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니를 빼는 긴박한 와중에도 의식의 해이를 걱정해 질소가스를 거부하다 노보케인을 맞는 와중에 자칫 기절할 뻔한 나이지만, 술을 마시고 싶은 생각은 날이면 날마다 간절해진다. 정신적 알콜중독이랄까? 한심스럽게도 나에겐 돌이켜보아 백퍼센트 순수하게 행복을 주는 추억이 거의 없다. 연애면 연애, 우정이면 우정, 가족이면 가족, 일이면 일, 과거의 모든 것들이 톱날에 찢겨 너덜너덜해진 가새를 갖고 있다. 그것들은 더이상 피흘리지 않고 열대의 뜨거운 바다 속 해초처럼 흐느적거린다. 돌아보지 않고 살겠다고 한 것은 용감하고 멋지게 한 획 그어보겠다는 생각에서가 아니었다. 나는 비겁자였고 지금도 그렇다. 다만 이제는 결심 같은 것도 하지 않을 뿐.
파트타임으로 일하기 때문에 나는 오후에 출근한다. 지하실 파이프 교체 공사 때문에 실시되는 단수로 그 날 나는 약간 일찍 나와 커피점에 앉아서 크로와상을 우적우적 씹는 것으로 점심을 대체하고 있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것도 정다운 한국어로. 기쁜 추억이 없는 사람들의 특징은 대인기피증이다. 나는 길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것을 강박적으로 싫어한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안절부절하면서 어떻게 대처할까를 고민한다. 그 때는 무사하게 넘겼다. 다행히도 나를 알아본 상대에게 일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형식적인 안부인사를 주고받고, 다시 한번 내가 왜 이번 여름 한국에 가지 않았는지를 변명하고 (이 순간이 제일 지겹다), 바이바이를 했다. 상대가 커피점을 떠나자마자 나는 내 옷매무새를 살피고 뭘 입고 나왔는지 무슨 신발을 신고 있었는지 확인했다. 어쩌다 가끔 마주치는 여자들 사이에서는 우선 무조건 추레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 제일관건이다. 출근길이었던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몇 주 후 비슷한 길목에서 또다시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십분이나 늦은 나는 뛰지 않는 한에서 전속력을 낼 수 있는 방식으로 두 발을 맹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상대가 그것도 정면에서부터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니 도저히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 때 고개를 확 돌리고 닭처럼 용을 쓰며 뛰기라도 했더라면 그야말로 영화감이 될 만한 코미디를 생산했겠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저번에 우연히 만났던 것보다는 그래도 조금 더 잘 아는 이였다. 뜨거운 여름날 이미 늦은 출근길에서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저번처럼 그럭저럭 최악은 아닌 처신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묻지도 않은 상대에게 급히 가는 길인데 늦었다고 말하고 종종걸음을 쳤다. 최악이었다.
오래 전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분명히 구분한다. 물론 그 구분이 항상 맞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구분선을 언제나 유연하게 유지한다. 그래서 판단이 바뀌면 언제든지 선을 바꾸어 그을 수 있도록. 복잡하다 못해 머리 아픈 사태를 단순하게 정리하는 그 사람의 사고방식이 나는 무척 마음에 들어서 그걸 체화하고자 노력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의 구분보다는 선행과 악행에 관심이 많던 나는 악행을 줄이는 대신, 선배 식으로, 악행은 늘 범하듯 범하되 재빨리 회개한다는 식으로 인생철학을 바꾸었다.
그 결과 그 날 직장에서 나는 내내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이년 아니면 삼년만에 그것도 우연히 한 번 보게 된 것인데 그렇게 줄행랑을 치다니. 생각 끝에 이메일을 보내서 차라도 사줄 테니 한 번 볼래, 하고 적어볼까 했는데 희한하게도 이메일이 찾아지지 않았다. 그 날따라 회개를 좀 지나치게 했는지 더위 탓이었는지, 나는 오바해서 그 이의 학과 사무실 담당자에게 이메일을 보내서 옛친구인데 어쩌고 저쩌고 이 이메일을 포워드해달라고 했다. (이메일을 직접 가르쳐달라고 하면 스토커 취급 받을까봐서.) 물론 답장은 오지 않았다. 사실 나라도 답장을 하겠는가? 내가 무슨 물찬제비도 아니고 이런 무참한 날들을 가르며 살아가자니 진땀이 나지 않을 수 없다. (아래 사진은 물찬 제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