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에 앉아 있는데 까만 점이 노란 수건 위에서 천천히 좌측으로 움직였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눈꼽만한 크기의 벌레였다. 짙은 밤색에 약간 반투명한 미색의 줄무늬가 세 개쯤 그어져 있었다. 나는 눈 하나도 꿈쩍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벌레를 처치했다. 오래 전에 친구와 나눈 대화를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 때 친구와 나는 둘 다 할랑한 처지였다. 돈은 없고 시간은 많았다. 사실 돈은 친구 쪽에는 있었고 내겐 없었지만, 그 때는 같은 학교의 대학원생이라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평등하다는 어림 없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한 번은 친구가 자못 심각한 얼굴을 하고 와서 내게 이렇게 물었다.
"만약에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평화롭고 행복하고 유쾌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전부 사실을 모른 것에서 비롯된 삶을 고르겠니, 아니면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사실을 제대로 아는 삶을 고르겠니?"
나는 생각도 안 해보고 무조건 후자를 고른다고 했고, 전자의 삶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그 자리에서 일축했다. 친구는 혼란에 빠진 것이 확연해 보였으며 정말로, 진짜로, 를 연발하며 재고를 요청했다. 담배 기운이 뻗쳤는지 나는 "으하하 넌 정말 젊은 영혼이야"라고 부지불식간에 외치고 말았다. 친구는 돌연 젊은 영혼이니 따위 소리를 들은 것이 어처구니 없었는지 그럼 너는 뭐 늙은 영혼이냐, 라고 맞섰고, 나는 약간 무안해진 김에, 전생이라는 것이 있다면 말이지, 너는 갓 빚어진 신선한 영혼이고 나는 이 몸 저 몸 거친 좀 삭은 영혼인 것 같다는 생각이었을 뿐이라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친구는 젊은 영혼이라는 말이 뭔가 좀 철이 없다는 소리로 들렸는지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은 이 삶을 고를래, 저 삶을 고를래 하는 문제를 놓고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이 오래된 대화가 생각난 건 최근에 친구와 메신저를 하면서였다.
그 날 따라 우정이 고파서 나는 늦게까지 인터넷을 배회하고 있었는데 마침 친구가 뿅하고 나타났다.
허겁지겁 대화를 나누자 십 분도 안 되어 역시나, 하는 후회가 몰려왔다.
대화는 실처럼 가늘어진 후에도 끈질기게 이어지는 콧물처럼 겨우겨우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나는 퇴근하고 와서 밥을 지으려면 정말 피곤하다는 불평을 했던 것이다.
친구가 말했다. 너는 착하구나, 퇴근하고 와서 밥도 짓고.
갑자기 그 과거에 행복하고 유쾌하고 평화로운 삶을 골랐어야 한다는 생각이 천둥처럼 머리를 쳤다.
왜 그 순간 그 옛날 일이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다.
지금처럼 감지덕지하며 인생을 살아본 적도 없는데 말이다.
대학에 다닐 때 영어회화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강사는 세계 여행 중에 경비가 떨어진 스웨덴이던가 북구 출신 배낭여행자였는데 (생각해보니 원어민이 아니잖아?) 내가 본 중에 최고의 명화로 "개 같은 내 인생"을 꼽자 지구를 반 바퀴 돌아와서 자기나라 영화의 팬을 만났다고 너무나 좋아했었다. 그러나 역시 북구 출신이어서 그랬는지, 수업 주제로는 팝송 가사처럼 팝콘 같이 가볍기보다는 앞으로 자기의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으냐 같은 진지하다 못해 햇빛 짱짱하던 수강생들의 청춘에 좀 버거운 소재를 골랐었다. 수강생들은 전부 한 명씩 칠판 앞에 나가서 그걸 영어로 말해야 했는데, 나는 혜성 모양을 한 화살표를 그리고 그렇게 살고 싶다고 했다.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죽 가는 혜성처럼 살겠다고. 그 때는 멋진 대답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때쯤이 아마 김중식의 시집을 읽었을 때였을 것이다. 선생 노릇을 하고는 있었지만 나이로 치면 학생과 비슷한 연배였을 강사도 자못 감동받은 표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정말로 상당히 그와 비슷하게 살았다. 돌아보지 않고.
그런데 아차차, 헬리 혜성은 70년을 주기로 돌아온다. 그 때는 왜 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는지? 70년마다 돌아오므로 세대마다 그러니까 한 번씩은 헬리 혜성을 볼 기회를 누리는 셈이다. 헬리 혜성 생각을 하자 갑자기 그 혜성은 얼마나 오래 그렇게 공중을 떠돌며 방랑하는 것인지가 궁금해졌다. 눈부시게 밝은 혜성 머리 부분의 그 빛은 공기와 암석의 마찰로 인한 것이던가? 그렇다면 언젠가는 헬리 혜성도 연료를 소진하고 우주 한 복판에서 스르르 사라지고 말게 될까? 지면과 충돌하며 멋지게 폭발하는 유성의 이미지는 어느 새 사라지고, 헬리 혜성은 이제는 째깍째깍 초침소리와 함께 한없이 나아가는 폭탄처럼 안쓰럽다. 혜성이 스르르 먼지가 되어 사라질 때는 한숨처럼 안도감이 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