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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된 학교 - 한 사회학자의 한국교육의 패러다임에 대한 지적 성찰
김덕영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해봤던 문제, 그러나 한국인들이 간과하기 쉽거나 정작 말을 해줘야 할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던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란 머리말의 한 구절처럼 그동안 술자리에서 주고받으며 흘려보냈던 교육에 대한 분개들이 ‘근대’란 글쓴이의 분석틀에 의해 되살려 있다는 느낌이다.
책의 내용을 몇 가지로 정리해보자.
우선 “우리 식의 대학 서열은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따라서 한국인들의 표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일종의 허구적이고 공상적이며 상상적인 개념”으로, 외국인들에게 대학 서열을 묻는 것은 그들에게 전혀 알아들 수 없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곧, “한국인들이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생각하는 대학의 서열화는 한낱 착각이요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교육 전문가라고 하는 모든 국민들이 가장 커다란 관심을 갖는 것은 결코 사교육비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사교육비 경감 역시 매우 중요한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또는 내 자녀가 더 좋은 대학의 더 좋은 학과에 입학하는 것이다(p. 35).” 이에 한국의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말하는 공교육 부실의 참뜻은 “교육 자체의 질이 아니라 남과 다른 교육을 받느냐의 문제”, 곧 좋은 대학과 좋은 학과에 입학하기 위한 “교육의 차이, 기회의 차이”를 자신이 속한 공교육기관에서 얼마나 체감하느냐에 따라 이해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누구에게든지 공통적으로 제공되는 공교육은 부실할 수밖에 없고, 제아무리 고등학교 교육이 개선되더라도 공교육은 영원히 부실하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게 된다(p. 39).” 결국, 대학 서열 구조를 깨지 않는 상황에서 내놓는 무수한 사교육비 경감대책과 공교육개선안은 일종의 눈속임일 뿐이다.
셋째, “한꺼번에 수많은 사람을 테스트하고 채점해서, 그들을 일등부터 꼴등까지 정확하게 양적으로 배열”하기 위해 실시하는 선다형(혹은 객관식) 시험은 언제나 깊은 사고보다는 눈치껏 정답 고르는 데만 온힘을 기울이게 한다.
넷째, “서구의 근대 교육이 개인주의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명제는, 근대적 교육의 일차적인 이념이 개인을 자율적이고 주체적이며 개성을 지닌 인격체로 육성함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구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생들이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개성과 특성을 키우면서, 자신의 주관적 견해를 표현하고 남의 입장과 비판을 수용하며, 이를 바탕으로 대화와 토론을 할 수 있는 인격체로 길러내는 교육문화를 지향하고 있다(p. 154)” 그런데, 우리는 이를 이기주의를 지향하는 것으로 비난하곤 한다. 또한, “근대인들이 일정한 경계를 지니는 서로 다른 삶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은 타자의 존재와 의미를 부정하지 않은 채, 자아의 입장에 서서 타자를 비판하고 타자와 논쟁을 벌일 수 있는 토대가 되(p. 131)”는데, 우리는 아직 전근대적인 집단주의(혹은 국가주의적 사회윤리)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근대인들로 길러지지도 못했기에 학교에서, 대학에서, 지식인 사회에서 토론과 논쟁 문화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에 “한국 사회는 개인주의에 토대를 두고 개인주의를 함양하는 근대적인 계몽에 눈을 돌려야 한다.”
다섯째, “근대경제는 단순히 규율화된 유순하고 복종적이며 생산적인 인간과 그의 노동력만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주체적이고 자율적이며 합리적인 행위의 의지와 능력을 갖춘 경제주체의 존재를 절대로 필요”로 하는데, 한국의 교육은 “학교라는 감옥과 교실이라는 스키너 상자에 갇힌 채 철저히 규율화되어 감으로써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과 사고 그리고 행위유형을 생산하지 못하”는 반쪽의 근대화에 머물러있다.
여섯째, 대학가에(지식인 사회 포함) 만연된 “동종교배와 근친상간의 결과 패거리 문화, 연고주의, 파벌주의가 한국대학을 점령하게 되었다.” 이는 대학과 과학(학문)을 전근대적인 동일성과 획일성의 원리로 후퇴시키는 것이다. 아울러, 교수들의 박사학위가 미국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어, 소수에 지나지 않는 다른 외국 박사 출신들이 그들(미국 학위자들)을 비판하거나 도전하지 못하게 통제한다. 이는 우리 사회를 “서울대의 나라이자 미국 대학의 나라라고” 부르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오랜 복종과 규율화 및 굴종의 시간을 견디고 마침내 시간강사에서 교수가 되는 순간에, 다시 말하자면 일용잡급직에서 사회지도층으로 비상하는 순간에,......그는...과학과 교육이 시작되어야 할 바로 그 시점에 과학이 끝나고 교육이 끝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한국의 과학과 교육이 지니는 구조적 모순과 한계가 있다(p. 300).” 아울러, “대학의 연구소는 연구가 아닌 다른 목적을 위해서 존립하”며, “연구소의 연구원 자리는 연구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 아직 교수가 되지 못한 사람들이 교수가 되기를 기다리며 머무는 자리이다. 연구소는 대학 교수직의 보충중대인 셈이다(p. 304)”
이상 위 책에서 기억나는 대목들 몇 가지를 적어보았다. 평소 이런 문제의식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상의 내용은 신선감이 좀 떨어질 것이며, 익숙한 비판들의 반복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국인들이 간과하기 쉽거나 정작 말을 해줘야 할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던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는것에 이 책의 의의가 있을 것이다. 순간순간 가슴속 어딘가에 일침을 놓는. 책을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의문 하나를 적는 것으로 마무리하면,
글쓴이의 말처럼 우리사회가 전근대적인 집단의식에서 벗어나 주체적, 개체적, 자율적인 근대적 개인들의 공동체(개인주의자들의 공동체 혹은 조직화된 개인주의)가 된다면, 그리고 학교가 규율화로 점철된 반쪽 근대화에서 벗어나 그러한 근대적 개인을 길러내는 근대적 공간이 된다면, 그가 비판하는 문제들이 과연 하나씩 풀릴 수 있을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