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남편과 코스코라는 대형 도매 할인점에 장을 보러 갔다. 일년에 얼마얼마를 내고 멤버가 되어야만 사용할 수 있는 이 할인점은 일종의 창고형으로 상품의 가격을 낮추는 대신에 한 번에 보통 포장 분량의 두 배 이상을 사도록 함으로써 이문을 맞추게 되어 있었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 잠실 운동장만한 창고에 들어서니 상상을 초월하는 온갖 상품들이 디지탈 카메라에서부터 건포도, 세제에서 정원의자까지 그득하게 쌓여 있었다. 남편과 나는 이 갑작스런 풍요에 혹여 압도되어 예산을 초과하지 않을까 미리부터 겁을 집어먹으며 평소에는 값이 비싸 먹어볼 엄두도 내지 못하던 생선과 과일을 카트에 담았다. 조심에 조심을 거듭한 덕택에 우리는 예산을 초과함 없이 장보기를 마쳤다.

집에 돌아와서 텅텅 비어 있던 냉장고를 채우는데 양파 자루 하나가 냉장고의 야채 서랍 하나를 통채로 채웠다. 남편과 나는 막 씻은 포도를 집어 먹으며 갑자기 우리 삶의 질이 세 배쯤 향상된 것 같다는 감상을 주고 받았다. 냉장고에 생선이 들어가 있고 식탁 위에 놓인 사과 꾸러미를 보고 있으니 갑자기 인생에 성공한 듯한 엉뚱한 승리감이 들었다. 물질적 풍요가 삶의 질을 결정할 수는 없다는 어린 시절 생각은 그러고보면 사실 철없는 것이었다. 먹을 거리가 다 떨어진 부엌에서 주린 배를 욺켜쥐고 행복을 논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문자 그대로 삼시 세 끼를 잘 먹는 것만으로도 삶은 훨씬 살 만한 것이 되어 준다.

마루바닥에 앉아서 모처럼 맛보는 포도를 우물거리고 있으니 먹는 것에 관해서는 늘 최고로 큰 몫을 고르는데 주저함이 없었지만, 그 외의 모든 다른 선택에 있어서 언제나 가장 고생스럽고 어려운 과제를 골라잡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건 바로 그런 최고로 어려운 과제만이 삶에 가장 심오한 도전을 주고 가장 깊은 경험을 가능케 하며 가장 원대한 성취를 할 수 있게 해준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지레짐작이 그러하듯이 그런 추측도 사실과는 상당히 무관해서, 결과는 늘 그야말로 피곤하고 스트레스로 가득하고 머리 아픈 일상이 되게 마련이었다. 인생철학이 언제부턴가 완벽주의에서 대충주의로 방향이 틀리우고 이를테면 마지막 한 오타까지 고치자에서 대충 이만하면 됐다는 태도로 바뀌면서부터 삶은 훨씬 견딜만하고 심지어는 가끔 즐길만 한 것이 되었다.

어렸을 적부터 나는 내 성년기가 찢어지게 가난하고 피곤하고 스트레스로 가득찬 삶이 될 거라고 지레짐작하는 버릇이 있었다. 사실은 유년기도 대충 비슷했으니 아마 그 짐작은 유년기와 완전히 다른 성년기의 삶을 꿈꿀 줄 모르는 야심과 상상력의 부족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얼마나 배고프고 슬프고 처량한 삶이 되건 유년기의 내가 꿈꾼 삶은 인생의 정수를 맛보는 그런 면에서 다른 배부르고 신나고 행복한 삶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그런 대단한 삶이었다.

코스코에서 헐값에 포도와 생선을 잔뜩 사들고 오는 길에 나는 그 대단한 삶의 이상과 공식적으로 바이바이를 했다. 인생의 정수가 도대체 뭐에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07-05-15 07: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07-05-15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서운 곳이죠..워낙에 소매보단 박스단위의 도매를 처분하는 곳이라...^^
그래도 생필품 파는 곳에 워낙 진기한 물건들이 많은지라..식료품코너도
그렇고요..^^

2007-05-15 1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owup 2007-05-15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미국 코스트코도 그렇게 대량판매만 하는군요.
아. 그 물량에 질려서 저는 두 번 갔다가 다시는 못 갔어요.
근데. 가끔 아쉬울 때가 있더군요. 수입품이 상대적으로 싸서 말이죠.
그치만 냉장고에서 썩어날 걸 생각하면 꾹 참는 편이 나아요.
사람도 무지 많다고 하던걸요.
사람들 많은 걸 겁내요.
저도 냉장고가 그득해지면 인생이 풍요로워졌다는 기분이 들곤 해요.

검둥개 2007-05-16 0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오랜만예요 ^.^ 잘 지내셨어요?
저희는 대용량으로 사와도 다 먹어치워요 ㅎㅎ

속삭님 글쎄 한 입 더 먹이는 게 별 거 아닐 것 같지만 그렇지 않죠?
사는 데 필요한 게 얼마나 많은지 ^^;
좌절하지 마시어요. ㅎㅎ

Mephisto님, 한 장소에서 그렇게 다양한 종류의 물건을 파는 것을 보니 신기하더라고요.
수박과 티비가 같은 상점에 있는 것이요. :)

속삭님, 중국의 생활은 좀 어떻습네까? 여전히 열혈독서 중이신가요? ^^
왜 저한테 매롱하시고 그라시나요? =3=3=3

와아, namu님 잘 지내셨어요? 제가 워낙 뜸하게 나타나다보니 ^^;; 이제 방학이라 자주 나타날 거야요.
제가 갔을 때는 그렇게 붐비지 않았어요.
사람보다도 천장까지 쌓인 산더미 같은 물건들이 더 겁나더라고요.
비싼 디지털 카메라가 산처럼 쌓여 있는 걸 보니 묘한 생각이 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