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미국에 도착했을 때 같은 학교에 비슷한 시기에 도착한 다른 한국 학생들과 선배 언니네 집에 라면을 끓여먹으러 놀러 갔던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그 언니네 집은 시내에 있고 학교 기숙사는 시외에 있어서 우리는 부른 배를 하고 기분 좋게 버스를 탔다. 스무살 초중반의 우리들은 외국에서 처음 시작하는 생활에 여러모로 아무래도 들떠서 버스 안에서 요란하게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물론 한국말로.

그렇게 십 분 쯤 지났을까 버스 안에 앉아 있던 사오십대 쯤 되어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고함을 질렀다. 조용히 좀 하라는 훈계가 아니라 남의 나라에 와서 떠들고 싶으면 영어로 떠들라는 소리였다. 추레한 옷차림에 까맣게 타들어간 얼굴이 노동을 업으로 살아온 이 같아 보였다. 떼거리로 몰려 있을 때 으레 그렇듯 남들 눈을 의식하고 있지 않던 우리는 일시에 입을 다물었다.

몇 정류장이 지나서 그는 내렸다. 낯선 땅에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인종주의에 분개한 우리 중 한 명은 뒤늦게 분명 그 사람은 우리를 무슨 네일샵에서 일하는 한국여자애들인 줄로 알았을 거라며 씩씩거렸다. '인종주의가 유학생과 네일샵 근무자를 가릴 것인가? 그러게 진작진작 조용히 대화를 할 것이지', 나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어쨌든 그 이후로 우리는 공공장소에서 한국어로 대화를 할 때마다 좀 위축되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훨씬 덜 노골적인 다양한 인종주의의 얼굴에 민감해졌다. 키가 크고 메릴 스트립의 얼굴을 좀 닮은 한 백인 여교수의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뭘 물어볼 때마다 단지 말을 나누는 것만도 얼마나 불편해 하는지! 괜히 그 교수를 닮은 메릴 스트립까지 싫어졌다.

평소엔 신경을 쓰고 살지는 않지만, 미국에서 허가를 받아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언제나 거주허가증을 소지해야 하는 의무가 있으며 이사를 하면 주소를 반드시 신고해야 하고 법을 어기면 바로 추방되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동네 수퍼에 식용유를 사러 나갔다가 운 나쁘게 경찰이 거주허가증을 보기를 요구하면 바로 거주권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어떻지는 모르지만 요즘 같은 시절에 집에다 안전하게 모셔두었다든가 하는 사유가 통할 것 같지 않다.

신분증 없이는 길 건너 슈퍼에 찬거리도 못 사러 가게 하다니 엄청 치사하다고 생각이 되지만, 사실은 그런 법이 한국의 외국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래 전에 알고 지낸 한 캐나다 친구는 경찰이 요구하면 곧바로 외국인 거주증명서를 내보여야 했다. 길거리에 서서 경찰이 한국의 외국인 데이터베이스에 그 친구의 번호를 확인하는 동안 얌전히 기다려야 했다. 그러니까 한국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사실 불평을 해서는 안 되는 건가? 어쨌든 나는 한국 국민이니까?

일 년 반 전에 영주권을 얻었는데 한국 영사관에 여권을 연장하러 갔더니 바로 주민등록번호를 말소해버렸다. 주민등록번호는 일제의 잔재이며 폐지되어야 할 과거의 소산이라고 늘 생각했건만, 막상 주민등록 번호가 직직 그어져버린 내 등본을 상상하니 졸지에 이등국민으로 전락했다는 생각에 낙심을 하고 말았다. (실제로 주민등록번호 없이 살기란 매우 복잡하다는 사실을 나는 예전에 직장에 같이 근무했던 한국 국민-캐나다 교포의 사례를 통해 잘 알고 있다.)

세상에 아쉬워할 게 없어서 열두자리 주민등록 번호를 아쉬워하니 세상에 이런 아이러니가 따로 없다.

어렸을 때 사회 교과서에서 주거이전의 자유라는 말을 보고 코웃음을 쳤었다. 아니 자기가 가고 싶은 데 가서 사는 게 무슨 대단한 자유람, 하고. 이제 보니 주거이전의 자유란 납세 이하 기타 등등의 '신성한' 국민의 의무를 다할 때에야만 간신히 얻어 누릴 수 있는 대단한 권리였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얼마나 복잡하고 한심스러운지.
우라질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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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05-16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세요. 이 말씀 드리고 싶군요. 오랫만이죠.^^

2007-05-16 17: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난티나무 2007-05-17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입니다. 우라질!ㅠㅠ

검둥개 2007-05-17 0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지요? ^^

속삭님 모국 생활과 외국 생활 각각에 장단점이 있다고 봐요.
원래 남의 떡이 커보인다고 항상 불평을 하게 되죠. ^^
모든 곳에 속하는 사람은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 아닌가요?

난티나무님 ㅎㅎ 그러게 말예요.
잘 살다가 왜 가끔씩 이런 문제들에 화가나는 걸까요. ㅠ.ㅠ

마냐 2007-05-17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대단한 권리로군여...쩝. 당연히 화나실만한 일인거 같슴다. 쩝.
 

주말에 남편과 코스코라는 대형 도매 할인점에 장을 보러 갔다. 일년에 얼마얼마를 내고 멤버가 되어야만 사용할 수 있는 이 할인점은 일종의 창고형으로 상품의 가격을 낮추는 대신에 한 번에 보통 포장 분량의 두 배 이상을 사도록 함으로써 이문을 맞추게 되어 있었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 잠실 운동장만한 창고에 들어서니 상상을 초월하는 온갖 상품들이 디지탈 카메라에서부터 건포도, 세제에서 정원의자까지 그득하게 쌓여 있었다. 남편과 나는 이 갑작스런 풍요에 혹여 압도되어 예산을 초과하지 않을까 미리부터 겁을 집어먹으며 평소에는 값이 비싸 먹어볼 엄두도 내지 못하던 생선과 과일을 카트에 담았다. 조심에 조심을 거듭한 덕택에 우리는 예산을 초과함 없이 장보기를 마쳤다.

집에 돌아와서 텅텅 비어 있던 냉장고를 채우는데 양파 자루 하나가 냉장고의 야채 서랍 하나를 통채로 채웠다. 남편과 나는 막 씻은 포도를 집어 먹으며 갑자기 우리 삶의 질이 세 배쯤 향상된 것 같다는 감상을 주고 받았다. 냉장고에 생선이 들어가 있고 식탁 위에 놓인 사과 꾸러미를 보고 있으니 갑자기 인생에 성공한 듯한 엉뚱한 승리감이 들었다. 물질적 풍요가 삶의 질을 결정할 수는 없다는 어린 시절 생각은 그러고보면 사실 철없는 것이었다. 먹을 거리가 다 떨어진 부엌에서 주린 배를 욺켜쥐고 행복을 논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문자 그대로 삼시 세 끼를 잘 먹는 것만으로도 삶은 훨씬 살 만한 것이 되어 준다.

마루바닥에 앉아서 모처럼 맛보는 포도를 우물거리고 있으니 먹는 것에 관해서는 늘 최고로 큰 몫을 고르는데 주저함이 없었지만, 그 외의 모든 다른 선택에 있어서 언제나 가장 고생스럽고 어려운 과제를 골라잡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건 바로 그런 최고로 어려운 과제만이 삶에 가장 심오한 도전을 주고 가장 깊은 경험을 가능케 하며 가장 원대한 성취를 할 수 있게 해준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지레짐작이 그러하듯이 그런 추측도 사실과는 상당히 무관해서, 결과는 늘 그야말로 피곤하고 스트레스로 가득하고 머리 아픈 일상이 되게 마련이었다. 인생철학이 언제부턴가 완벽주의에서 대충주의로 방향이 틀리우고 이를테면 마지막 한 오타까지 고치자에서 대충 이만하면 됐다는 태도로 바뀌면서부터 삶은 훨씬 견딜만하고 심지어는 가끔 즐길만 한 것이 되었다.

어렸을 적부터 나는 내 성년기가 찢어지게 가난하고 피곤하고 스트레스로 가득찬 삶이 될 거라고 지레짐작하는 버릇이 있었다. 사실은 유년기도 대충 비슷했으니 아마 그 짐작은 유년기와 완전히 다른 성년기의 삶을 꿈꿀 줄 모르는 야심과 상상력의 부족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얼마나 배고프고 슬프고 처량한 삶이 되건 유년기의 내가 꿈꾼 삶은 인생의 정수를 맛보는 그런 면에서 다른 배부르고 신나고 행복한 삶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그런 대단한 삶이었다.

코스코에서 헐값에 포도와 생선을 잔뜩 사들고 오는 길에 나는 그 대단한 삶의 이상과 공식적으로 바이바이를 했다. 인생의 정수가 도대체 뭐에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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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5 07: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07-05-15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서운 곳이죠..워낙에 소매보단 박스단위의 도매를 처분하는 곳이라...^^
그래도 생필품 파는 곳에 워낙 진기한 물건들이 많은지라..식료품코너도
그렇고요..^^

2007-05-15 1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owup 2007-05-15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미국 코스트코도 그렇게 대량판매만 하는군요.
아. 그 물량에 질려서 저는 두 번 갔다가 다시는 못 갔어요.
근데. 가끔 아쉬울 때가 있더군요. 수입품이 상대적으로 싸서 말이죠.
그치만 냉장고에서 썩어날 걸 생각하면 꾹 참는 편이 나아요.
사람도 무지 많다고 하던걸요.
사람들 많은 걸 겁내요.
저도 냉장고가 그득해지면 인생이 풍요로워졌다는 기분이 들곤 해요.

검둥개 2007-05-16 0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오랜만예요 ^.^ 잘 지내셨어요?
저희는 대용량으로 사와도 다 먹어치워요 ㅎㅎ

속삭님 글쎄 한 입 더 먹이는 게 별 거 아닐 것 같지만 그렇지 않죠?
사는 데 필요한 게 얼마나 많은지 ^^;
좌절하지 마시어요. ㅎㅎ

Mephisto님, 한 장소에서 그렇게 다양한 종류의 물건을 파는 것을 보니 신기하더라고요.
수박과 티비가 같은 상점에 있는 것이요. :)

속삭님, 중국의 생활은 좀 어떻습네까? 여전히 열혈독서 중이신가요? ^^
왜 저한테 매롱하시고 그라시나요? =3=3=3

와아, namu님 잘 지내셨어요? 제가 워낙 뜸하게 나타나다보니 ^^;; 이제 방학이라 자주 나타날 거야요.
제가 갔을 때는 그렇게 붐비지 않았어요.
사람보다도 천장까지 쌓인 산더미 같은 물건들이 더 겁나더라고요.
비싼 디지털 카메라가 산처럼 쌓여 있는 걸 보니 묘한 생각이 들었어요.
 

해롤드 크릭은 미국 국세청 IRS직원으로 12년째 매일같이 똑같은 시간에 출근해서 똑같은 일을 하고 똑같은 시간에 퇴근하는 생활을 해오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는 환청을 듣기 시작한다. 환청의 내용은 해롤드 자신이 주인공인 일종의 내러티브. 해롤드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상담을 해보지만 정신분열증이 심각하니 처방약을 먹으라는 충고만 듣고 낙심한다. 정신분열증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면 어떻게 해보겠냐는 해롤드의 질문에 정신과의사는 '글쎄, 내러티브라면 문학에 조예가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보겠다'고 하는데.

그 길로 해롤드는 곧장 그 지역 대학의 영문과 교수를 찾아가서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는다. 교수는 물론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Little did he know,"로 시작하는 환청 속의 한 문장을 해롤드가 직접 들려주기까지.

삼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임을 보여주는 "Little did he know"를 가지고 교수는 한 학기 강의를 한 적도 있다면서 십초 사이에 완전히 태도를 바꾸어 해롤드를 도와주기로 한다.

해롤드를 괴롭히는 것은 환청의 성가심도 성가심이려니와 특히 그 "little did he know"로 시작하는 "그는 비록 몰랐지만 그의 죽음이 임박했다"라는 문장이었다.

과연 해롤드는 이 내러티브 속 자신의 죽음을 회피하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교수는 우선 해롤드가 등장하는 이 내려티브가 희극인가 비극인가부터 알아내는 게 좋겠다며 이런 정보를 준다. 희극에서는 종종 주인공을 혐오하는 사람이 등장해서 약간의 갈등 끝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식으로 줄거리가 진행된다고. 같은 지시대상에 대해서도 희극에 쓰이는 언어와 비극에 선택되는 단어가 다르다는 말도 해준다. 그 때부터 해롤드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희극인가 비극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부단히 고심한다.

마침 그 때쯤 해서 해롤드는 국방비와 선거지원비로 쓰이는 22퍼센트의 세금을 고의로 미납한 동네 과자점 주인의 세금기록을 훑어나가는 과제를 맡게 된다. 무정부주의자이며 하바드 법대를 중퇴한 경력의 과자점 주인은 고리타분한 국세청 직원 해롤드와 티격태격하지만 결국 따끈한 쿠키를 계기로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이만하면 아무래도 자신이 속한 내러티브는 희극임에 틀림없다고 득의양양해서 찾아간 교수의 연구실에서 해롤드는 카렌 아이펠이라는 소설가의 10년 전 인터뷰를 보게 되는데, 그 소설가의 목소리가 바로 그의 환청 속 자신의 죽음을 선언한 그 목소리가 아닌가. 인터뷰 속에서 그녀는 여전히 완성되지 않은 그녀의 작품 "죽음과 세금"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교수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카렌 아이펠은 쓰는 작품에서마다 주인공을 죽이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숨을 내쉬고, 해롤드는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며 국세청 데이타베이스를 뒤져 은둔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소설가 카렌 아이펠의 주소로 직접 찾아가는데.

카렌 아이펠이 해롤드를 직접 대면하기 직전 완성한 "죽음과 세금"을 통독한 영문과 교수는 해롤드에게 "미안하지만 이 소설에는 오직 하나의 엔딩만이 가능하고 그건 바로 죽음"이라고 말해 해롤드를 절망에 빠지게 한다. 자기가 죽는 게 아니니 초연한 교수는 "인간은 누구나 죽으며 거기엔 다만 얼마나 일찍 혹은 늦게 죽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라며 되려 언제 어떻게 해롤드가 죽건 이 소설 속에 쓰여진 죽음보다 더 의미심장하고 시적인 죽음이 되지는 못할 것이라고 어설프게 해롤드를 설득하려 한다.

기껏해야 국세청 직원에 불과하고 12년간 혼자 작은 아파트에서 월차 연차 휴가도 안 써먹고 단조로운 생활을 해온 해롤드는 그래도 지금은 정말이지 죽기엔 최악의 시점이라며 울먹인다.

이상은 주말에 본 영화 Stranger than Fiction의 개요.

하지만 어느 시점이 죽어도 나쁘지 않은 시점일 수 있을까? 종족의 멸망에 임해 화력의 열세가 분명한 싸움에 나아가며 늘 '오늘은 죽기에 좋은 멋진 날'이라고 코멘트를 했다던 미국 인디언들 같은 태도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그를 혐오해 마지 않던 미모의 과자점 주인과 사랑에 빠지는 승리를 거두고 어릴 적 꿈이던 기타를 다시 배워 근사한 노래를 연주할 수 있게 되더라도 죽음이라는 인생의 종장이 버티고 있는 한, 희극과 비극은 손등과 손바닥 사이의 차이에 불과할 뿐.

겨울이 다 지나고 계절이 여름에 접어드는 시점에 헐값으로 떨어진 겨울 부츠를 하나 사는 행위에도 최소한 돌아오는 겨울까지는 살이 있어서 지금 사는 부츠를 신어보리라는 낙관적인 가정이 숨어 있다. 겨울 내내 탐을 내던 멋진 부츠를 여름이 돌아와서야 비로소 싼 값에 구입해 내내 옷장에 모셔 두었다가 드디어 눈이 내린 어느 겨울날 신고 나갔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이의 인생은 희극으로 보여야 할까 비극으로 읽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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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7-05-14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울이 오기 전에, 또는, 큰맘먹고 산 부츠를 한 번 신어보지도 못하고
죽는 경우도 더러 있잖아요.
꼭 갖고 싶은 것, 꼭 먹고 싶은 것, 꼭 하고 싶은 말은 하면서 살아야 할 것 같아요.
검둥개님, 그렇잖습니까?^^

검둥개 2007-05-15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이미지 바꾸셨네요 ^.^
글쎄 그 꼭 갖고 싶고 먹고 싶고 하고 싶은 게 뭔지를 잘 모르겠더라니까요. =3=3=3
 

말만 사월 중순이고 봄이지 날씨로 치면 십일월이나 이월인가 싶게 바람이 차고 거리는 어둑신하다. 가로수에 푸른 잎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꽃망울 같은 걸 볼 기대는 일찍이 접어야 한다. 유달리 일찍 겨울이 오는 이 지역의 기후를 고려하면 새해의 이 시점에도 봄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은 정말이지 사람들을 팔짝 뛰고 돌아가시게 하기 안성맞춤이다.

어제부터는 바람이 심한 와중에 폭우가 내렸다. 노어이스터 폭풍이라고 한다. 내가 사는 이 동네에서 오늘은 보스턴 마라톤이 열리는 날이고 일종의 휴일인 패트리어츠 데이이기도 하다. 일종의 휴일이라고 하는 건 직장에서는 패트리어츠 데이를 휴일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컴퓨터에서 요 일주일 간 내내 비가 내린다는 기상예보를 접한 후 오늘은 꾀병으로 병가 휴가를 내기로 했다.

일단 직장을 빠져먹는다는 결심을 세우자마자 갑자기 늦은 일요일 밤에 하고 싶은 일이 어찌나 많아지는지 커피를 끓여마시고 컴퓨터 앞에서 하릴 없이 최근 영국 왕위 승계 서열 두번째인 윌리엄 왕자가 대학 때 만나 사년간 사귀어오던 여자친구 케이트를 차벼렸다는 타블로이드 기사를 낱낱이 읽어내려갔다. 엉뚱한 일에 갑작스런 계절풍처럼 불어닥치는 이 집착. 여자친구는 왕자와 결혼하게 되리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다가 갑자기 관계가 틀어지자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인생이 그런 거지 뭐. 대학 때 사귄 첫 남자친구랑 결혼하는 여자가 세상에 얼마나 되더냐. 힘내라 케이트!

방금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50 분 전에 올라온 따끈따끈한 기사가 올해 보스턴 마라톤의 승자는 케냐의 Robert K. Cheruiyot라고 말해준다. 오늘이 마라톤이 열리는 날이라는 걸 미리 듣어서 그랬는지 꿈 속에서 나는 터미네이터의 추격을 받고 마라톤 전구간은 족히 됨직한 거리를 맹렬하게 달렸었다. 꿈 속에서 나는 언제가 끝내주는 달리기 주자다. 심지어 물구나무를 서고 두 손으로 달린 적도 있으니까.

늦게 일어나서 밖에 잠시 나가 보니 겨울 이불 두께의 잿빛 구름이 하늘을 짓누르고 있다. 노어이스터가 승승장구하는 일주일 동안 이 지역엔 홍수경보가 내릴 모양이다. 습한 날 담배맛이 은근히 좋은데 그래서 그런지 자꾸만 낡은 담배갑에 눈길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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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4-17 0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제가 영국을 떠난새 이런일이 있었군요. 우아하고 이쁜 케이트였는데 말이지요.
꿈에서나마 열심히 뛰느라 힘드셨겠습니다? 저는 마침 진짜 엄두가 안나는 디자인 과제를 받고 다섯신가 까지 내야하는데 컴퓨터에는 자리가 없고 벌써 두시인 꿈을 실컷 꾸다가 일어났습니다 그려.. 때로는 꿈도 현실만큼 피곤한건가요?
흐린날.. 자체휴가 잘 보내셨지요?

비로그인 2007-04-17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하루키가 뛰었다는 보스턴 마라톤 말이시죠?
참 제게도 오래전부터의 로망인데... 이제 10키로를 헥헥거리며 뛰는 주제에
언감생신 보스턴 마라톤을 달리게 될 그날이 올까요? :)
좋은 곳에 계시나 봅니다.
한국에서 인사드렸습니다 :)

BRINY 2007-04-17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 때 사귄 첫 남자친구랑 결혼하는 여자가 세상에 얼마나 되더냐 -> 그렇죠~ 비록 지금 케이트 귀에는 그런 위로의 말이 안들어오겠지만. 흠흠.

검둥개 2007-04-18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anci님 숙제가 많으시군요! 저도 숙제 때문에 요즘 피곤한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 ^^ 그래도 잘 주무셨지요?

체셔고양이님, 맞습니다. 바로 그 마라톤이지요. 저도 보스턴 마라톤 이름을 들을 때마다 꼭 하루키 생각이 나요. 10키로를 뛰신다니 마라톤 쯤이야 금방이겠는데요! ^^

BRINY님 케이트는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듯 한데. 아무래도 여자끼리라 그런지 케이트 편을 들게되지 않아요? ㅎㅎ
 

http://www.pressian.com/

'직딩', 그 아름다운 스턴트맨들 이야기

[화제의 책] <소심한 김대리 직딩일기>

등록일자 : 2007년 02 월 23 일 (금) 19 : 37

어느 보험회사의 밤 풍경. 연일 계속되는 야근, 입사 3년 차인 K는 계속해서 혼잣말로 "아아. 근로기준법"을 중얼거린다. K는 급기야 인터넷으로 근로기준법의 법정 근로시간 조항을 검색해 읽어주며 "단 하루라도 근로기준법의 보호 아래에서 살고 싶다"며 농담 반, 진담 반의 절규를 늘어 놓는다.

인상을 쓰고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혹은 묵묵히 서류더미들에 파묻혀 야근을 '해내던' 동료들은 K의 얘기를 듣고 모두 "사무실에 전태일 나셨군"이라며 웃어넘긴다. 사실 누구도 야근을 '지시'한 적은 없다. 그런데도 왜 이들은 끝없이 '투덜거리며' 야근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시대의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적어도 한 번 이상은 경험했을 이 풍경에 대해 <소심한 김대리 직딩일기>(철수와 영희 펴냄)의 저자 김대리는 이렇게 말한다.

"물론 회사가 야근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회사가 강요하는 것은 실적과 경쟁이다. 실적을 창출하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법정 근로시간'으로는 불가능하다.

살인적인 경쟁과 생존을 위한 사투가 벌어지는 사기업에서 근로기준법 운운하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엄살'로만 치부된다. '근로기준법은 유치한 응석이 아니라 우리의 성숙한 권리예요!'라고 항변하는 K도 집에서 9시 뉴스를 못 본 지 몇 달이 됐다."

"절대로 오지 않을 안정을 위해 오늘의 불안을 이겨내는 직딩들에게"

▲ <소심한 김대리 직딩일기> ⓒ프레시안

부산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한 보험회사에 근무 중인 김준 씨는 '우연한' 기회로 지난 2004년 11월부터 매주 에 '김대리의 직딩 일기'를 연재 중이다. 그가 털어놓은 그 소소하지만 '짠한' 직장인의 일상이 책으로 나왔다.

<소심한 김대리 직딩일기>는 "절대로 오지 않을 안정을 위해, 오늘도 끝없는 불안을 이겨내고 있을 대한민국 2000만 동료 직장인들"을 위한 것이다.

"이 책은 서점에 널려 있는 허다한 석세스 스토리가 아니며, 또한 성공한 직장인의 자신감 넘치는 처세서도 아닙니다.

오히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직장인이 날마다 겪는 좌절의 연대기이며 처세에 실패한 월급쟁이의 무거운 한숨입니다. 혹은 당신 옆자리에 앉아 있는 동료가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남아 중얼거리는 슬픈 혼잣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직장은 '생존권을 위한 최후의 보루'다"

직장인들이 겪는 애환이야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누가 모르랴. 하지만 김대리가 털어놓는 애환들은 그 어떤 사회학자의 논문보다 구체적이며 그 어떤 노동운동가의 구호보다 절실하다.

어린 시절의 꿈과 현재 내가 잡고 있는 희망 같은 것보다는 "어느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스스로를 설명하는 데 익숙한 우리시대 수많은 직장인들. 사람들은 흔히들 직장을 얻게 되는 것을 사회에 진출한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 시대 직장인의 삶이란 "사회 속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사회 속에 숨어 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이 사람에게 맞고, 저 사람에게 치이며" 그저 "월급이나 꼬박꼬박 나오는 것에 만족하게 되는 인생"이 되어 버렸음을 깨닫게 되더라도 술에 잔뜩 취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도 대한민국의 수많은 '김대리'들의 자화상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직장은 "생존권을 위한 최후의 보루"이기에, '내가 뭐 여기 아니면 먹고 살 데가 없는 줄 아냐'며 사표를 던지고 더 좋은 회사로 스카웃 돼 나간 C대리를 지켜보며 그저 '착잡할' 뿐이다. "스카웃 될 일도 없고, 다른 직장을 알아보기엔 나이가 많고, 사업을 하기엔 돈과 용기가 없는" 남은 사람들이 할 일은 "C대리가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사무실 분위기를 추스르는 것과, 다시 복종에 익숙해지는 것뿐".

김대리는 우리 시대 직딩들은 모두 '스턴트맨'이라고 한다. '몸값 높으신' 유명 배우를 대신해 온갖 위험스러운 장면을 촬영해야 하는 스턴트맨.

"그래, 월급쟁이들이란, 사장의 한 마디에 온 직원이 혼비백산 뛰어다니고 현장에서 사장의 목소리를 대변하면서 남의 돈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 아닌가. 뛰어 내리라면 뛰어 내리고, 죽으라면 죽고, 그렇게 살다가 누구 하나 쓰러져도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고…. 그래, 우리는 모두 스턴트맨이다. 회사를 대신하여 회사가 시키는 일을 하고 있지만, 나의 대역은 없다."

"김대리, 보입니까? 차가 막힌단 말입니다!"

대역 없는 전투를 치르며 계절이 어떻게 바뀌는지도 모르면서 사무실에 갇혀 지내는 직딩들은 그래서 사소한 것에서도 감격하곤 한다.

'이제는 제발 인간다운 삶을 살아보자'며 특단의 사정이 없는 한 야근은 하지 말자고 직원들이 함께 '단결해' 6시 30분에 퇴근길에 오른 김대리와 그의 동료들. "매일 차 없는 밤거리를 홀로 쌩쌩 다니며 퇴근하던" 그들은 '러시아워' 퇴근길 꽉 들어선 차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격한다.

"이럴 수가! 길거리에 꼬리를 물며 늘어선 차량의 행렬, 이것이 말로만 듣던 '러시아워'의 장관이란 말인가! 이번 정시 퇴근 제도에 총대를 메고 나서주었던 K대리에게서 전화가 온다. '김대리, 보입니까? 차가 막힌단 말입니다! 너무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핫핫핫' 차 막히는 퇴근길, 우리들의 소원이란 단지 그런 것이었다."

종종 접하게 되는 '과로사 괴담'을 들을 때면 "남의 일 같지 않은" 것 또한 모든 '김대리'들의 고충. 그럴 때면 그는 "온 나라가 일 중독에 빠진 듯한 대한민국"을 향해 "다들 조금만 게을러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소망한다.

"이유 없이 시작된 인생을 살아가는 작은 이유"를 보여주다

그의 직딩일기에는 보험회사 직원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도 담겨 있다.

공단에서 일하는 생산직 노동자의 교통사고 건을 처리해주기 위해 찾아간 김대리. 보상금으로 70만 원이 각각 본인과 사장에게 지급된다는 설명에 "그럼 제가 야근 못 한 수당 4800원은 어떻게 되죠"라고 묻는 여성 노동자를 통해 그는 "'보상금 70만 원은 내 하룻밤 술값'이라며 값싼 웃음을 흘리던 해당 중소기업 사장은 절대로 넘볼 수 없는" 여성 노동자의 인생이 지닌 가치를 깨닫는다.

가끔은 스스로의 몸을 "다른 사람보다 더 큰 돈으로 계산해주길" 바라는 '몸 엄살'이 심한 대학교수, 고위 공무원, 전문직 고소득자들을 만나기도 한다. 김대리는 "나를 일반 노가다들과 똑같은 기준으로 보지 마라"며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던 한 대학교수를 통해 "정신노동이 육체노동보다 훨씬 '비싼' 몸이며, 서류와 컴퓨터로 이루어지는 노동이 땀과 힘으로 이뤄지는 노동보다 가치 있는 일이라는 사회적 편견"과도 맞닥뜨린다.

"공포영화의 귀신이나 살인마보다 더 무서운" 상사 앞에서는 늘 비굴해지면서도 양복 왼쪽 안주머니에 항상 넣고 다니는 '사표'라는 '수류탄'을 던지기에는 용기가 부족한 직장인. 하지만 김대리는 "어차피 넥타이는 매어졌고 우리들은 출근해야 한다"는 세상의 '법칙'을 이해하고 있다.

하기에 그가 바라는 것은 그저 "이유 없이 시작된 인생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작은 이유를 찾아가며 삶을 채워가는" 것일 뿐이다. 어쩌면 김대리는 그의 책 <소심한 김대리 직딩일기>를 통해 '소심하고 평범한 직딩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작은 이유를 이미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정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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