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이 예정된 존재가 일시적으로 현현하는 순간들을 작가는 집요하게 포착한다. 청계천 공사 현장, 아파트 건설 현장, 곧 헐리게 될 판자촌에 소복하게 새벽눈이 내려앉은 모습, 네온사인이 하나 둘 점등되기 시작할 무렵의 어스름한 도시 풍경 등을 장대한 파노라마 사진으로 최대한 정밀하게 펼쳐보이는 것이 그의 주요 작업이다. 그것은 일종의, 엄숙한 기록이었다.  

형태가 왜곡될 것을 염려해 일부러 망원렌즈를 사용하지 않고 부분 사진을 일일이 이어 붙였는데, 한 작품 당 실사 작업만 보름 정도가 소요되었다고 한다. 삽입한 작품의 색채 일부가 인쇄 과정에서 약간 변형되었다는 이유로 팜플렛 이천 몇 부를 전량 폐기했다는 말도 들었다. 소멸하기 직전의 풍경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온전하게 붙들기 위한 작가적 결벽이 느껴졌다. 잠시 드러났다 일순간 사라지고 말 유한적 존재들을, 작가는 그야말로 장인정신을 발휘하여 집요하게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깃털처럼 사뿐히 날아왔다 바람 한 줌에 아스라이 날아가버릴 그 여리디 여린 찰나의 순간들이라니. 그의 작품들은 모두가 한 마리 나비였다. 비록 필름으로 박제된 나비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격스러울 만치 아름다웠다. 아무도 기거하지 않는 텅 빈 폐가와, 일그러진 철근 자재들이 흉측하게 솟아있는 청계천 공사 현장과, 참혹하게 속내를 드러낸 건설 현장의 흙밭 까지도ㅡ 소멸이 예정된 것들은 어쩌면 하나같이 그토록 애달플까. 애달퍼서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털썩 주저앉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박제라도 해두고 싶었으리라. 바람에 뒤척이는 흙먼지까지도 낱낱이 존재의 이름을 붙러주고 싶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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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6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있네요..

수양 2009-07-07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제로 보면 거의 벽면 전부를 꽉 채울 정도로 스케일이 굉장한데 이렇게 이미지파일로 구겨넣어 올릴 수밖에 없는 게 안타깝습니다. 야생동물을 동물원에 가둬넣은 기분이랄까요.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
존 버거 지음, 박홍규 옮김 / 아트북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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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에 따르면, 피카소가 평생에 걸쳐 보여준 다양한 화풍은 순차적인 단계를 밟은 진화의 과정이라기보다 전후관계를 설명할 수 없는 급작스런 변모에 가깝다. 그는 애초에 지적인 탐구 활동을 통해 작업을 진척시키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작업을 이론적으로 일관되게 정립하려는 의지도 없었다. 그는 그야말로 천재였고, '즉각적이고 반지성적'으로 '영매'처럼 작품들을 쏟아내었다. 저자는 피카소가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을 정확히 의식하고 있었고 그 결과, 설명-제안-논의-배움 따위의 상호적 덕목에 대해 회의적이었다고 말한다. 때문에 피카소는 입체주의 시기를 제외하고는 (변모는 했으되) 거의 발전하지 않았으며 점점 더 자신의 천부적 창조성이라고 하는 신비에만 배타적으로 의존해야 했다고.(p.71) 

위에서 예외로 언급한 입체주의 시기는 피카소의 전 생애에 걸쳐 유일하게 대외적 교류가 활발했던 시절이다. 입체주의 시기에서 보여지는 자기발전적 면모는 바로 그런 활발한 교류 덕분이었다. (저자는 이 무렵을 피카소 미술의 정점으로 봄) "1907년까지 피카소는 분명 그림에서 고독한 길을 걸었다. 그는 파리에 있는 동년배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그 역시 그들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아비뇽의 처녀들> 이후 그는 한 집단에 속하게 되었다."(p.122) 그래서 피카소의 입체주의 시기는 동시대의 다른 화가들과 어느 정도 작품 성향이 유사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후에 피카소는 다시 내성적이고 고독한 혼자만의 세계 속으로 되돌아간다.     

입체주의 시기를 제외하고 피카소가 보여주는 작품 세계의 이상향은 언제나 단순하고 원시적인 요소들로 가득하다. 원시적인 요소에는 어김없이 고향 스페인의 향취가 짙게 베어 있는데, 바로 이점은 스페인을 떠나서 침입자이자 이방인의 처지로 유럽에 정착해야 했던 피카소가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해 나간 하나의 전략이었다. 저자는 피카소가 스스로를 (스페인이라는 이국에서 온) '고상한 야만인'으로 이상화함으로써, 루소처럼 자신을 둘러싼 유럽 사회를 비난한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의 눈에 비친 피카소는 "자신이 사는 부패한 사회를 비난하기 위해 그 자신의 천재성이 지닌 원시적 성격을 이상화하는, 그래서 자기만족에 빠진,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고상한 야만인'이라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끝없이 작품을 생산해야 했던 미술가"(p.199)였다.        

이 책에서 말하는 피카소의 실패란, 1945년 이후 작품에서 보여지는 매너리즘적 경향을 말한다. 입체주의와 고전주의, 초현실주의를 섭렵하고 이후에는 독자적 양식을 창안하는 등 끊임없이 양식 실험에 도전하던 피카소였으나, 어느덧 '자신의 연기 모습에 매료되는 배우'와 같이 스스로 구축한 양식에 자아도취 되기 시작한다. '양식에의 자아도취'는 '주제의 결핍'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주제의 결핍'이야말로 매너리즘의 근본 원인이 된다. 즉, 작품에서 양식 실험 외에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부재하다는 것. 스타일은 있는데 내용은 없는, 내용이란 그저 '피카소가 그린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이 상태야말로 매너리즘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피카소가 그린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써는 이미 굉장한 '내용'이었고, 이러한 역설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매너리즘은 쉽게 극복되기 어려웠다. 그래서 말년의 피카소 작품들은, 성숙한 자기완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여느 거장들의 말년 작품과는 달리, 지극히 자조적이고 자기체념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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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9-09-18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읽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전 이 책 보고 피카소에 대해 급관심이 생겨 한동안 열심히 챙겨 봤었답니다.

수양 2010-10-26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에휴 저는 오랜만에 이 리뷰를 다시 읽어보니 책 내용이 기억이... 새록새록이 아니라 가물가물이네요-_-;;; 정녕 내가 읽었던 책이란 말인지ㅜ_ㅜ
 
강변부인 김승옥 소설전집 4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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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소설전집 1권 <무진기행>편 서문에서 작가는 <강변부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소설가로서 항상 머리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소설이란 재미있는 이야기이다'라는 공식을 편하게 즐겨보려는 태도로 써내려갔던 것이 <강변부인>이다. 1978년, 일요신문에서 연재가 끝나자 당시 한진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는데 만여 부가 판매되었을 때 나는 출판사측에 절판을 요구하며 출판을 중단시켜버렸다. 안이한 태도로 써낸 이 소설 한 편이 그동안 다작을 스스로 경계하면서까지 소설이 천박한 한 토막 이야기여서는 안 된다고 고집하던 나의 신념을 송두리째 훼손시켜버리는 듯하여 그 역겨움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악취미라면 할 말 없지만, 이 책을 읽은 것은 순전히 '작가 스스로 출판을 중단시켜버릴 정도의 퀄리티'라는 건 대체 얼만큼의 수준일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비록 도중에 출판을 중단시켜버렸을망정 <강변부인>과 같은 전형적인 통속소설을 별 거리낌 없이 세상에 내놓았던 작가를 보면, 그 비상한 문학적 재능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학에 대한 결벽이나 순정 혹은 어떤 완고한 장인정신 같은 것은 그다지 강하게 지니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토록 미련없이 문학계를 떠나버린 걸까마는.

재능은 빈한한데 자의식만 투철한 대부분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역시 천재는 마인드부터 쿨하구나 감탄하게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문학에 대해 좀 더 우직한 순정과 진지한 장인정신까지 갖추었더라면 그 빛나는 재능과 어우러져 한층 치열하고 중후한 작품을 남기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가진 재주가 많아 문단에 오래 눌러앉아 계시지도 않았던 분이 그 얼마 되지도 않은 짧은 기간 일부를 <강변부인>같은 걸 쓰면서 소진해 버렸다는 사실이 새삼 안타깝다. 내내 입가의 미소를 거두질 못하고 재미나게 읽어놓고도 안타깝다고 말할 수 밖에 없으니 그게 또 한번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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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거장에서의 충고 - 기형도의 삶과 문학
박해현.성석제.이광호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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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기형도를 앓았었다. 한자로 된 시어를 읽기 위해 옥편을 구입했었고, 시어의 뜻을 국어사전에서 물어다 여백에 주석처럼 달아놓기도 했었다. 밤늦게 엎드려 누워 <기형도 전집>을 펼쳐놓고 몇 가지 시와 산문들을 베꼈다. 장 그르니에의 산문집 <카뮈를 추억함>과 <일상적 삶>은, 그가 대구로 가는 여행길에 챙겨든 책이 아니었더라면 구태여 찾아 읽지 않았을 책들이다. 시인의 20주기 기념 문집인 이 책을 읽으면서 오랜만에 <기형도 전집>을 다시 꺼내 펼쳐본다. 밑줄과 메모와 무수히 접힌 페이지 따위로 나의 <기형도 전집>은 꽤나 요란한 편이고, 흑백사진으로 남아있는 시인은 여전히 스물 아홉이다. 내후년이면 이제 우리는 동갑이다.

'그가 요절하지 않았더라도 내가 그를 그토록 열렬히 앓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은, '내가 좀 더 나이 들어 그를 만났더라도'라는 가정으로 시작되는 마찬가지의 질문처럼 우문이겠으나, 그럼에도 그의 범상치 않은 죽음의 정황은 어쩔 수 없이 시의 연장으로, 연장된 텍스트로 읽히는 점이 있다. "그로 인해 그의 시는 일정한 부가가치를 얻은 대신 문학으로서는 갇힌 부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나희덕) 이 점과 관련하여 책 앞부분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이 읽은 기형도>라는 꼭지의 대담에서는, "기형도 시 작품에 나타난 죽음의 이미지를 자기실현적 예언이나 예감처럼 읽는 독해 방식이야말로 기형도의 삶과 관련된 이런저런 정황에 지나치게 경도된, 그로 인해 시 텍스트 자체를 읽는 데 소홀한 독해일 수 있으며"(조강석), 사실상 "그가 죽었기 때문에 '죽음'이 시적 사건이 된 것이 아니라, 이미 그의 시 세계 내부에서 '죽음'이 (객관적인) 시적 사건으로 추구되었다고 봐야 하고"(하재연),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죽음을 실존으로 보는 게 아니라 하나의 알레고리로 대하는(알레고리적인 장치로 사용하는) 태도가 기형도 시의 핵심인 것 같다(심보선)"는 이야기가 오가기도 한다.

이 책 2부에 수록된 지인들의 회고담에 따르면, 시인은 그가 남긴 시와는 다르게 한없이 밝고 유쾌한 사람이었던가 보다. 심지어 어떤 이는 "나를 포함한 주위의 친구들에게 그의 시는 과장이거나 상상적 허구였고 현실에서 우리에게 보여준 자신의 모습을 배반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검은 활자를 먹어치우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란색 연필로만 밑줄을 그었다던 사람, 자신이 썼던 모든 시를 줄줄이 기억했다던 사람, 좋은 시를 읽을 때나 기막힌 미인을 거리에서 발견하면 "죽여준다. 죽여줘."라고 했다던 사람. 지인들이 들려주는 생활인으로서의 시인은 시적 화자로서의 시인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그런 생경한 모습조차도 나에게는 여전히 '기형도'라는 텍스트를 감싸는 또 한 겹의 아우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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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典 모시고 스승님과 공부하는 재미
김일덕 지음 / 원불교출판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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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입교 선물로 받은 책. 김일덕이라는 예비교무가 스승인 장산 종사와 나눈 대화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아래는 아상(我像)에 관한 한 구절.  

   
  "장산님 요즘 고민이 있습니다. 전 참 아상이 많습니다. 경계마다 아상이 자꾸 나오니 괴롭습니다." / "아상 없으면 너 죽어버린 것이다. (...) 아상 자체는 네가 살아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러나 아상에 잡혀 있으면 안된다. 부처님의 천상천하 유아독존, 만세멸도상독로 다 아상 아니냐? 아상이 나쁜 것이 아니다. 아상은 아상일 뿐이다. 다만 최고의 아상을 가져야 한다. 그러려면 진리의 나를 알아야 한다. 이름의 나를 아는 것은 아상에 잡힌 것이다.(...)"    
   

선물만 넙죽 받아챙기고 요즘은 교당에 잘 나가지도 않는다. 정신적으로 한참 힘들었던 시기에는 간도 쓸개도 모조리 빼다 바칠 것처럼 매달렸는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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率路 2009-06-29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한부(?)기간 동안엔 아무래도..^^;;;;;

수양 2009-06-29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그렇겠죠 조만간 이 블로그도 죽을 날이 머지 않은 듯-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