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서 첫 사건은 정든 동네 미장원 아줌마 소피아가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머리를 자르러 갔더니 무슨 사연인지 소피아 아줌마가 글쎄 더 이상 그 미장원에서 일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닌가. 흑흑. 요즘 같은 세상에 단돈 만원에 머리를 자를 수 있는 곳은 그 곳 뿐이었는데. 하늘이 무너져도 그렇지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갑자기 어린 시절 다니던 주산학원 선생님과 경리가 밤새 학원 돈을 전부 싸들고 도망갔던 그 쎈세이셔널한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글쎄 주산학원 선생님은 엄연히 마누라와 자식도 있는 사람이었는데! 설마 소피아 아줌마도 그런 까닭으로 이 동네를 뜨신 것은 아니겠지만. 혹여라도 그랬다면 도대체 무슨 사연이길래.
아픈 마음을 안고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좀더 가까운 미용실에 갔다. 이 곳은 아무래도 훨씬 깨끗하고 고객 중에 여인들도 많이 보이는 것이 시설과 기술 면에서 한 단계 위인 듯, 헤어살롱 수준은 아니라도 확실히 미용실 수준은 되는 것 같았다. 삼돌이가 머리에 까치둥우리가 났다고 놀려도, 소피아 아줌마를 잃은 상심에다 원래의 미장원 무섬증이 겹쳐서 꼼짝 않고 있었는데, 슬슬 날씨도 풀리고 도저히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쇼트컷이 어깨에 닿도록 오만가지 방향에 길이로 삐뚤빼뚤 자란 꼴이 내가 봐도 가관은 가관이었다.
이 미용실 아줌마는 86년에 미국에 와서 미용기술을 배웠다는데, 목소리는 화통을 삶아먹은 것 같이 요란하고, 성격은 명랑함이 에이 플러스, 화장한 눈매는 부리부리하다. 동포 만나 반가워, 예절을 차리고 격식을 따져 정중하게 인사부터, 뭐 이런 도입부 같은 건 생략하고, 신상소개부터 현재 가정형편, 교육정도, 살림살이까지 아줌마가 머리에 물 적시는 십분 내에 다 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아줌마의 일사천리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야 한다. 괜히 맞장구를 치려고 하다가는 말 끊는다고 되려 눈치 먹는다.
이 미용실에 단 한 번 온 적이 있었다. 취직 인터뷰가 코 앞에 닥쳤는데 소피아 아줌마가 긴 휴가를 갔던 작년 여름이었다. 그게 소피아 아줌마에게 받는 마지막 헤어컷이 될 줄이야. 그 때 어리벙벙하게 들어서서 무조건 짧게 짤라 달라고 하는 나의 후진성을 기억하시는지, 미용실 아줌마가 이번에는 아주 순순히 짧게 짤라 주신다. 젊어서는 보스턴 시내의 유명 헤어살롱에서 일했다는 이 아줌마는 지난 번에는 짧은 머리형이 수백가지도 더 되는데 무슨 모양을 원하느냐고 나를 달달 볶아서 내 두 손 두 발을 다 들게 만들었었다. 아줌마 보기에 좋게 짤라주세요, 가 정답이었다.
이십년 머리를 자른 노련한 프로답게 아줌마는 이번에는 헤어스탈이나 최신 화장법, 피부관리법, 이런 내 얼굴만 봐도 딱 거리가 먼 화제거리는 애초부터 피하고, 대신 지구온난화 때문에 지금 알라스카의 백곰들이 다 죽어가고 있다는 둥 그것 때문에 지금 미국이 난리라는 둥 믿거나 말거나 뉴스로 나의 관심을 확 끌어댕긴다.
그러면서 내 머리카락이 엄청 곱다는 등, 얼굴도 길어 좋다는 둥, 한없이 부풀리는 게 어디까지 가나 했더니 머리 말리는 막판엔 결국 내가 미인이라는 데까지 왔다. 여기서는 아줌마도 단골 만들려고 빈 말 붙이는 데 좀 힘이 부치는 태가 나는 것 같기는 했다. 참,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도와줄 수도 없고!
어쨌거나 나처럼 미장원 무섬증에 들린 사람까지도 희죽희죽 웃게 만드니 머리 자르는 장사 하나에는 정말 도가 튼 아줌마.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이 아무리 봐도 도저히 학생으로는 볼 수 없는 이 얼굴을 딱 마주하고도 서슴 없이 "학생이지? 그러니까 십퍼센트 깎아서 45불이야", 이러면서 할인까지 해주신다! (학생은 맞는데 야간대학생!) 45불이라는 거금을 내면서도 감읍해서 진짜로 목이 메일 지경이다. 내가 다른 곳도 아니고 미용실에서 미인 소리를 듣다니! 이 세상에 난 보람이 이보다 더 할 수가 없다.
모처럼 스타일리쉬한 미용실에서 머리 하고 왔다고 폼을 잡으면서 집에 돌아갔더니, 삼돌이는 길이가 충분히 짧지 않아서 금방 또 가야 되겠네, 거기는 머리값도 비싼데, 이러면서 미리 걱정까지 해준다. 엉뚱한 데서 기특하기는. 그나저나 이 헤어스탈로 또 반년을 울궈 먹어야 하는데 좀 길어져도 보기 흉하지 않게 해 달라고 한 요구가 얼마나 반영이 됐는지.
소피아 아줌마도 종적을 감추고 십불로 머리 자르는 시대도 막을 내렸으니, 이제부터는 어쩔 수 없이 동포 아줌마네 미용실에 가게 생겼다. 그래도 나이가 드니 이제 "젊은 여자가 좀 이쁘게 멋도 내고 그렇게 하고 다녀야지," 이런 훈계는 더 이상 안 들린다. 그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