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롤드 크릭은 미국 국세청 IRS직원으로 12년째 매일같이 똑같은 시간에 출근해서 똑같은 일을 하고 똑같은 시간에 퇴근하는 생활을 해오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는 환청을 듣기 시작한다. 환청의 내용은 해롤드 자신이 주인공인 일종의 내러티브. 해롤드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상담을 해보지만 정신분열증이 심각하니 처방약을 먹으라는 충고만 듣고 낙심한다. 정신분열증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면 어떻게 해보겠냐는 해롤드의 질문에 정신과의사는 '글쎄, 내러티브라면 문학에 조예가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보겠다'고 하는데.
그 길로 해롤드는 곧장 그 지역 대학의 영문과 교수를 찾아가서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는다. 교수는 물론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Little did he know,"로 시작하는 환청 속의 한 문장을 해롤드가 직접 들려주기까지.
삼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임을 보여주는 "Little did he know"를 가지고 교수는 한 학기 강의를 한 적도 있다면서 십초 사이에 완전히 태도를 바꾸어 해롤드를 도와주기로 한다.
해롤드를 괴롭히는 것은 환청의 성가심도 성가심이려니와 특히 그 "little did he know"로 시작하는 "그는 비록 몰랐지만 그의 죽음이 임박했다"라는 문장이었다.
과연 해롤드는 이 내러티브 속 자신의 죽음을 회피하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교수는 우선 해롤드가 등장하는 이 내려티브가 희극인가 비극인가부터 알아내는 게 좋겠다며 이런 정보를 준다. 희극에서는 종종 주인공을
혐오하는 사람이 등장해서 약간의 갈등 끝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식으로 줄거리가 진행된다고. 같은 지시대상에 대해서도
희극에 쓰이는 언어와 비극에 선택되는 단어가 다르다는 말도 해준다. 그 때부터 해롤드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희극인가 비극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부단히 고심한다.
마침 그
때쯤 해서 해롤드는 국방비와 선거지원비로 쓰이는 22퍼센트의 세금을 고의로 미납한 동네 과자점 주인의 세금기록을 훑어나가는 과제를
맡게 된다. 무정부주의자이며 하바드 법대를 중퇴한 경력의 과자점 주인은 고리타분한 국세청 직원 해롤드와 티격태격하지만 결국
따끈한 쿠키를 계기로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이만하면 아무래도 자신이 속한 내러티브는 희극임에
틀림없다고 득의양양해서 찾아간 교수의 연구실에서 해롤드는 카렌 아이펠이라는 소설가의 10년 전 인터뷰를 보게 되는데, 그
소설가의 목소리가 바로 그의 환청 속 자신의 죽음을 선언한 그 목소리가 아닌가. 인터뷰 속에서 그녀는 여전히 완성되지 않은
그녀의 작품 "죽음과 세금"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교수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카렌 아이펠은 쓰는 작품에서마다 주인공을 죽이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숨을 내쉬고, 해롤드는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며 국세청 데이타베이스를 뒤져 은둔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소설가 카렌 아이펠의 주소로 직접 찾아가는데.
카렌 아이펠이 해롤드를 직접 대면하기 직전 완성한 "죽음과 세금"을 통독한 영문과 교수는 해롤드에게 "미안하지만 이 소설에는 오직 하나의 엔딩만이 가능하고 그건 바로 죽음"이라고 말해 해롤드를 절망에 빠지게 한다. 자기가 죽는 게 아니니 초연한 교수는 "인간은 누구나 죽으며 거기엔 다만 얼마나 일찍 혹은 늦게 죽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라며 되려 언제 어떻게 해롤드가 죽건 이 소설 속에 쓰여진 죽음보다 더 의미심장하고 시적인 죽음이 되지는 못할 것이라고 어설프게 해롤드를 설득하려 한다.
기껏해야 국세청 직원에 불과하고 12년간 혼자 작은 아파트에서 월차 연차 휴가도 안 써먹고 단조로운 생활을 해온 해롤드는 그래도 지금은 정말이지 죽기엔 최악의 시점이라며 울먹인다.
이상은 주말에 본 영화
Stranger than Fiction의 개요.
하지만 어느 시점이 죽어도 나쁘지 않은 시점일 수 있을까? 종족의 멸망에 임해 화력의 열세가 분명한 싸움에 나아가며 늘 '오늘은 죽기에 좋은 멋진 날'이라고 코멘트를 했다던 미국 인디언들 같은 태도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그를 혐오해 마지 않던 미모의 과자점 주인과 사랑에 빠지는 승리를 거두고 어릴 적 꿈이던 기타를 다시 배워 근사한 노래를 연주할 수 있게 되더라도 죽음이라는 인생의 종장이 버티고 있는 한, 희극과 비극은 손등과 손바닥 사이의 차이에 불과할 뿐.
겨울이 다 지나고 계절이 여름에 접어드는 시점에 헐값으로 떨어진 겨울 부츠를 하나 사는 행위에도 최소한 돌아오는 겨울까지는 살이 있어서 지금 사는 부츠를 신어보리라는 낙관적인 가정이 숨어 있다. 겨울 내내 탐을 내던 멋진 부츠를 여름이 돌아와서야 비로소 싼 값에 구입해 내내 옷장에 모셔 두었다가 드디어 눈이 내린 어느 겨울날 신고 나갔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이의 인생은 희극으로 보여야 할까 비극으로 읽혀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