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홍차에 관심이 생겨 네이버 블로그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내린 결론인데, 확실히 홍차, 그릇, 바느질, 요리, 인테리어 따위의 키워드를 공유하는 사람들은 뭐랄까 유사한 라이프스타일을 중심으로 그들만의 독특한 무리를 형성하고 있는 것 같다. 갓 결혼 했거나 미취학 자녀를 둔 전업주부가 대부분인 그녀들의 일상은 대략 다음과 같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고 남편을 출근시킨 뒤 따스한 오전의 햇살을 쬐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갖는다. 향초를 켜놓고 마리아쥬 초코 민트를 마시며 인테리어 잡지를 탐독하고 가끔은 아이들 유치원 선생님께 선물할 쿠키를 굽고 마룬쨈을 만들고 티매트를 만들고 기타 등등. 

한국의 마샤 스튜어트를 표방하는 이들의 블로그는 흡사 광고 카탈로그를 연상케 한다. 나는 이들이 필경 각종 인테리어 및 주부 잡지를 과도하게 섭렵한 나머지 불행히도 뇌구조가 그쪽으로 변형되어버렸을 거라는 추정을 해본다. 마치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데 대한 부작용으로 자꾸만 일기가 소설처럼 쓰여지는 경우처럼. 인간의 일상에 이끼처럼 끼어있는 낡고 구차하고 구질구질하고 가난한 것들이 이들의 블로그에는 흔적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화장실 하수구에 엉겨붙은 머리칼처럼 삶에 필연적으로 잔존할 수 밖에 없는 어떤 것들이 이 여자들의 일상에서는 모조리 제거되어 있다. 철저히 소독된 일상! 그들의 블로그에서는 락스 냄새가 난다.  

그들은 관념성의 추구라든지 지적 열락이라든지 생의 본질에 대한 탐구라든지 정신적인 상승욕구라든지 그런 것 자체에 대한 관심이 애당초 없는 것 같다. 니체의 표현대로 삶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얇은 기름 같은 여성들이랄까. 그들은 그저 맛있는 것을 해먹고 집안을 예쁘게 치장하고 감칠맛 나는 쿠키를 구워서 선물하고 예쁜 찻잔을 사서 아름답게 세팅해놓고 사진을 찍을 뿐이다. 솔직히 말하자. 나는 그들이 저속하고 말초적이고 열등하다고 생각하며, 어떤 면에서는 경멸스럽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들이 부럽다. 소독 과정을 마친 인공적 일상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금방이라도 모델하우스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그들의 일상이 견딜 수 없이 부러운 것이다. 그들의 블로그는 확실히 내게 어떤, 매혹적인 환상을 심어주는 것 같다.  

그들의 블로그를 유람하면서 어쩔 수 없이 의기소침해진다. 이런 생각도 든다. 일단 여유로운 생활 환경이 보장되어 있고 풍족한 물질적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다는 것은, 보다 고차원적인 정신 세계에 입문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그러나 반대로 기본적인 의식주가 빈한한 속에서 관념과 정신성을 추구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여유로운 생활 환경이 고차원적 정신 세계로 상승할 수 있는 선행 조건이 될 수는 있지만 그 반대는 어려운 게 아닐까? 락스 냄새를 감안한다 치더라도 이 여자들의 의식주는 나의 그것보다 훨씬 윤택하다. 그들이 지적으로 나보다 저열하다 할지라도 그들은 어떤 면에서 나보다 훨씬 우월한 게 아닐까.  

여전히 표면적으로 나는 그녀들을 경멸한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이 글을 쓰는 도중에도 그 경멸의 정당성에 대한 의구심은 점점 더 커져만 간다.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먹고 쨈을 만들고 퀼트를 하고 집안을 꽃으로 꾸미는 생활이야말로 어쩌면 진정 실사구시적인 삶인지도 모른다. 생활과 도통 하나도 관련이 없는 푸코, 들뢰즈, 지젝, 바디우 따위가 대체 무슨 쓸모란 말인가. (06.9.23에 썼던 글. 그러나 꼭 그렇지도 않았다. 이후로 나는 쨈을 만들어 먹지도 않았고 집안을 꽃으로 치장하는 유난도 떨지 않았으니까. 그 대신 푸코와 들뢰즈의 책을 몇 권 읽었고, 지젝과 바디우는 내게 여전히 알고 싶은 사람들로 남아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인간이란 그저 각자의 환경과 신념과 가치관 속에서 저 나름의 그릇대로 살아갈 뿐인데, 이때는 참으로 비릿한 상념에 휩싸여 괴로워 했던 거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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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1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0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럿이 함께 - 다섯 지식인이 말하는 소통과 공존의 해법
신영복 외 지음, 프레시안 엮음 / 프레시안북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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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김종철 최장집 박원순 백낙청 선생의 강연 및 토론 내용이 차례대로 실려있다. 그 중 두 번째로 나오는 김종철 녹생평론 발행인- 나는 이 분(함부로 이름을 부르기는 왠지 멋쩍은데 뭐라 해야 할지)을 작년도 창비 봄호에서 <민주주의, 성장논리, 농적(農的) 순환사회>라는 제호의 글로 처음 알게 되었고, 이후 한겨레 사회면에 큼지막하게 실린 인터뷰를 통해 또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지금 이 책이 세 번째인 셈인데, 세 번의 짧은 만남 만으로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이지 이 분을 혁명가라 부르고 싶다. 성장 중단과 농적순환사회로의 회귀라는 기치를 내걸고 녹색평론이라는 사상지로 무장한 혁명가. 처음에 나는 이 분이 내놓은 대안이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심지어 낭만적으로까지 느껴지고) 실현 가능성은 영 희박해 보였기 때문에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이 시대에 무려 자급자족하는 소규모 영농사회로 돌아가자니! 그러나 언젠가부터 이 분의 말을 심각하게 경청하는 나 자신에게 놀라고 있다. 이 분의 말씀은 여전히 '꿈 같은 소리'지만,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순간 어느새 나도 꿈을 꾸게 된다. 불가능을 꿈꾸게 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나에게 혁명가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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率路 2009-05-11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종철 선생님께는 일종의 경외(?)같은걸 느끼는데요, 그게 참 가슴아프게도 저로써는 죽었다 깨어나도 실천할 수 없는 삶의 양식을 실천하고 계시는거 같아서 말이죠. 한마디로 동의는 하되 따라하진 못하겠습니다 지송, 뭐 이런...-_-;;;;;

수양 2009-05-12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뭐 역시 따라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꿈만 꾸고 감탄만 할 뿐이죠. 그래도 새로운 삶의 양식에 대한 꿈이라도 꾸기 시작했다는 게 저로서는 장족의 발전입니다.
 
오래된 일기
이승우 지음 / 창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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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대개 실재하는 인물이나 사건에서 모티브를 끌어와 그것을 모방하고 변용하고 각색하여 소설로 만들어 낸다. 그런 점에서 소설을 '현실에 기생하는 가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듯한 소설을 만들어내기 위해 소설가는 인물이 되었든 사건이 되었든 실재하는 대상을 일정 부분 반드시 '숙주'로 삼을 수밖에 없으며, 그로 인해 소설가는 필연적으로 죄의식(자신이 가짜라는 사실에 대한)과 부채감(실재의 대상을 무단으로 도용한 데 대한)을 갖게 되고, 이것이 바로 소설가의 비극적인 숙명이 된다. 이승우의 단편 <오래된 일기>는 소설로 인해 부채감과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또 다시 소설을 써나갈 수밖에 없는 소설가의 딜레마를 애틋하게 그려낸다. 

작년에 창비 여름호에 실린 이 단편을 몹시 인상깊게 읽은 터라 이렇게 같은 제목의 소설집이 출간된 걸 보니 오랜만에 만난 친구라도 되는 듯이 반가운 마음이 든다. 표제작으로 삼은 것을 보아 작가도 분명 이 작품에 애착을 느낀 모양이다. 다시 읽어봐도 역시 완벽한 작품이다. 완벽하게, 아름답다. 단편집에 수록된 다른 소설들 모두 문장도 플롯도 정교하고 탄탄하다. 문장은 김승옥 정도로 정확하고 복선이나 암시 같은 소설적 장치에서 심리묘사의 디테일에 이르기까지 이 작가의 단편들은 정말이지 정통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요즘의 젊은 작가들은 결코 범접하지도 못할 중후한 아우라가 책 곳곳에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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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움직이는 최면 커뮤니케이션
이시이 히로유키 지음, 홍성민 옮김 / 글로세움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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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음을 움직이는 최면 커뮤니케이션'이란, 상대를 이발소 의자 같은 데다 눕혀놓고 한껏 고압적인 자세로 '레드썬'을 외치며 시작하는 게 아니다. 상대를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최대한 관찰하고 이해하는 태도가 우선이다. 그렇게 충분한 라포르(의식으로 알 수 없는 깊은 차원의 유대)를 형성한 상태에서 최면 커뮤니케이션은 시작된다. 사실 이 책에 언급되어 있는 최면 커뮤니케이션의 구체적인 스킬은 영업의 달인이나 작업의 달인들이 구사하는 감언이설의 실체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말재간으로 사람을 홀리는 술수들이 일견 교활하게 느껴지는 감이 없지 않으나 상대를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만 잃지 않는다면 심리치료와 같이 얼마든지 좋은 방향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 최면술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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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만 관중이 운집해 있는 곳에서는, 어떤 이가 한 가지 행동을 취했을 때 그에 대하여 수만 가지 견해와 수만 가지 평가, 그리고 수만 가지 추측이 나올 수 있다. 그 중 진실은 어떤 것일까. 나는 절대적인 진실은 절대적으로 부재하다고 믿는다. 오직 저마다의 진실, 파편 같은 진실이 존재할 뿐이다. 좀더 냉정히 말하면, 그것은 '진실'이라 명명하기에도 보잘 것 없는, 그저 개인의 욕망의 반영일 뿐이겠지만. 그러므로 나의 진실을 너에게 강요하는 것은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침묵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스윙판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침묵하는 것은 이미 사교계의 속성을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스윙판이라는 곳은 말하자면 바로크 시대 궁중 사교의 장과 별반 다를 바 없다. 파편 같은 진실들이 날마다 무수한 공명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흥겨운 재즈 선율의 장막을 걷어내면, 그곳에는 저마다의 진실들이 수챗구멍의 머리칼처럼 미친 듯이 엉켜있는 것이다. 억측과 소문이 난무하고, 뒷담화와 요설이 끊이지 않으며, 오해와 곡해가 음산한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는 스윙판에서 우리는 모두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고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옥 같은 스윙판을 떠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미지의 허상을 부유하는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끼면서도, 혹은 표적이 되어 무수한 화살을 맞으면서도, 가십과 구설수의 핵심 인물이 되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면서도, 그도 아니면 열심히 춤추고 나서 홀로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가슴 저린 공허에 몸을 떨면서도- 그 모든 비인간적 사태를 감내하며 땀에 절은 스윙화를 꺼내드는 까닭은 무엇일까. 사람 때문에 쓸쓸하고 사람 때문에 상처받으면서 또 다시 사람의 소굴로 찾아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춤에 대한 미련 때문일까.

 

누군가 그 까닭을 물어본다면, 진부하지만 나는 그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서라고 말하겠다. 스윙판은 참으로 찬란한 사바세계다. 어쩌면 스윙판에도 프랙탈 구조처럼 소우주가 깃들어있는 게 아닐까. 저마다의 진실들이 수챗구멍의 머리칼처럼 미친 듯이 엉켜있는 형상, 그거야말로 복잡오묘한 만다라이며 눈부시게 다이나믹한 소우주인지도. 며칠 전에 스윙 동호회 '6개월 이후 사람들' 게시판에 처음으로 글을 남겼다. 동호회에서 춤도 배웠지만 인간과 사회도 함께 배운 것 같다고 적었고, 그 세 가지 모두를 동시에 가르쳐준 동호회에 빚진 게 무척 많다고도 적었다. 진심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나만의 진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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