의 비상약으로 이 책을 추천한다. 띄엄띄엄 놓여진 돌다리를 밟아 개울물을 건너듯 그렇게 수월히 우울한 날들을 넘기고 싶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으랴마는, 머리로는 다 알아도 실행은 안 되고 우울이 만만치 않은 숙적이라 퇴치하는 데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 경우라면 각별히 이 책을 추천한다.

책 속의 즐겁고 특이한 동물 사진들은 우울한 사람들의 머리를 한두번은 반드시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결국엔 웃음으로 책 읽는 이의 입가를 비뚜름하게 만든다.

제 아무리 깊은 우울에 잠긴 이일지라도, 차라리 날 쏴죽여라 하고 두 발로 일어선 개미핥기나, 이제 그만 살테니 날 삼켜줍소 하고 뻗은 숫사자의 포즈를 보면 피식 헛웃음을 흘리게 된다. 밀렵꾼만 빼고는 무서울 게 없을 것 같은 거대한 북극곰도 몸을 일으키기조차 피곤하다며 자꾸만 눈 깔린 빙판 위로 미끄러지고, 바나나를 따먹으며 즐겁게만 지낼 듯한 침팬치도 거절당했다고, 이혼당했다고, 직장에서도 짤렸다고 퀭한 눈을 하고 서 있다. (게다가 이 침팬치, 젊어 보이는데 대머리다!)

사람들이 벗어나야지, 극복해야지, 하고 다짐을 거듭하면서도 우울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부정적으로 기울어진 채로 고정된 감정 상태를 쉬이 전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관심이나 주의를 끄는 것이 있으면 우울함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웃음을 주는 동물 사진이 주루룩 걸린 이 책은 그런 용도로 그만이다.

이 책의 가치는 페이지마다 사진 아래 한 두 줄로 적힌 고랫적 금언에 있는 것도 아니요, 그 자체로만 보면 그저 조금 흥미롭고 말면 그만인 사진들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제 발에 묶인 자기 자신을 보고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소리내어 웃을 줄 알게 해주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데,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덜 심각하게 여기면 사는 게 덜 어려워진다는 쉬운 진리를 깨닫게 유도해주는 데 있다.

우울함에 빠진 사람의 마음은 온통 자기 자신에만 매여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울한 사람들의 몰골은 대개 얼마나 흉측한지! 우울한 동물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그걸 얼마나 절실히 깨닫게 되는가! 자기가 싼 똥 옆에서 먹고 자는 돼지조차도 껄껄 웃고 있을 적에는 호쾌한 진골 귀족처럼 보이지만, 한 '우아' 하는 기린도 우울이란 자기 학대 아래서는 털 뽑힌 닭처럼 보기 민망한 모습이 된다.   

우울한 동물들의 피폐한 몰골을 보며, 우리는 우울한 날의 그 못나고 왜소하고 겁장이이고 소심하고 용렬하고 한심하며 서투른 '나'와 그런 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덕이는 '나' 모두에게서 해방될 수 있는 자유를 나꾸어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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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11-01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요즘은 우울해서 무슨 책을 볼까 하던 참이었습니다. "우울한 사람의 모습은 얼마나 흉측한지!"라는 말에 맘 고쳐먹어야지~하고 갑니다.

검둥개 2005-11-02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맘 고쳐먹으셨어요? ^^ 잘 하셨어요!! 저두 우울 모드에 오래 있을 때 보면 정말 얼마나 흉측해보이는지 몰라요 ㅎㅎ 가뜩이나 타고난 미모도 없는데 후천적으로 까먹기까지 해서야 되겠어요? ㅆㅆ

blowup 2005-11-03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 서점에서 휙~ 하고 보았는데, 검둥개 님 해석이 더 멋져요. 저런 교훈을 가져갈 수 있는 검둥개 님, 부럽다.

검둥개 2005-11-04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해석이 멋있다기보다 저 자신이 종종 우울증에 시달리기 때문에 할 말이 많았던 것 같아요. ^^ 오직 종종 자주 우울한 분들에게만 사라고 권해드리겠어요. :-)

sayonara 2005-11-04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빨리 베스트셀러 열풍에 휩쓸렸다고 금방 잊혀진 책 같은데, 리뷰가 참 좋습니다.
지금도 가끔 펼쳐보면서 웃고는 하는데... 나름대로 좋은 책이죠. ㅎㅎㅎ

검둥개 2005-11-05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름대로" 좋은 책이라는 말씀, 정말 맞아요. ^ .^

로드무비 2005-11-07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이 써서 그런지 한두 줄이 마음에 파고들긴 하더군요.^^

검둥개 2005-11-08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_______^*
 

봄날은 간다 (허수경)


사카린같이 스며들던 상처야
박분(博粉)의 햇살아
연분홍 졸음 같은 낮술 마음졸이던 소풍아
안타까움보다도 더 광포한 세월아

순교의 순정아
나 이제 시시껄렁으로 가려고 하네
시시껄렁이 나를 먹여살릴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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巨大한 뿌리 (김수영)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 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8.15후에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 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 종놈, 관리들뿐이었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번도 장안 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 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 제3인도교의 물 속에 박은 철근 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
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면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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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된 정원 (장석남)

 

  나는 오래 된 정원 하나를 가지고 있지
  삶을 상처라고 가르치는 정원은
  밤낮없이 빛으로 낭자했어
  더 이상은 아물지도 않았지
  시간을 발밑에 묻고 있는 꽃나무와
  이마 환하고 그림자 긴 바위돌의 인사를 보며
  나는 그곳으로 들어서곤 했지 무성한
  빗방울 지나갈 땐 커다란 손바닥이 정원의
  어느 곳에서부턴가 자라나와 정원 위에
  펼치던 것 나는 내
  가슴에 숨어서 보곤 했지 왜 그랬을까
  새들이 날아가면 공중엔 길이 났어
  새보다 내겐 공중의 길이 더 선명했어
  어디에 닿을지
  별은 받침대도 없이 뜨곤 했지
  내가 저 별을 보기까지
  수없이 지나가는 시간을 나는
  떡갈나무의 번역으로도 읽고
  강아지풀의 번역으로도 읽었지
  물방울이 맺힌 걸 보면
  물방울 속에서 많은 얼굴들이 보였어
  빛들은 물방울들을 안고 흩어지곤 했지 그러면
  몸이 아프고 아픔은 침묵이 그립고
  내 오래 된 정원은 침묵에 싸여
  고스란히 다른 세상으로 갔지
  그곳이 어디인지는 삶이 상처라고
  길을 나서는 모든 아픔과 아픔의 추억과
  저 녹슨 풍향계만이 알 뿐이지



 

A scene from The Secret Garden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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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5-10-30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답글이 자꾸 날라가요. 여러번 그러네요. ㅋㅋ 인간은 누구나 비밀의 정원을 가지고 있나봐요. 그래서 인생이 더 모순으로 가득한지도 모르겠어요. 진실이 없기 때문에. 진실을 숨기기 때문이겠죠? ^-^;

검둥개 2005-10-31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시장미님 댓글에 댓글 다는 거 이것으로 세번째!!!
에디터로 써야만 써지는 건가봐요... 우어엉


검둥개 2005-10-31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요, 누구나 자신만의 비밀의 정원이 있다고 생각해요. ^___^
은밀하고 수줍은 정원 ㅎㅎ

 

  양철 지붕에 대하여  (안도현)

  양철 지붕이 그렁거린다, 라고 쓰면
  그럼 바람이 불어서겠지, 라고
  그저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삶이란,
  버선처럼 뒤집어볼수록 실밥이 많은 것
 
  나는 수없이 양철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이었으나
  실은, 두드렸으나 스며들지 못하고 사라진
  빗소리였으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절실한 사랑이 나에게도 있었다
 
  양철 지붕을 이해하려면
  오래 빗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맨 처음 양철 지붕을 얹을 때
  날아가지 않으려고
  몸에 가장 많이 못자국을 두른 양철이
  그놈이 가장 많이 상처 입고 가장 많이 녹슬어 그렁거린다는 것을
  너는 눈치채야 한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은 증발하기 쉬우므로
  쉽게 꺼내지 말 것
  너를 위해 나도 녹슬어가고 싶다, 라든지
  비 온 뒤에 햇볕 쪽으로 먼저 몸을 말리려고 뒤척이지는 않겠다, 라든지
  그래, 우리 사이에는 은유가 좀 필요한 것 아니냐?

  생각해봐
  한쪽 면이 뜨거워지면
  그 뒷면도 함께 뜨거워지는 게 양철 지붕이란다

 

[사진은 구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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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10-28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 안 달리는 페이퍼.
에디터로 써야.....
양철지붕에 비 후두둑 쏟아지는 소리 참 좋았어요.^^(끈질긴 로드무비.)


가시장미 2005-10-29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해요.

검둥개 2005-10-30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정말로 댓글이 안 달리는군요. 에디터로 씁니다. 되나 볼까요? 아자!


검둥개 2005-10-30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증말증말 희한하네요. 왜 에디터로 써야만 댓글이 달릴까요. 우어어~~~
지기님께 고쳐달라 해야겠습니다.
끈질기게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저두 양철지붕에 비 떨어지는 소리 겁나게 좋아해요 ㅎㅎ ;)

장미낭자, 돌아와서 기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