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미국에 도착했을 때 같은 학교에 비슷한 시기에 도착한 다른 한국 학생들과 선배 언니네 집에 라면을 끓여먹으러 놀러 갔던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그 언니네 집은 시내에 있고 학교 기숙사는 시외에 있어서 우리는 부른 배를 하고 기분 좋게 버스를 탔다. 스무살 초중반의 우리들은 외국에서 처음 시작하는 생활에 여러모로 아무래도 들떠서 버스 안에서 요란하게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물론 한국말로.

그렇게 십 분 쯤 지났을까 버스 안에 앉아 있던 사오십대 쯤 되어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고함을 질렀다. 조용히 좀 하라는 훈계가 아니라 남의 나라에 와서 떠들고 싶으면 영어로 떠들라는 소리였다. 추레한 옷차림에 까맣게 타들어간 얼굴이 노동을 업으로 살아온 이 같아 보였다. 떼거리로 몰려 있을 때 으레 그렇듯 남들 눈을 의식하고 있지 않던 우리는 일시에 입을 다물었다.

몇 정류장이 지나서 그는 내렸다. 낯선 땅에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인종주의에 분개한 우리 중 한 명은 뒤늦게 분명 그 사람은 우리를 무슨 네일샵에서 일하는 한국여자애들인 줄로 알았을 거라며 씩씩거렸다. '인종주의가 유학생과 네일샵 근무자를 가릴 것인가? 그러게 진작진작 조용히 대화를 할 것이지', 나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어쨌든 그 이후로 우리는 공공장소에서 한국어로 대화를 할 때마다 좀 위축되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훨씬 덜 노골적인 다양한 인종주의의 얼굴에 민감해졌다. 키가 크고 메릴 스트립의 얼굴을 좀 닮은 한 백인 여교수의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뭘 물어볼 때마다 단지 말을 나누는 것만도 얼마나 불편해 하는지! 괜히 그 교수를 닮은 메릴 스트립까지 싫어졌다.

평소엔 신경을 쓰고 살지는 않지만, 미국에서 허가를 받아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언제나 거주허가증을 소지해야 하는 의무가 있으며 이사를 하면 주소를 반드시 신고해야 하고 법을 어기면 바로 추방되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동네 수퍼에 식용유를 사러 나갔다가 운 나쁘게 경찰이 거주허가증을 보기를 요구하면 바로 거주권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어떻지는 모르지만 요즘 같은 시절에 집에다 안전하게 모셔두었다든가 하는 사유가 통할 것 같지 않다.

신분증 없이는 길 건너 슈퍼에 찬거리도 못 사러 가게 하다니 엄청 치사하다고 생각이 되지만, 사실은 그런 법이 한국의 외국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래 전에 알고 지낸 한 캐나다 친구는 경찰이 요구하면 곧바로 외국인 거주증명서를 내보여야 했다. 길거리에 서서 경찰이 한국의 외국인 데이터베이스에 그 친구의 번호를 확인하는 동안 얌전히 기다려야 했다. 그러니까 한국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사실 불평을 해서는 안 되는 건가? 어쨌든 나는 한국 국민이니까?

일 년 반 전에 영주권을 얻었는데 한국 영사관에 여권을 연장하러 갔더니 바로 주민등록번호를 말소해버렸다. 주민등록번호는 일제의 잔재이며 폐지되어야 할 과거의 소산이라고 늘 생각했건만, 막상 주민등록 번호가 직직 그어져버린 내 등본을 상상하니 졸지에 이등국민으로 전락했다는 생각에 낙심을 하고 말았다. (실제로 주민등록번호 없이 살기란 매우 복잡하다는 사실을 나는 예전에 직장에 같이 근무했던 한국 국민-캐나다 교포의 사례를 통해 잘 알고 있다.)

세상에 아쉬워할 게 없어서 열두자리 주민등록 번호를 아쉬워하니 세상에 이런 아이러니가 따로 없다.

어렸을 때 사회 교과서에서 주거이전의 자유라는 말을 보고 코웃음을 쳤었다. 아니 자기가 가고 싶은 데 가서 사는 게 무슨 대단한 자유람, 하고. 이제 보니 주거이전의 자유란 납세 이하 기타 등등의 '신성한' 국민의 의무를 다할 때에야만 간신히 얻어 누릴 수 있는 대단한 권리였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얼마나 복잡하고 한심스러운지.
우라질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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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05-16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세요. 이 말씀 드리고 싶군요. 오랫만이죠.^^

2007-05-16 17: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난티나무 2007-05-17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입니다. 우라질!ㅠㅠ

검둥개 2007-05-17 0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지요? ^^

속삭님 모국 생활과 외국 생활 각각에 장단점이 있다고 봐요.
원래 남의 떡이 커보인다고 항상 불평을 하게 되죠. ^^
모든 곳에 속하는 사람은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 아닌가요?

난티나무님 ㅎㅎ 그러게 말예요.
잘 살다가 왜 가끔씩 이런 문제들에 화가나는 걸까요. ㅠ.ㅠ

마냐 2007-05-17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대단한 권리로군여...쩝. 당연히 화나실만한 일인거 같슴다.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