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스컴을 통해 소개되는 일반적인 스윙댄스(린디합)의 모습은 기예적인 요소를 특징으로 하는 신나고 경쾌한 복고풍 커플댄스 정도인 것 같다. 항상 그게 아쉽다. 그렇게밖에 비춰지지 못하는 게. 스윙댄스는 단지 기운이 넘치고 신나기만 한 춤이 아니다. 이 춤의 곳곳에는 촌철살인의 유머와 재치가 번뜩이고, 낭만과 에로스가 넘쳐 흐른다. 정신이 달아날 만큼 역동적이지만 느린 템포에서는 더할 나위없이 우아하고 품위있고 서정적인 춤이기도 하다.

 

스윙댄스야말로 니체적 의미에서 진정한 그리스인들의 춤이자 강자적인 춤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춤이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은 오로지 자유와 기쁨, 해방과 발산이다. 이 춤 어느 구석에도 한恨이나 원한감정 같은 건 없다. 스윙댄스는 승화시킬 응어리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비장미라든가 심오한 정신성 같은 걸 보여주지는 않지만, 역설적이게도 깊이랄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바로 그 점이 곧 이 춤의 지극한 건강성을 입증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살사가 교미를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 같다면, 스윙댄스는 그 어떤 초자아로부터도 짓눌려본 적 없는 천진무구한 아이들의 유희 같고, 절도와 엄숙함이 느껴지는 탱고는 중력의 영靈에 짓눌려 내면이 비대해진 문명인들의 제의祭儀 같다. 물론, 언젠가 탱고를 배우게 되면 순식간에 표변하여 탱고야말로 인류가 창조해낸 모든 춤의 종착역이라 예찬할 지도 모를 일이므로 이런 인상평은 함부로 내뱉을 것이 못 되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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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20 1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20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스윙판에서 흔히 쓰이는 용어 가운데 하나로 '스윙감'이라는 게 있다. 댄서가 스윙댄스 특유의 탄성력을 온몸으로 발휘하게 되면 마치 탱탱볼이나 젤리처럼 그의 육체적인 물성이 전적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같은 상태에서 댄서의 탄성운동이 스윙 음악의 리듬과 선율 그리고 파트너의 움직임과 완벽한 삼위일체의 조화를 이루면 소위 그 '스윙감'을 느끼는 상태가 된다. 스윙감이 최고조에 달할 때의 느낌은 가히 무당이 접신했을 때의 순간과 견줄 만 하다고 여겨져 스윙판 사람들은 이런 상태를 스윙신과 접신했다고 혹은 스윙신이 강림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엄밀히 말하면 스윙감을 느끼지 못하는 춤은 춤이라고 할 수가 없다. 춤의 흉내만 내고 있는 기계적 운동일 뿐. 그러나 춤 실력이 일정 고도에 오르고 커넥션이니 모멘텀이니 하는 춤의 물리적 운동 기술에 대해 이론적으로 조예가 깊어진다 해도 스윙감을 영구적으로 획득할 수 있느냐 하면 또 그런 것은 아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춤판의 고수라도 스윙감이 떨어져 오랫동안 슬럼프를 겪기도 한다. 다른 모든 '감'들처럼 스윙감 역시 노력하는 자에게 어느 날 문득 축복처럼 찾아왔다가 또 그렇게 예고 없이 달아나버리고 마는 것이다.

 

플로어에서 파트너와 정신없이 춤추다가 어느덧 스윙감이 최고조에 달하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그러니까 마침내 '접신'하게 되었을 때의 그 황홀한 기분, 일순간 춤의 진리를 터득한 듯한 그 짜릿한 기분은 결코 영구 소장할 수가 없다. 감동적인 책이나 진귀한 물건은 금전적으로 각혈을 해서라도 어떻게든 입수하여 소장할 수가 있는데, 춤판에서 느끼는 절정의 순간은 소유의 차원을 넘어선다. 마치 무수한 광선 입자들의 끊임없는 운동 속에서 홀로그램이 비로소 하나의 상으로 떠오르듯이, '이것이 진정 춤이다'고 말할 수 있는 바로 그 접신의 순간은, 오로지 부단한 발동작과 현란한 춤사위 속에만 일시적으로 찾아올 뿐이다.

 

그래서 내가 느끼는 춤은 존재하는 게 아니라 현상한다. 철저히, 가차없이, 냉엄하게 그러하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결코 지닐 수가 없다는 것. 그저 일시적으로 체험하거나 추억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 너무나 찬란하면서도 영원히 손아귀에 잡히지 않는 환영 같은 그런 속성 때문에 춤은 그토록 황홀하고 또 그토록 허무한 것이리라. 춤에 관해 이런 생각이 들면 나는 정말로 마음 한구석이 푹 내려앉는 것만 같고, 내려앉아버린 그곳이 뭉근하게 아려오고, 그럴수록 더욱 더 춤에 열광하게 된다. 손아귀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를 어떻게든 움켜 쥐어보려고 안달하는 아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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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아르헨틴 탱고를 배울 참이었다. 스윙하고는 체력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인연이 다한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오랜만에 다시 스윙빠를 찾았던 건 순전히 스윙 특유의 텐션 감각을 좀 기억해두면 앞으로 탱고 배울 때 유용하지 않을까 해서였다. 당초에는 이런 불순한 마음 뿐이었는데, 다시 추는 스윙이란 이럴 수가, 일 년 넘게 어둠 속에 처박혀 있던 스윙슈즈 앞에 눈물의 회개라도 하고 싶을 만큼 감격적이다. 그러니까 늘 이런 식이었던 거다. 이렇게 습관적으로 몇 년에 한 번씩 스윙과 극적인 재회를 하게 되면, 2~3년마다 물이 완전히 갈리는 동호회와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소원한 관계가 되고 만다. 동호회 활동을 하지 않아 사람들과의 언어적 교류가 거의 없고 오로지 플로어 위에서 춤에만 몰두하는 데 따른 부작용이라면, 춤 스타일이 곧 그 사람의 성격뿐만 아니라 인격과 됨됨이 그리고 성품까지도 보여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춤이 마치 총체적인 인간성을 반영하는 듯한 착시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데는 이유가 있다. 춤을 추다 보면, 단지 상대방의 춤 실력 뿐만 아니라, 상대가 낙천적이고 쾌활한 사람인지 예민하고 섬세한 사람인지 저돌적이고 성질이 급한 사람인지 등을 가늠할 수가 있고, 지금 이 춤을 영혼을 담아 추고 있는지 아니면 타성에 젖어 기계적으로 추고 있는지도 분간이 되고, 얼마나 긴장해 있는지 또 얼마나 허세를 부리고 있는 지도 알 수 있으며, 파트너를 전적으로 혼란스럽게 하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느끼기에 약간은 미흡했다고 판단된 방금 전의 리딩 때문에 순간적으로 자책하는 기색마저도 눈치 챌 수가 있다. 말 한 마디 나누지 않고도 춤을 통해 상대방의 전반적인 성격이나 내외향적 기질 뿐만 아니라 춤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 춤으로 한 곡을 완성하는 데 있어서의 진정성, 스스로에 대한 엄격함, 파트너에 대한 책임감과 배려 및 충실함의 정도까지도 감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글과 삶이 일견 서로를 투명하게 비추는 듯해도 실상 그 둘 사이에는 언제나 도저한 간극이 존재하며 심지어 때로는 글이 삶의 알리바이가 되기도 하듯이, 그래서 순진한 독자들은 때로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감과 당혹감을 느끼기도 하듯이, 춤과 삶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춤판에 오래 머무른 사람이라면 으레 한 번쯤 난데없는 순간에 예상치 못한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맞고 혼란을 겪었거나 춤 자체의 속성과는 전혀 다른 춤판 사회의 냉혹한 생리에 쓰라리게 실망했던 경험 한 두 가지 쯤은 갖고 있지 않을까. 확실히 춤으로 한 인간의 품성과 인격마저 판단할 수 있다는 생각은 편협하고도 위험한 발상임에 틀림없다. 닉과 카라 같은 챔피언들이 성인군자라서 그토록 춤을 근사하게 추는 건 아닐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착각을 멈출 수 없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춤의 효용 가운데 하나이자 춤이 지닌 신비로운 마력이 아닐지.

 

바운스가 과도하지 않고, 리딩은 부드러우면서도 적당히 강하고, 자세는 안정감 있고, 지금 춤추는 이 순간에 집중하는 눈빛을 보이는 리더, 허세 부리지 않는 리더, 관성적으로 추지 않는 리더, 도공이 도자기를 빚듯 온 영혼을 담아 심혈을 기울여 춤추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 리더, 나르시시즘적 재간이 아닌, 다정하고 따듯한 유머를 구사할 줄 아는 리더, 웃음을 넘어 감동을 주는 리더. 이런 리더와 한 곡을 추고 나면, 나는 그의 인품에 대해 환상에 가까운 일방적인 신뢰를 품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착각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렇담 나는 어떨까. 오늘 홀딩한 당신들에게 나는, 어떤 팔뤄로 기억될까. 부디 기분 좋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팔뤄로 기억될 수 있다면. 물론, 실체와는 별개의 문제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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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08-12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너무나 근사해요. 수양님 스윙 리듬을 타고 춤을 추신단말이죠! 춤을 추는 사람의 몸짓에도 적지 않은 게 담게있군요. 일견 편견이라해도 충분히 그럴것 같아요. 글도 마찬가지잖아요. 편견이라해도 분명 드러나죠 적지않은 것들이. 그나저나 정말이지 춤, 시도해보고싶어집니다. 만날생각만 말고ᆞᆢ

수양 2013-08-13 01:39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춤 꼭 시도해보세요 완전 강추예요!! 첫 스텝을 밟는 순간 정말 과장 안 하고 천지가 진동하면서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ㅋㅋㅋ 정말 하나의 '세계'라고 단언할 수 있어요...!!!
 

어제는 고래서점에 책을 한 백 권 정도 팔아버렸다. 읽다 포기한 책, 선물 받았던 책, 계륵 같은 책, 이제는 작별해도 좋을 책, 왜 샀나 싶은 책 등등. 팔아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한 권 한 권 박스에 넣을 때마다 밀려오는 소회를. 견디기 쉽지 않은 그 헛헛함을. 지난번에는 돈이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팔았었지만 이번에는 내 나름으로 거행한 의식이자 상징적인 퍼포먼스 같은 거였다. 그러니까 다 접고, 다시 춤으로 돌아가기 위한. 계절이 지나 서식지를 옮기는 철새들처럼, 활자와 관념의 인간에서 몸을 쓰는 인간으로 돌아가겠다. 그것도 스윙에서 탱고로 종목을 바꿔서 새롭게. 아주 새롭게. 거짓말처럼 나는 재편성될 것이다.

결심을 굳히고 나니 잠이 안 온다. 두려운 게 있다면 첫 입맞춤의 설렘과 환희 그리고 생의 모든 감각을 되찾은 듯한 열락의 시절이 지나고 나서 결국 언젠가 다시 또 무섭게 마주하게 될 허무와 권태다. 환상이 소진하고 난 뒤의 그 경이에 가까운 지겨움. 도망치고픈 평범함. 완벽하게 육체적인 세계의 무구한 생물성에 대한 끔찍한 절망. 어제도 오늘도 지속되는 익숙한 음악과 시시한 사람들의 똑같은 웃음소리. 그것이 주는 지긋지긋한 환멸감. 기적을 체험했던 곳에서 언젠가 훗날 필연적으로 지옥을 발견하고 절규하게 되리라는 경험에 근거한 전망이 나를 두렵게 한다. 그래도 용기내어 해보기로. 용기. 나로서는 정말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스윙에 대해서 돌이켜 보면, 나는 진지하지도 헌신적이지도 못했다. 그 바닥에 그렇게 오래 눌러 붙어 있었으면서도 끝내 고수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 존재감이라고는 없이 흡사 구천을 떠도는 유령처럼 춤을 춰왔다는 사실이, 나의 불성실을 여실히 방증한다. 사념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매진해도 모자랄 시간을, 나는 얼마나 많은 회의와 염증과 망설임으로 헛되이 흘려보냈나. 우직하게 돌진하는 과격분자가 되고 싶었지만 나는 결국 구제할 수 없는 신경증적 회의주의자였다. 어떤 일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혹은 어떤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불만와 경멸, 미련과 후회를 동력으로 삼는다는 것. 무엇을 배우든 누구를 사귀든 어떤 세계와 조우하든 이런 것이 내 분과 내 꼴일 거라는 생각을 하면 좀 서글퍼진다. 나의 이런 고질적인 태도를 그 누구보다도 혐오할 사람이 바로 나라는 걸 떠올리면 더더욱. 나는 정말 영원히 나를 좋아할 수 없을 것이다.

춤판 사람들 중에는 근면하고 냉철한 정복자처럼 다양한 장르의 춤을 차례로 마스터해나가는 이들도 상당하고, 오늘은 스윙빠 갔다가 내일은 살사빠 모레는 밀롱가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포스트모던하게도 혼용적인 춤을 도입해 즐기기까지 하지만, 애당초 '쿨'하고는 거리가 먼 나 같은 위인으로서는 모두 꿈도 못 꿀 일이다. 아, 그런 건 정말 돈쥬앙 같은 짓이 아닌가, 속으로 분개하면서도 과연 나는 스윙이라는 춤에 한 번이라도 순정하게 몰두해본 적이 있었던가, 절대적 의미를 부여해본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돌이켜보면 부끄러울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목을 바꾼다는 건 확실히 나로서는 전향에 가까운 감행이라고 억지를 써본다. 용기 내어 주사위를 다시 던지는 일이라고. 밀물이 할퀴고 지나간 모래사장 위에 다시 그림을 그리는 일이라고. 결심만으로도 이렇게 잠이 오질 않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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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3-07-19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이팅입니다.

수양 2015-08-05 12:02   좋아요 0 | URL
앗.. 감사해요...
 
라캉의 주체 - 언어와 향유 사이에서
브루스 핑크 지음, 이성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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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이 “과학적 담화의 구조와 작용을 어떤 근본적인 층위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기는 하지만, 그 역시 과학과 마찬가지로 여러 담화들 가운데 단지 하나의 담화에 불과하며, 애당초 대문자 S를 가진 과학Sicence이 존재할 거라는 생각 자체가 “환상”에 불과하다는 브루스 핑크의 언급(267)은, 라캉이 세미나17에서 돌연 S1의 절대성을 부정해버렸던 사실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세미나11에서 S1과 S2는 원초적 억압에 대한 논의에서 도입되며, [$와 결합하는 단항적 기표] S1은 어머니의 욕망을 나타내고, [S1에 사후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최초의 이항적 기표] S2는 부성적 은유의 작용을 통해 원초적으로 억압되는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낸다. 세미나17에 이르러, 사실상 그 어떤 기표든, 이런저런 때에, 주인기표(S1)의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아버지의 이름은 “단지 여하한 오래된 기표”에 불과한 S2에 대립되는 바, 여러 S1 가운데 하나로서 볼 수 있게 된다. -p.341 6장 미주 15

 

S1이 결코 절대적인 무언가가 아니며 그저 여러 S1들 가운데 우연적이고 임의적인 하나에 불과하다면, 정신분석이 탐구하는 진리로서의 무의식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무의식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라캉의 온갖 언설들과 수학소들이 무수한 이항적 기표들이라면, 그 모든 이야기들을 포괄하는 S1, 곧 라캉이 평생토록 심혈을 기울여 얘기하려 했던 무의식 역시 “단지 여하한 오래된 기표”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자신의 이론 역시 하나의 담론에 불과하다는 선언이 과연 자신의 이론 안에서 가능한가. 그렇다면 대체 라캉 이론과 무의식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라캉 이론이 과연 무의식을 탐구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이론적 당위와 근거가 있는가. 정신분석이 정신을 분석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자기 붕괴적인 선언을 자기를 구축하기 위한 명제로서 정식화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어떤 기표든 주인기표(S1)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라캉의 주장 자체가 “마음속에 그려질 수는 있지만” “구성하기는 불가능한”, “위상학적 용어들로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반면, 정확하게 시각화할 수도 구성할 수도 없는” 크로스-캡(230)처럼 느껴진다. (대상a를 직면하도록 하기 위한 일환으로 분석자를 당혹과 혼란과 점증하는 의문들 속에 휩싸이게 만들면서 돌연 상담을 끝내버리곤 했다는 라캉의 임상적 방법론에 대응하는, 라캉 이론 추종자들을 정신차리게 만들기 위한 이론적 방법론인지도-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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