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많이 올 거라는 말은 들었지만 눈 오는 거리를 걸어가는 게 무슨 연속으로 얼음덩어리에 뺨과 온몸을 난타당하는 일이도록 그렇게코롬 많이 올 줄은 차마 몰랐다.
점심시간이라고 빌딩 문을 나서니까 바람이 휘잉. 눈이 그야말로 땅과 웬수라도 진 듯이 내리고 있었다. 나온 회전문으로 도루 퇴각. 빌딩 안의 커피숍에서 커피나 홀짝이며 싸들고 온 루쓰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을 읽을 생각이었다. (이어령씨가 쓴 <축소 지향의 일본인>이라는 일본 평론집이 내가 어렸을 때 인기였다. 그걸 읽고난 뒤로 늘 루쓰 베네딕트의 책을 언젠가는 읽으리라 생각했다. 언젠가는! 거의 15년만이 아닌가, 작년 가을에 교회 자선 헌책 세일에 가서 천원 코너에서 그 책을 발견하고 사온 후 일 년 더 기다렸다가 이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가방을 떡 여니까 그 넘의 책이 글쎄 없는 게 아닌가!
책이 없이 한 시간 동안 커피를 마시며 뭘 한단 말인가? 음악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려면 나는 이불 덮고 누워야 되는데?
그래서, 맹렬한 눈폭풍 그 한가운데를 뚫고 헌책방에 책을 사러 가기로 한 것이다. 참 내가 생각해도 미련한 데다가 이렇게 터무니없이 용감할 건 또 뭐냐? 하여간 오 분 거리인 그 헌책방에 횡단보도를 세 개 건너 도착했을 때 외투 모자에 달린 털에는 고드름이 맺혀 있고 물론 외투는 다 젖어 있었다. 신발도 양말도 축축...
열심히 고른 끝에 알랭 드 보통과 빌 브라이슨의 여행에 대한 책을 골랐다. 왼쪽 것은 1불! (아무리 헌책방이라지만 횡재한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이 작가의 팬이기라도 했다면 거의 울지 않았을까! 게다가 하드카바 인데 ^ .^ ) 빌리 브라이슨은 그렇지 않아도 알라딘에 최근 올라오던 서평을 읽고 궁금했던 차여서 책 값은 정가의 반 정도였지만 (별로 안 싸다는 말) 과감히 집어들었다. 저자가 영국에 이십년간 살다가 떠나는 마지막에 다닌 여행에 대한 글이라니까 뭔가 믿음이 가는 게 아닌가. 영국에도 역시 나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뭐, 달리 특별히 따로 관심이 있는 나라도 역시 없기 때문에. --.--;;;


바깥의 눈발이 무서워 괜시리 책방 안을 왔다리 갔다리 하다가 결국 산 책을 들쳐보지도 못하고 회사로 돌아가겠다 싶어 용감하게 출발했다. 회사 빌딩 안의 커피숍으로 들어가니 점원이 나의 행색을 보고 웃고 만다. 안경을 쓴 눈사람 꼴이었던 것이다. 오늘 산 이 두 권의 책들은 언제 샀는지 절대 안 잊어버릴 것 같다. 오늘 화려한 점심값으로 쓰려던 돈은 역쉬 책값으로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