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만 사월 중순이고 봄이지 날씨로 치면 십일월이나 이월인가 싶게 바람이 차고 거리는 어둑신하다. 가로수에 푸른 잎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꽃망울 같은 걸 볼 기대는 일찍이 접어야 한다. 유달리 일찍 겨울이 오는 이 지역의 기후를 고려하면 새해의 이 시점에도 봄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은 정말이지 사람들을 팔짝 뛰고 돌아가시게 하기 안성맞춤이다.
어제부터는 바람이 심한 와중에 폭우가 내렸다. 노어이스터 폭풍이라고 한다. 내가 사는 이 동네에서 오늘은 보스턴 마라톤이 열리는 날이고 일종의 휴일인 패트리어츠 데이이기도 하다. 일종의 휴일이라고 하는 건 직장에서는 패트리어츠 데이를 휴일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컴퓨터에서 요 일주일 간 내내 비가 내린다는 기상예보를 접한 후 오늘은 꾀병으로 병가 휴가를 내기로 했다.
일단 직장을 빠져먹는다는 결심을 세우자마자 갑자기 늦은 일요일 밤에 하고 싶은 일이 어찌나 많아지는지 커피를 끓여마시고 컴퓨터 앞에서 하릴 없이 최근 영국 왕위 승계 서열 두번째인 윌리엄 왕자가 대학 때 만나 사년간 사귀어오던 여자친구 케이트를 차벼렸다는 타블로이드 기사를 낱낱이 읽어내려갔다. 엉뚱한 일에 갑작스런 계절풍처럼 불어닥치는 이 집착. 여자친구는 왕자와 결혼하게 되리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다가 갑자기 관계가 틀어지자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인생이 그런 거지 뭐. 대학 때 사귄 첫 남자친구랑 결혼하는 여자가 세상에 얼마나 되더냐. 힘내라 케이트!
방금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50 분 전에 올라온 따끈따끈한 기사가 올해 보스턴 마라톤의 승자는 케냐의 Robert K. Cheruiyot라고 말해준다. 오늘이 마라톤이 열리는 날이라는 걸 미리 듣어서 그랬는지 꿈 속에서 나는 터미네이터의 추격을 받고 마라톤 전구간은 족히 됨직한 거리를 맹렬하게 달렸었다. 꿈 속에서 나는 언제가 끝내주는 달리기 주자다. 심지어 물구나무를 서고 두 손으로 달린 적도 있으니까.
늦게 일어나서 밖에 잠시 나가 보니 겨울 이불 두께의 잿빛 구름이 하늘을 짓누르고 있다. 노어이스터가 승승장구하는 일주일 동안 이 지역엔 홍수경보가 내릴 모양이다. 습한 날 담배맛이 은근히 좋은데 그래서 그런지 자꾸만 낡은 담배갑에 눈길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