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눈이 내렸다. 겨울 아침 눈뜨고 창 밖에서 제대로 된 눈을 본 것이 얼마만인가? 부산과 이곳은 위도가 비슷하지 싶은데 그래도 큰 산이 가깝다고 눈에 인색했던 부산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어제 저녁 산책 길 여름이가 눈발이 한 둘 날린다고 좋아할 때 ‘기대하면 실망이 더 크다. 그러다 말거야.’ 이랬는데. 여름이는 아침에 나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눈이 왔다네~ 눈이 왔다네~’이러면서 집안을 돌아다녔다.

 

눈이 온 건 기쁘다. 그것도 아주 조금만 쌓인 것은 더 기쁘다. 운전해서 출근해야 하는 가을에게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눈 온 기념으로 도시락 싸서 봄이와 여름이를 데리고 도서관에 왔다. 간간이 눈발 날리는 하루를 따뜻하고 편안하게 보내기에는 도서관만한 곳이 없다.

 

도서관! 이 도시의 도서관은 심히 사랑스럽다. 깨끗하고 널찍한데 조용하기까지 하다. 책상마다 친절하게 콘센트가 달려있어 노트북을 펴기도 좋다. 와이파이 인심도 넉넉하다. 인구가 적어서 그런지 대학교 바로 앞에 있는 도서관인데도 빈자리가 군데군데 보인다.

 

도서관에 오기 전 은행에 들렀다.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당한 일 나도 똑같이 겪었다. 카드번호와 비밀번호 빼고는 모든 정보가 다 새어나갔다는데 안심하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아침 9시부터 갔는데도 대기 번호가 27번이었다. 지점장이 나와서 귤이랑, 사탕을 돌리고는 인사를 꾸벅했다. 그래도 자기네 은행은 다른 곳과는 달리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정보는 새어나가지 않았다고, 그러니 비밀번호 변경이나 카드 해지하지 말고 안심하고 돌아가셔도 된다고, 문제가 생기면 자기가 다 책임지겠다고 그랬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말 한 마디가 빠졌다.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바쁜 고객들 아침부터 은행에 나오게 해서 죄송하다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었나? 변명만 줄줄이 늘어놓고, 그래도 우린 다른 두 곳보다 낫다니, 그게 책임자가 할 말인가? 잘못을 했을 때는 그저 솔직 담백하게 잘못했다고 말하는 게 최선이다. 창구 직원이 차라리 나았다. 많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했고, 최대한 빨리 일처리를 해주겠다고 했다. 말이라도 그리하고 고개를 숙이는데 뭐라 하겠는가. 웃으며 당신 잘못도 아닌데 이번 일로 수고가 많다고 한마디 했더니 고마워하더라.

 

 

봄이와 떠날 여행 항공권 결재는 지난 목요일에 했다. 이곳저곳 비교하다 ‘ㅌㅇㅇ’에서 결재했다. 인터넷으로 예약하고 결재하는 건 다 비슷한데 그 곳만은 좀 달랐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ㅌㅇㅇ’가 마음에 있었다. 단체배낭여행으로 유명한 곳이어서 그걸로 가 볼까 했는데, 날짜가 맞지 않아 호텔팩을 고민하다, 내친김에 자유 여행이 되어 버렸다.

 

두 곳에서 내가 원하는 날짜의 항공권을 예약해 두었는데, 한 곳에서는 ‘언제까지 결재하지 않으면 예약이 자동 취소된다’는 협박 비스무리한 문자만 달랑 왔다. 출발 공항을 바꿀 수 있나 싶어서 전화로 물어봤더니 그런 건 인터넷에서 내가 알아봐야 하는 일이지 자기들이 해주는 거 아니란다. 인터넷으로만 영업해서 항공권이 싼 거라면서. 마음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항공권이 가장 싸니 어쩔 수 없이 그걸 사야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ㅌㅇㅇ’에서 전화가 왔다. 내가 예약한 항공권을 곧 결재해야 한다며 어떻게 하겠냐고 물었다. 다른 곳에서 더 싼 항공권을 찾았노라고, 미안하다고 했다. 그랬더니 내가 다른 곳에서 예약한 것과 똑같은 조건의 항공권을 찾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출발지와 도착지를 서로 다른 공항으로 바꿔주기까지 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경유하는 공항에서 무료로 라운지를 이용할 수 있는 이용권도 대신 신청해서 받아주겠단다. 그러니 내 선택은 당연히 ‘ㅌㅇㅇ’였다.

 

은행에서도, 항공권을 결재하면서도 적절한 말 한 마디의 중요성, 마음 깊이 새겼다. 내 입에서 흘러나가는 말은 어떤 말일까 오늘 내내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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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제법 춥다...

그래도 오월만 기다리는 나는 이정도 추위쯤이야 가뿐히 견딜 수 있다.

 

 

 

 

 

두 해 전에도 오월의 여행을 준비했었는데, 내 건강이 나빠져서 수수료 왕창 물고 항공권을 취소하는 가슴 아픈 일이 있었다. 그간 한의원과 병원에 갖다 준 돈이 얼마인데, 올 해는 절대로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 터이다.

 

 

 

 

봄이는 많이 자랐다. 남다른 고등학교 생활 한 해를 보낸 후인지라, 이 겨울방학을 한껏 즐기고 있다. 이사해서 천국같다는 제 방에서 기타 연습한다고 시간가는 줄 모른다. 이학년이 낼 모렌데 그런 딸을 너그럽게 보아 넘길 여유가 있는 내 마음이라니. 고등학교 이학년 딸과 십이박 십삼일짜리 해외여행을 준비하는 엄마가 가져야 하는 마음으로 어울리기는 하다.

 

 

 

 

여름이는 또 어떻고. 남들은 고등학교 때나 겪는 입시 전쟁을 중학교 때 하느라 고생을 제법 하더니 이제는 평온을 찾아가고 있다. 원하는 학교로 전학이 결정되는 이십 일까지 아직 며칠 더 남긴 했지만, 아마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잘 되지 않을까.

 

 

 

 

가을은 늘 그러하듯  행복하다. 혼자 낯선 도시에서 여섯 달을 보냈고, 온 가족이 함께 지낸 지 두 주 째이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물론 게으른 아내가 아직 짐 정리를 덜 끝내서 거실에는 눈 둘 곳 없어 민망하다만 그거야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다.

 

 

 

 

참, 많은 일이 있었던 2013년이었다. 봄이의 고등학교 입학, 가을의 전보 발령, 여름이의 고등학교 고민, 이사. 그 모든 일들이 다 마무리 되고 나니 나는 더 늦기 전에 봄이와 단둘이 여행을 떠날 꿈을 꾼다.

 

 

 

 

어제와 오늘에 걸쳐 항공권을 찾았고, 예약을 했다. 환율을 봐 가며 조만간 결제만 하면 끝이다. 우리는 바스에서 제인 오스틴은, 레이크 디스트릭트에서 베아트리스 포터를, 콘월에서 로자문드 필처를, 요크셔 어느 언덕에서 에밀리 브론테와 프랜시스 버넷을 떠올릴 것이다. 어느 정원에서 올 해 가장 아름다운 장미를 만나면, 그 앞에서 활짝 웃으며 사진도 한 장 찍을지 모르겠다. 이 겨울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건 씨 뿌릴 준비를 하는 농부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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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14-01-15 11:49   좋아요 0 | URL
장미 앞에서 활짝 웃는 사진은 꼭 올려주세요~^^

2014-01-15 1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