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 - 철학 수고
칼 마르크스 지음, 강유원 옮김 / 이론과실천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서문과 세 개의 초고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는 첫 번째 초고 <소외된 노동>부터 세 번째 초고 <화폐>까지 요약한 것.  

소외된 노동 

국민경제학(당시의 경제학을 지칭)은 토지, 노동, 자본을 경제학의 전제가 되는 기본 요소로 다루지만 정작 요소들이 각각 그렇게 분리되기까지의 유래와 근거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각각의 추상적 요소가 탄생한 배면의 메커니즘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노동에 관해 살펴보자. 현 사회에서 노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①자기소외 행위다. 자기소외란, 노동자가 자신의 생산물로부터도 소외되고 생산 행위로부터도 소외되는 것을 말한다. 소외된 노동은 나아가 ②인간을 자연으로부터도 소외시키고, ③유적 존재로부터도 소외시킨다. 

   
 

유적 존재로부터의 소외: 인간은 자신의 유를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자기 자신을 보편적인 존재로서 관계한다는 점에서 유적 존재이다. 오로지 직접적 욕구의 지배 아래서 자연과 일면적으로만 대면하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자유롭게 지적으로든 활동적으로든 자신을 이중화하고 자신에 의해 창조된 세계 속에서 자신을 바라본다.  

인간은 자신의 활동을 대상화하고 자신의 삶을 의식할 수 있다. 자신의 의지를 삶에 관철시킬 수 있다. 이러한 의식적인 생명 활동이야말로 인간을 동물적인 생명활동으로부터 구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식적 생명활동에 의해서만이 인간은 유적으로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유적 존재다. 

그러나 소외된 노동은 이러한 관계를 역전시킨다. 인간은 소외된 노동 속에서 자신의 본질인 유적 존재로서의 의식적 생명활동을 단순히 자신의 생존수단인 것처럼 만들고 만다. 또한 소외된 노동은 인간으로부터 그의 생산 활동의 대상을 박탈한다. 생산 활동의 대상을 박탈하는 것- 이것은 인간의 비유기적 신체인 자연이 인간으로부터 제거됨을 의미한다.  

소외된 노동은 인간의 활동을 수단으로 저하시킴으로써 인간의 유적인 생활을 그의 육체적 생존수단으로 바꾸고 만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유에 대해서 갖는 의식은 소외에 의해 변질되고 그런 변질된 의식은 유적 생활이 인간에게 있어서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상 고병권 선생님 강의록과 연초록 선생님 발제문 일부 도용하여 짜깁기함)

 
   

의식적 생명활동으로서 의미를 가졌던 인간의 노동은 자기로부터, 자연으로부터 유적 존재 모두로부터 유리되어 오로지 개인의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인간이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 자신의 생명활동, 자연, 자신의 유적 존재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것에서 생겨나는 직접적인 귀결의 하나는 ④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이다. 소외된 노동의 관계 속에서 각각의 인간은 자기 자신이 노동자로서 존재하는 척도와 관계에 따라 다른 사람을 본다. 즉 인간을 유적 존재의 구성원으로서 보는 게 아니라 단지 하나의 노동 상품으로서 대하게 되는 것.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될 뿐만 아니라 그의 생산물이 노동자 자신에게도 속하지 않는다면 대체 노동자를 소외시켜가며 생산된 그 생산물은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노동자를 등쳐먹는 ‘다른 인간’이 있다고 추정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가 고통을 치러가며 수행하는 생산 활동을 이 ‘다른 인간’은 마음껏 향유한다. 노동이란 노동자가 이 ‘다른 인간’의 지배, 강제, 질곡 아래서 그 인간에게 봉사하는 활동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노동자의 소외가 일어나는 배면에서 이 소외로 인해 그 만큼의 향유를 누리고 있는 이 ‘다른 인간’을 주목해야 할 것이며, 이 ‘다른 인간’과 노동자가 맺고 있는 관계를 고찰해야 할 것이다.
             
사유재산의 관계 

자본사회에서 노동자가 노동자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가 본질적으로 ‘궁핍한 자본’이어야 한다. 궁핍한 자본으로서의 노동자는 노동하지 않으면 언제나 그 이자를 상실하여 생존을 보장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결코 일을 쉬면 안 된다. 언제나 일을 함으로써 그는 자본을 생산하고 자본은 다시 노동자를 생산한다. 노동자로서 인간, 상품으로서 인간은 이러한 전체 운동의 산물이다. 한편, 노동하지 않음으로써 이러한 자본의 구조에 동참하지 않는 인간- 예를 들어 사기꾼, 거지, 소매치기, 백수 같은 사람들은 국민경제학 영역 바깥의 유령들로서만 존재한다. 그들은 철저히 배제된다. 

노동자의 욕구란 노동자가 노동하는 기간 중에 자신을 유지하는 욕구이다. 노동임금은 노동자가 노동하는 자로서 유지되기 위해 자본이 치러야 할 소비다. 노동자들이 다음 날 쓰일 노동력을 재생산하고 비축하도록, 그래서 더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자본가는 일정액을 투자해야 한다. 임금이란 말하자면 기계에 칠할 윤활유를 구입하듯이 자본가가 지출하는 경비이다. 더 큰 것을 얻기 위한 자본의 희생인 것이다. 자본가는 최소한의 기름으로 최대한 기계를 잘 돌려야 한다. 그는 자본이 얼마만큼의 노동자들을 ‘부양’할 수 있는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것이 얼마만큼의 ‘이자’를 가져오는지가 문제일 뿐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인간은 상품으로 전락한다. 인간은 단순한 노동인간일 뿐이며 추상적으로 실존한다. 그는 비인간이다. 실체가 없다. 

실체 없는 비인간, 노동인간이 생산해낸 산물은 더 이상 사회적이고 자연적이고 개별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는 그저 돈을 받고, 받은 만큼 생산할 뿐이다. 자본사회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이 노동을 통해 생산한 것에 대하여 임금의 대가 이상의 의미 내지는 사연을 부여할 수 없다. 이렇게 자본사회에서 생산된 모든 생산물(사유재산)은 그 자연적, 사회적 질(質, 고유한 의미)을 잃어버린다. 극히 다양한 종류의 자연적, 사회적 현존 속에서 그것의 현실적 내용에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본이 생산된다는 것, 이러한 대립이 극단으로 추동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이 관계 전체의 극단, 정점, 몰락이다. 

한편, 봉건 사회 질서에 익숙한 토지 소유자는 자신의 사유재산인 토지에 봉토라느니 세습 영토라느니 하여 각별한 사연을 부여하고 그것을 중시 여긴다. 그러나 자본가에게는 오로지 경작만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그들의 태도가 전근대적 취향으로 비추어질 뿐이다. 이렇게 토지는 자본에 비해 아직 정치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사유재산이다. 토지는 궁극적으로는 자본이지만 현재로서는 세계에 연루된 상태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여 자기 자신에 이르지 못한 자본이다. 그것은 아직 완성되지 못한 자본이다. 하나 이것은 세계적 형성의 과정에서 추상적인, 다시 말해서 순수한 표현에 이르러야 하고, 사실상 발전의 현실적 진행에서 실제로 그리 될 것이다. 토지 소유자에 대한 자본가의 승리는 필연적이다. 토지소유의 자본화를 억제하려는 일부 국가들의 시도는 헛된 노력일 뿐이다.

사유재산과 노동 

부의 주체적 본질은 무엇인가. 최초의 논의자인 중상주의자(≒중금주의자)들은 유통의 과정에서 부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그들에게는 유통의 과정에서 화폐 혹은 화폐로 쓰이는 물질인 귀금속만을 부의 현존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이후 출현한 중농주의자들은 부의 원천이 화폐나 귀금속이 아니라 토지(자연)에 있다고 말한다. ‘토지’라고 하는 천연의 재료는, 농업이라고 하는 인간의 노동을 거쳐 비로소 ‘부’가 된다. 다시 말해 잉여가치의 원천은 유통이 아니라 생산으로부터 나온다. 인간이 노동을 통해 풍요로운 자연에서 최초의 잉여를 발굴해 낸다는 사실, 이것은 곧 부의 주체적 본질이 인간의 ‘노동’에 있다는 얘기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때의 노동은 아직 그 보편성과 추상성 속에서 파악되고 있지 않으며(‘노동력’으로 파악되고 있지 않으며), 여전히 특수한 자연 규정적 존재 방식에서만 인식될 뿐이다. 즉 이 당시 중농주의자들에게 노동은 추상적 노동이 아니라 자연에 귀속되어 있는 구체적 형태로서의 농경 노동이었으며, 토지 역시 아직은 인간에게 독립적인 자연적 현존으로만 인정되었다. 다시 말해 토지 역시 노동 자체의 한 계기로서, 즉 ‘토지 자본’으로서 토지는 아직 인정되지 않고 있었다. 

이후 등장하는 경제학자들은 중농주의자들의 사고의 한계를 뚫고 나아간다. 사실상 경제적 관점에서는 농업이 다른 어떠한 산업과도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농경 노동이라고 하는, 어떤 특수한 요소에 구속된 특수한 노동으로서의 노동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노동 일반이 부의 본질인 것이다. 이들은 이제 (농경 노동이 아니라 보편적 의미의) 노동이 부의 본질이라고 언명함으로써 특수한, 외적인, 대상적일 뿐인 부를 부인한다. 이로 인해 부는 비로소 그 보편적 본질이 인식되었다. 부의 본질은 추상화된 인간의 노동이다! 

인간의 노동이 부의 본질로서 추상화되자, 아담 스미스는 인간의 추상화된 노동을 하나의 ‘사유재산’으로 간주한다. 그에게 있어 사유재산은 인간 바깥의 어떤 상태로서 있는 게 아니라, 사유재산 자체가 곧 인간의 노동 즉 인간 자신이었다. 노동력이라는 사유재산을 가진 인간이 그것을 자본가에게 팔아서 거기서 생긴 돈으로 먹고 사는 거다. (제 기운을 남한테 팔아서 먹고 사는 노동자!) 사유재산이 인간 자신과 합체되고 인간 자신이 사유재산의 본질로 인식됨으로써 이제 인간은 하나의 물적인 재산으로, 지극히 비인간적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부르면 꽃으로 다가오는 인간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노동력, 노동력이라는 상품인 거다. 

모든 가치의 근원을 노동으로 파악하는 국민경제학은 일견 노동하는 인간을 최대의 가치로서, 본질로서 존중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 배면에서는 이렇게 인간에 대한 부인을 철저히 수행하고 있었다. 모든 가치의 근원은 노동이라고? 따라서 노동하는 인간은 가치 있다고? 아니다, 어디까지나 ‘노동’하는 인간이 가치 있을 뿐이다. 노동하지 않는 인간은 무가치하다. 노동이 최고의 가치를 얻는 사회에서 인간은 철저히 소외된다.     

사유재산과 공산주의 

노동이 부의 본질인 사회, 노동이 사유재산인 사회, 오로지 노동만이 있고 본연의 자기는 소외되는 사회 속에서 진정한 공산주의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진정한 공산주의는 (인간의 자기 소외를 낳는) 사유재산을 적극적으로 지양함으로써 존재한다. 사유재산의 적극적 지양은 곧 인간적 생활의 회복이다. 그것은 모든 소외의 적극적 지양이다. 이를 통해 종교, 가족, 국가 등에서 자신의 인간적인, 다시 말해서 사회적인 현존으로 인간이 귀환할 수 있다. 그것은 최종적으로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적 본질의 현실적 획득이다. 

이러한 공산주의는 완성된 자연주의=인간주의로서, 완성된 인간주의=자연주의로서 존재하며,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충돌의 참된 해결이며, 실존과 본질, 대상화와 자기 확인, 자유와 필연성, 개체와 무리 사이의 싸움의 진정한 해결이다. (중략)  

욕구, 생산과 분업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인간은 다른 인간으로 하여금 자꾸만 새로운 욕구를 창출하게 한다. 이는 타인에게 새로운 희생을 강제하기 위해서이고, 새로운 의존 속으로 옮겨 놓기 위해서이며, 새로운 향유 방식으로, 따라서 새로운 경제적 파멸의 방식으로 유혹하기 위해서이다. (신발이 필요 없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자본주의사회에 포섭되면서 모조리 신발을 사 신게 된 경우가 이런 것 아닐까?) 각각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힘을 창출하려 하는데, 이는 그 안에서 자신의 이기적 욕구의 충족을 발견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모든 새로운 생산물들이 서로를 기만하고 약탈하는 새로운 잠재력으로 존재하게 된다. (경쟁의 심화를 얘기하는 건가?) 하나의 막강한 잠재력으로서 생산물은 점점 사회에 많아지지만 동시에 인간은 빈곤해지고 더욱 더 많은 화폐가 필요하게 된다. 화폐가 많아질수록 인간은 더 빈곤해진다. 자본사회는 물신숭배사회, 금권사회이다. 화폐의 양은 점점 더 인간의 유일한 힘 있는 속성이 되고, 화폐는 모든 존재를 그 추상으로 환원한다. 

자본사회에서 인간 소외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일어난다. 한 측면에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더 많은 것을 욕망하게 하고(지름신이 강림한 노동자), 다른 한 측면에서는 욕구가 한없이 상실되고 단순화되는 것이다. (퇴근하면 티비 보다 잠만 자는 노동자) 자본사회에서는 욕구의 증대와 욕구 수단의 증대가 어떻게 욕구의 상실과 수단의 상실을 만들어내는가. 자본가는 노동자의 욕구를 가장 필요하고도 가장 참담한 육체적 생존 유지로 환원시키고, 노동자의 활동을 가장 추상적인 기계적 운동으로 환원시킨다. 그에게 인간은 활동의 욕구와 향유의 욕구 이외에 다른 어떤 욕구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가능한 한 가장 궁핍한 생활을 보편적 척도로 산출한다. 그는 노동자의 활동을 모든 활동의 순수 추상으로 만들듯이, 노동자를 무감각하고 욕구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자본사회를 분석하는 국민경제학은 이런 점에서 체념, 궁핍, 절약, 금욕의 학문이다. 이 학문의 진정한 이상은 폭리를 취하는 금욕적 구두쇠와 생산하는 금욕적 노예를 만들어 내는 데 다름 아니다. 폭리와 금욕, 그리고 생산과 금욕! 두 대립항의 절묘한 결합이 참으로 기이하지 않은가. 다시 말해 낭비와 절약, 사치와 궁핍, 부와 빈곤이라는 대립 항이 이 학문에서는 하나의 매커니즘에서 발생하는 동시적 효과인 것이다.  

이제 분업을 고찰해보자. 분업은 자본사회의 필수요소다. 근대 국민경제학의 다양한 논의들은 분업의 문제에 있어서는 한 가지 입장으로 통일된다. 분업과 생산의 부, 분업과 자본 축적이 서로를 조건 짓고 있다는 것, 자기 방임된 사유재산만이 가장 유용하고 포괄적인 분업을 낳아 놓을 수 있다는 것. 분업에 관한 국민경제학자들의 입장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아담 스미스에 따르면, 인간의 이기심이 교환하려는 경향을 낳았고, 교환(거래)은 분업을 낳았다. 분업으로 인해 인간의 재능은 다양해졌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재능의 다양성이 분업을 낳은 게 아니라, 분업이 일어나다 보니 인간 재능이 다양하게 분화되었다는, 혹은 그런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분업은 노동에 무한한 생산능력을 부여한다. 분업은 교환과 시장의 확대에 의하여 증대되고 또 그것에 의하여 제한된다. 진보한 사회에서는 모든 인간이 상인이고(분업에 의해 생산한 걸 서로 교환 판매해야 하니까) 사회는 상업 사회가 된다. 

세이는 교환이 사회의 본질에서 근본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물론 교환이(그리고 교환에서 비롯한 분업이) 한 사회가 지속되는 데 어느 정도 유용한 수단인 것은 사실이다. 또한 교환은 사회의 부를 위한 인간 능력의 적절한 사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교환과 분업은 개인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능력을 저하시킬 수 있다. 

스카르벡은 인간에 내재하는 개인적 힘들, 지능과 노동을 위한 육체적 소질을 사회에서 유래하는 힘들, 서로를 조건지우는 교환이나 분업과 구별한다. (원래 내가 지닌 힘, 자본의 논리로 산출될 수 없는 힘, 고유하고 특수한 전인적 능력 vs 사회에 복무할 수 있는 능력, 사유재산으로 변환될 수 있는 사회적 능력, 이 능력은 현실적 개인으로부터 나온 능력이 아니라 분업과 교환과 관련된 사회에서 유래하는 힘, 사회가 나에게 길들인 힘, 사회가 나에게 할당한 힘) 그러나 어쨌든, 교환의 필수 전제는 사유재산이다. 

밀은 상업을 분업의 결과로 서술한다. 인간의 활동은 기계적 운동으로 환원된다. 부의 대량생산, 생산의 집중화를 위해 각각의 사람들에게는 가능한 한 작은 범위의 작업들이 맡겨져야 한다.  

인간의 이기심에서 비롯한 교환 경향과 교환이 낳은 분업. 분업은 대량생산을 통해 부를 효과적으로 창출하지만, 동시에 개인적 활동의 빈약화와 탈본질화를 낳는다. 이러한 분업과 교환의 근거는 사유재산이며, 따라서 인간적 삶을 위해 사유재산의 지양이 필요하다.

화폐 

화폐란 무엇인가. 화폐는 모든 것을 구매하는 속성을 가짐으로써, 다른 말로 모든 대상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속성을 가짐으로써 우월한 의미를 갖는 대상이다. 화폐가 전능한 존재로 간주되는 것은 화폐 자신이 (구매를 통해) 모든 것으로 변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화폐가 모든 것을 매개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것, 나의 모든 개인적 본질에 비추어 불가능한 것을 화폐를 통해서 할 수 있다. 고로 자본사회에서 화폐의 속성들은 곧 화폐 소유자의 속성과도 같아진다. 화폐의 존재와 능력이 곧 화폐를 가진 자의 존재와 능력이다. 

화폐가 없는 자의 수요는 한갓 비현실적 표상(공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화폐가 있는 자의 수요는 현실적으로 유효한 표상이다. 화폐는 표상을 현실로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실을 (고유한 의미나 본질이 표백되어버린) 단순 표상으로 만들어버린다. 화폐의 논리로 점령된 현실은 돈을 초월한 고유의 의미 같은 것은 모조리 말살되고 오로지 얼마짜리 값어치만을 갖는 한없이 추상적이고 몰개성한 표상으로 변질되어버리는 것이다. 

화폐는 만물을 혼란케 하고 전도시킨다. 그것은 모든 인간적, 자연적 성질을 혼용시킨다. 비겁한 사람도 용감함을 구매할 수 있게 되는 식이다. 이것은 결코 인간적 관계가 아니다. 인간적인 관계라는 것은, 인간이 의지하는 대상에 대하여 자신의 현실적이고도 개인적인 삶을 특정하게 표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화폐만능사회에서는 이 모든 게 불가능하고 또한 무의미해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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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2010-04-22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무 잘해서 내가 추천 준다
 

보험회사에 갓 입사한 친구에게 재무 설계 상담 같은 걸 받았다. 서류를 작성하면서 수다를 좀 떨었다. 우리는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 새로운 종류의 슬픔에 대해 얘기했다. 터져 나오거나 줄줄 흘러내리는 슬픔이 아닌, 우물 속에 두꺼비처럼 앉은 슬픔에 대해. 딱지처럼 굳은 슬픔에 대해. 바닥에 엎드려 가만히 뺨을 대었을 때에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슬픔에 대해.

 

그리고 말했다. 어쩌면 우리는 건포도가 된 게 아닐까. 우린 예전보다 작고 조글조글해졌지만 그만큼 달고 진해진 게 틀림없어. 그런데 건포도는 그 옛날 캘리포니아 뙤약볕 아래서 무슨 결심을 품었길래 그렇게 새까매졌을까. 막 공상에 잠기려는데 그녀가 내게 노후에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나는 한쪽 벽을 책장으로 짠 살롱을 차리고 싶다고 했다. 책도 읽을 수 있고 사람들이랑 대화도 나눌 수 있는 그런 공간에서 오랜 시간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적어도 이제까지 내 경우에 삶의 방향을 좌우한 것은 책보다는 인물, 인물보다는 사건의 체험이었던 것 같단 얘기도 덧붙였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결정적인 책, 인물, 사건을 만나기 위해 앞으로도 많은 책을 읽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일을 겪어야 하리라는 얘기도. 살롱을 꾸미고픈 까닭 역시 살롱이 다양한 사건의 현장이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독서와 대화가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는 밀도 높은 공간이 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살롱을 차리려면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목돈을 마련하려면 지금부터 다달이 체계적으로 돈을 모아야 한다고 했다. 당연한 얘기였는데 갑자기 불상사가 생겼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반쯤 시공을 마친 살롱에 불이 붙기 시작한 것이다. 살롱은 3분 정도 지나 깨끗하게 전소했다. 요즘 들어 '돈'이라는 외마디 소리가 자꾸만 머릿속으로 습격해들어와 온갖 낭만적 상상에 죄다 불을 싸지르고 있다. 슬프다. 이 또한 새로운 종류의 슬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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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강의 듣고 나서 제 발제가 놓쳤던 부분이 무엇이었는지 좀 이해가 되었는데요, 대략 정리를 해보면: 니체는 진리나 신과 같은 금욕주의적 이상의 무가치함을 이야기한 게 아니다. 니체는 가치를 묻는 게 아니라 가치의 가치를 묻는다. 가치의 기저에서 그러한 가치에 다가가고자 하는 앎에의 의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은 것. 그리고 이때 니체는 앎에의 의지가 '허무를 향한 의지'라고 했지만, 이는 단순히 '허무에의 의지'가 아니라, '허무라도 향하는 의지', '허무조차도 욕망하는 의지'이다. 즉, 포커스를 두어야 할 지점은 허무주의조차 하나의 '의지'라는 것. 허무라도 의지함으로써 의지 자체가 구출되었다는 것.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니체가 끝나버린 것 같습니다. 사실 좀 얼떨떨하기도 하구요. 앞으로 니체를 좀 더 깊이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듭니다. 저의 노예적 삶에 대한 '위생학'으로서, 하나의 행동 강령으로서 니체를 읽어볼까 합니다.  

아무개님: 매우 대단한 니체선생에 대한 의지담론에 관한 서술이군요. 역시 큰 대인-선생아래 큰 이익(대리)-배움이가 있다는 공자의 사제도에 관한 말씀이 생각나는군요. 니체의 강자-귀족개념(권력의지, 초인, 영겁회귀)을 이해한다는 것, 또 그것을 오늘날 우리의 사정에 맞게 써먹는다는 것은 그리 심플한 문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또 더욱이 니체를 따라잡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포스트모던적 사유를 한다는 것 등등, 이러한 모든 것은 모든 위대한 독일 블란서 영미의 현대 철학자들의 고민이기도 했었구요. 특별히 수양님의 본 니체 세미나의 최종점 서술은 님의 고스승(주- 고병권 선생님을 말함)의 독특한 스칼라싶을 물씬 풍기게 하는 대목이기도 한 것 같군요. 원래 고스승의 니체 연구는 그의 학적인 이력을 따라가 볼 때에 매우 특이한 형태인 자연과학의 매개학문인(물리-화학-생물학)화학 학문을 거쳐서 독일의 관념론과 실재론자를 대표하는 칸트와 헤겔을 매개하는(?) 맑스의 사회학을 거쳐서 2000년 된 서구사상의 학문자체를 재배치하려는 니체의 망치를 든 철학에 도달하려는 모양을 자아내는 듯 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그래도 타국의 현대 니체해석자인 들뢰즈를 우리가 훌륭한 해석자다 라고 치고서도 그와는 전혀 색다른 아주 섬세한 니체 해석의 또 다른 해석 단면을 늘 깔끔하고 깔쌈하게 제시하고 있는 고스승의 매력적 니체읽기가 되기도 하는 셈이지요. 그의 니체에 관한 저서들을 한번 읽어 봐보세요. 마치 어린아이가 동시를 쓰듯이 그렇게 담백하게 니체의 뜨거운 사상 문체들을 맑은 시냇물로 그렇게 해석하고 있는 듯합니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이 안 그랬던가요? 참으로 위대한 위인은 하루에 한번씩 또 그 이상을 꼭 어린 아이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니체의 의지사상 역시 독일사상의 아니, 현대의 모든 서구사상의 원류인 칸트의 물자체 사상에 그 근간을 아낌없이 거기 두고 있지요. 아시다시피 니체의 사상적 아비인 쇼펜하우어의 스승은 칸트입니다. 칸트의 미학적 의지이론을 니체의 직계 스승인 쇼폔 선생께서 재해석에 성공했다는 말이죠. 니체의 사상적 전 학적 전술은 다음처럼 간단합니다. "무한하게 약자의 노예도덕에 대립되는 강한 자라는 귀족도덕의 비고정적 주체의지의 그 대립의 지평을 선-악과 진-위와 미-추의 대립지평마저 끝내는, 그리하여 자유로이 그 지평을 왕래할 수도 있게 되는, 그 영원한 모순적 부-드-러-운 생명의 의지력을 소유한 자기실현의 자유의지에 있다." 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약한 의지와 무한히 대립되는 강한의지 조차도 그 대립의 지배-실현 지평에 머물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서 무-대립의 지평인 부드러운 힘의 자기지평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강-약의 대립구도를 영원히 운명적 힘으로 안고서도 그래도 그것과 함께 부드러운 사랑의 숙명의 지평으로 다시 나아감으로서 니체의지미학의 진정한 방향타가 최종성립 도달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미 "미는 현실에서 자유다." 라는 칸트의 의지미학이 "니체의 조차와 마저 라는 그 역설적 미적인 생성해석학을 통한 심화의 과정의 다름이 아니다." 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가치의 가치추구에 대한 앎의 본질적 의미를 진솔히 형이상학적 자기반성에서 물어 들어가는 니체의 새로운 서구 형이상학에 대한 언어해석학은 하나의 통일을 거부하면서 생성하는 존재의 변증법적 형식을 띠고 있음에 분명해 보입니다. 우선 한국어(니체의 독일어 진술도 매우 유사합니다. 이거 연구해보세요. 큰 학문적 부가가치가 될 겁니다.)에 있어서 "조차"는 어미로서 또 "마저"는 조사로서 모든 자립 혹은 실질형태소에 붙어 살면서(기생하면서) 기능하고 있는 즉 단어와 단어들을 문법적으로 연결시키면서 그 의미들을 변형시키고 있는(가감하는) 형식 혹은 의존 형태소의 한글의 최소 단위의 언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수양님의 니체에 대한 위의 의지사상의 재진술은 니체의지의 변증법에 따른 순수한 자기 욕망의지의 방향으로의 그 정위의 지평으로 다가가는 데에 별 무리 없이 잘 진술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원래 그것은 이렇습니다. 우선 조차라는 어미는 그것의 사용에 있어서 이미 언급한 앞 한 단어의 사실에 대한 인정과 가정의 진술의 형태가 앞에서 언급한 말로부터의 뒷말에 대한 즉 뒤에 언급한 단어로 부터 자유로운 의지의 의미에 대한 뜻 강조의 축이 되는 주장 되고 있는 반면( 예: 낫 놓고 기억자조차 모른다), "마저"라는 조사의 사용방법에 있어서는 그 반대로 언급된 단어로서 즉 앞에 대한 뒷말로부터의 앞 단어의의지의 자유로운 의미에 대한 그 단어의 뜻의 강조점이 주장되는 형식형태소가 된다는 것이죠(예: 감기뿐만 아니라 배탈마저 났다). 

자, 그럼 위의 문장을 니체의 글쓰기 방식인 전술과 후술의 최종 글쓰기의 자유로 향하는 강-약의 대립을 넘어선 부드러운 선악의 피안 밖에 영원히 도달하려는(잠언적 글쓰기에 있어서 조차마저의 이 상호적인, 침투하는) 니체의 변증법적 텍스트로 다시 재구성해보면, "1)포커스화 된 형이상학적 가치- 2)가치의 가치전도화- 3)가치에 대한 앎에의 의지-4)앎에 대한 허무한 무지에의 의지-5)허무 자체를 의지하는 능동적인 허무의 의지, 즉 허무자체가 앎에 주체인 허무를 생성함 - 6)허무가 초점화 된 최초의 형이상학적 의지로부터 구원되는 영원한 부드러운 의지자체의 구출성" 이라는 이 도식과정에 '조차'와 '마저'라는 어미조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렇게 용체언에 붙어서 서술되면서 마치 유희하는 어린아이가 주사위를 땅에 던지고 놀며 유유자적 유희하는 주사위놀이와 같은 그런 형국을 이룬다는 것이됩니다. 물론 니체의 이러한 의지단계에 있어서 그 이전의 인간의지단계는 낙타와 호랑이로 상징 되는 그런 단계인 두 단계로서 강한 인내의 노략의지와 약한 단계의 그런 의지의 단계를 이루고 있고요. (최종도식화: 낙타-호랑이-어린아이-운명의 사랑의 의지단계) 

여하튼, 조차-마저! 이것은 멋있는 한글의 체언과 용언들의 주변언어들로써 기생하면서 붙어사는, 그러한 익명의 조사와 어미들 같습니다. 결국 니체의 모든 글쓰기가 이러한 마저-조차의 운동하는 잠언적 글쓰기의 방법형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한번 그의 모든 텍스트에서 확인해 보세요. 자 그럼 "입춘대길 화기만당!" 하세요.  

수양: 저도 이번 강의 들으면서 어미나 조사 때문에 해석이 굉장히 달라질 수도 있다는 걸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번역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고요. 무엇보다도 단지 의존형태소에 불과한 '조차'와 '마저'가 니체 사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 새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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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얼마나 예리한 침(針)인가. 그것은 세계를 요란하게 분해하지 않고도 그저 단 몇 마디의 소곤거림으로 본질에 도달해버리는 것이다. 시는 세계에 조응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한다. 아니, 차라리 시는 세계를 인식하기보다 세계에 조응한다고 하는 편이 온당할 것이다. 시는 얼마나 겸허한가. 그리고 또한 그것은 얼마나 보드랍게 세계를 만지는가. 시에 몹시 빠져들었던 무렵에는 시 아닌 모든 텍스트들이 심지어 더럽게마저 느껴졌다. 정말이지 더러워서, 시 아닌 모든 것들이 한동안 읽기 싫었던 날들이 있었다.

 

그러나 최승자 시인의 말처럼 “시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무슨 말도 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무슨 할 말도 없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무슨 말을 해도 시는 여하튼 존재한다는 배짱 혹은 체념 혹은 위안에서가 아니라, 그러나 시에 대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시는 매번 그 자신을 새롭게 '시'이도록 함으로써 시로서 존재할 뿐이다. 시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시 자신뿐이리라. 시에 대해 무어라 얘기하는 지금 이 글 역시 결국은 시에 대한 모독에 불과한 것이리라. 마음이 가난한 나는 단지 시라고 하는 성전과 그 성전을 짓는 사도들을 향해 한없이 달뜬 마음으로 경배드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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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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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는 자신의 불행이 강자의 무절제한 행동에 있다고 여겨 원한을 품는다. 그러나 외부를 향했던 이 폭력적 감정은 “돌발적 사태” 이후 철저히 내면화 된다. 모든 죄를 제 탓으로 돌려 양심의 가책 속에서 살아가는 약자. 도덕의 계보 제3논문에서는 죄의식에 사로잡힌 약자가 ‘금욕주의적 이상’이라고 하는, 삶에 반대되면서 우선시되는 경건한 가치들을 고안해내고 그러한 가치들을 통해 삶 자체를 단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금욕주의자들은, 삶을 “저 다른 생존을 위한 하나의 다리”로 간주한다. 그들은 삶을 “반박해야만 하는 오류처럼 취급”함으로써 비로소 삶을 영위한다. 삶을 부정함으로써 삶을 누리는 이러한 자기 모순적 삶의 유형에서 니체는 극심한 원한을 발견한다: “여기에는 견줄 데 없는 원한이, 즉 삶에서의 어떤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삶 자체, 그 가장 깊고, 강력하며, 가장 기저에 있는 조건들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기갈 들린 본능과 힘 의지의 원한이 지배하고 있다.”(481) 

금욕주의자들은 오로지 힘의 원천을 봉쇄하기 위해 힘을 사용한다. 그들은 욕망(생명력, 힘, 에너지)의 표출을 경계하고, 미의 표현이나 기쁨에 서툴며, 반면에 발육 부전, 고통이나 사고, 추악한 것이나 자발적인 희생, 자기 상실이나 자기 질책, 자기희생에 대해서는 환희와 희열을 느낀다. 그들은 자신의 전제조건인 생리적 삶의 능력이 감퇴할수록 더더욱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고 의기양양해 한다. 

자기를 서서히 말려 죽여가면서 자기를 발견하는 기묘한 금욕주의자들. 이들은 퇴화되어가는 자신들의 삶을 방어하고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금욕주의적 이상’을 만들어 낸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이상을 찬양하지만, 기실은 이상에 지배당한 채로 언제나 죽음, 권태, 피로, 종말을 향한 소망 따위와 대항하여 싸우고 있을 뿐이다.

니체는 금욕주의적 이상을 고안해 내어 반응적인 무리를 장악하는 사람을 '성직자'로 유형화한다. 성직자는 반응적 무리를 간호하는 건강한 자가 결코 아니다. 반응적 무리와 접촉한 상태에서 이들에 감염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들을 간호하거나 치료하는 건강한 자의 존재를 상정하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성직자는 반응적 무리의 필요와 요청에 의해 태어난, 가장 강력하게 반응적인(병든)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병든 무리의 구원자이자 목자이자 변호인으로서 무리를 통솔하고 지배하고 혹은 좀 더 중독시키기 위해 강한 힘을 소유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는 외견상으로는 현실을 부정하고 이상을 제안하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무리의 고통스런 현실을 보존하려는 의지로 가득 차 있는 자이다. 

원한 감정의 내면화는 공동체의 성립이라는 돌발적인 사태에 직면하여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성직자의 기만술에 의해서도 이루어진다. (어쩌면 ①공동체의 성립과 ②무리의 지도자로서 성직자의 출현, ③원한 감정의 내면화가 동시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비로소 역사 이후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 아닐까?) 병든 무리가 자신들이 겪는 고통에 분개하며 책임자를 색출하려 할 때,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모든 고통의 책임이 오로지 너희들 자신에게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원한의 방향을 변경시킨다. 그럼으로써 공동체의 일원들은 더 이상 서로 짐승처럼 싸우지 않고 내면의 깊이를 지닌 온순한 양이 되어 저마다의 마음의 골방에 처박혀 죄의식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죄의식에 너무나 시달린 나머지 죽어버리면 안 되므로 성직자는 간간이 “작은 즐거움”이라는 처방을 내린다. 이웃을 사랑하고 선행을 베풀고 상호성을 지향하고 공동체를 수호하도록 조언함으로써 무리로 하여금 소소한 행복감에 젖도록 하는 것. 그러나 그는 진정한 구원자가 아니며, 차라리 구원자의 탈을 쓴 사기꾼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병을 근본적으로 뿌리 뽑지 않으며, 그저 각종 위로 수단을 동원해 일시적으로 고통을 잊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 니체는 종교 뿐 아니라 철학, 과학, 역사 등 각종 근대 학문이 품고 있는 금욕주의적 성향을 철저히 해부한다. 진리를 추구한다는 명분 아래 세계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고 기술하려는 그 모든 학문적 노력에서 니체는 도그마에 사로잡힌 관조적 인간, 반응적 인간, 병적인 인간을 읽어낸다. 

대체 왜 인간은 현실의 저편에 금욕주의적 이상을 세워놓고 인생을 구경거리로 만드는가. 인간은 왜 고통의 축제 속으로 과감히 뛰어들지 못하고, 썩은 등받이 의자에 앉아 고통의 의미나 골몰하며 생을 소진하는가. 스스로를 긍정할 줄 모르는 병든 인간은 무언가를 의욕하기 위해 먼저 제가 겪는 고통의 의미를 발견해야만 했다. 그리고 금욕주의적 이상 속에서 고통이 ‘죄’라는 관점으로 해석됨으로써 비로소 인간은 하나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드디어 무엇인가를 의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니체는 인간이 금욕주의적 이상에서 의미를 발견하게 됨으로써 ‘의지’ 자체가 구출되었다고 말한다. 이때의 구출된 의지란 바로 삶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들에 대항하고 반발하려는 의지, “허무를 향한 의지”이다.

끊임없이 의미를 탐구하는 인간의 학문적 노력이 니체에게는 스스로 자신을 긍정할 줄 모르는 반응적 인간의 병적 징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신이나 진리라고 하는 그 모든 금욕주의적 이상, 그것은 고통으로 얼룩진 삶에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인간이 지어낸 강박적 환상일 뿐인가. 진리를 밝히려는 노력은 무의미하며 신은 처형되어야 마땅한가. 그러나 초월적이고 원대한 가치를 발견하려는, 또는 그러한 것을 지향하려는 끝없는 상승의지, 자신의 의미결핍을 극복하고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로서 온전한 실존을 찾고자 하는 욕망- 이 모든 것은 어쩌면 인간이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찬란한 본능인지 모른다. 도그마에 짓눌린 채 대지에서 벌어지는 삶의 축제를 즐기지 못하는 인간도 가련하지만, 마음속에 그 어떤 정신적 항성(恒星)도 지니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간 역시 딱하기는 매한가지 아닐까. 

탈리히는, 금욕적인 생활 속에서 존재성을 파악하려고 애써야 하는 피안의 타자로서가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의 기반'으로서의 신을 얘기한다. 모든 존재의 무궁무진한 깊이와 기반에 대한 이름이 곧 신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신이란 우리 존재 전체의 궁극적인 깊이이며, 우리 실존 전체의 창조적인 기반과 의미이다. 신은 자연 위에 있는 어떤 초월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의 '황홀성' 속에 그 초월적인 '깊이'와 '기반'으로 존재한다. 광기에 사로잡힌 니체가 단칼에 베어버린 독단적 권위와 도그마의 시체 위에서 우리는 그저 '허무'만을 곱씹어야 하는 것일까. 모든 자명한 것들의 폐허 위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새롭게 재건할 수 있지 않을까. 탈리히가 정의하는 ‘신’ 개념은 이러한 물음을 풀어가는 데 하나의 실마리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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率路 2010-04-10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 발제까지. 열심히 하시는 모습이 진심 '부럽습니다'ㅋㅎ

수양 2010-04-10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발제도 써가야 되는 빡센 프로그램인 줄은 미처 몰랐어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