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 - 철학 수고
칼 마르크스 지음, 강유원 옮김 / 이론과실천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서문과 세 개의 초고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는 첫 번째 초고 <소외된 노동>부터 세 번째 초고 <화폐>까지 요약한 것.  

소외된 노동 

국민경제학(당시의 경제학을 지칭)은 토지, 노동, 자본을 경제학의 전제가 되는 기본 요소로 다루지만 정작 요소들이 각각 그렇게 분리되기까지의 유래와 근거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각각의 추상적 요소가 탄생한 배면의 메커니즘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노동에 관해 살펴보자. 현 사회에서 노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①자기소외 행위다. 자기소외란, 노동자가 자신의 생산물로부터도 소외되고 생산 행위로부터도 소외되는 것을 말한다. 소외된 노동은 나아가 ②인간을 자연으로부터도 소외시키고, ③유적 존재로부터도 소외시킨다. 

   
 

유적 존재로부터의 소외: 인간은 자신의 유를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자기 자신을 보편적인 존재로서 관계한다는 점에서 유적 존재이다. 오로지 직접적 욕구의 지배 아래서 자연과 일면적으로만 대면하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자유롭게 지적으로든 활동적으로든 자신을 이중화하고 자신에 의해 창조된 세계 속에서 자신을 바라본다.  

인간은 자신의 활동을 대상화하고 자신의 삶을 의식할 수 있다. 자신의 의지를 삶에 관철시킬 수 있다. 이러한 의식적인 생명 활동이야말로 인간을 동물적인 생명활동으로부터 구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식적 생명활동에 의해서만이 인간은 유적으로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유적 존재다. 

그러나 소외된 노동은 이러한 관계를 역전시킨다. 인간은 소외된 노동 속에서 자신의 본질인 유적 존재로서의 의식적 생명활동을 단순히 자신의 생존수단인 것처럼 만들고 만다. 또한 소외된 노동은 인간으로부터 그의 생산 활동의 대상을 박탈한다. 생산 활동의 대상을 박탈하는 것- 이것은 인간의 비유기적 신체인 자연이 인간으로부터 제거됨을 의미한다.  

소외된 노동은 인간의 활동을 수단으로 저하시킴으로써 인간의 유적인 생활을 그의 육체적 생존수단으로 바꾸고 만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유에 대해서 갖는 의식은 소외에 의해 변질되고 그런 변질된 의식은 유적 생활이 인간에게 있어서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상 고병권 선생님 강의록과 연초록 선생님 발제문 일부 도용하여 짜깁기함)

 
   

의식적 생명활동으로서 의미를 가졌던 인간의 노동은 자기로부터, 자연으로부터 유적 존재 모두로부터 유리되어 오로지 개인의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인간이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 자신의 생명활동, 자연, 자신의 유적 존재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것에서 생겨나는 직접적인 귀결의 하나는 ④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외이다. 소외된 노동의 관계 속에서 각각의 인간은 자기 자신이 노동자로서 존재하는 척도와 관계에 따라 다른 사람을 본다. 즉 인간을 유적 존재의 구성원으로서 보는 게 아니라 단지 하나의 노동 상품으로서 대하게 되는 것.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될 뿐만 아니라 그의 생산물이 노동자 자신에게도 속하지 않는다면 대체 노동자를 소외시켜가며 생산된 그 생산물은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노동자를 등쳐먹는 ‘다른 인간’이 있다고 추정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가 고통을 치러가며 수행하는 생산 활동을 이 ‘다른 인간’은 마음껏 향유한다. 노동이란 노동자가 이 ‘다른 인간’의 지배, 강제, 질곡 아래서 그 인간에게 봉사하는 활동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노동자의 소외가 일어나는 배면에서 이 소외로 인해 그 만큼의 향유를 누리고 있는 이 ‘다른 인간’을 주목해야 할 것이며, 이 ‘다른 인간’과 노동자가 맺고 있는 관계를 고찰해야 할 것이다.
             
사유재산의 관계 

자본사회에서 노동자가 노동자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가 본질적으로 ‘궁핍한 자본’이어야 한다. 궁핍한 자본으로서의 노동자는 노동하지 않으면 언제나 그 이자를 상실하여 생존을 보장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결코 일을 쉬면 안 된다. 언제나 일을 함으로써 그는 자본을 생산하고 자본은 다시 노동자를 생산한다. 노동자로서 인간, 상품으로서 인간은 이러한 전체 운동의 산물이다. 한편, 노동하지 않음으로써 이러한 자본의 구조에 동참하지 않는 인간- 예를 들어 사기꾼, 거지, 소매치기, 백수 같은 사람들은 국민경제학 영역 바깥의 유령들로서만 존재한다. 그들은 철저히 배제된다. 

노동자의 욕구란 노동자가 노동하는 기간 중에 자신을 유지하는 욕구이다. 노동임금은 노동자가 노동하는 자로서 유지되기 위해 자본이 치러야 할 소비다. 노동자들이 다음 날 쓰일 노동력을 재생산하고 비축하도록, 그래서 더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자본가는 일정액을 투자해야 한다. 임금이란 말하자면 기계에 칠할 윤활유를 구입하듯이 자본가가 지출하는 경비이다. 더 큰 것을 얻기 위한 자본의 희생인 것이다. 자본가는 최소한의 기름으로 최대한 기계를 잘 돌려야 한다. 그는 자본이 얼마만큼의 노동자들을 ‘부양’할 수 있는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것이 얼마만큼의 ‘이자’를 가져오는지가 문제일 뿐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인간은 상품으로 전락한다. 인간은 단순한 노동인간일 뿐이며 추상적으로 실존한다. 그는 비인간이다. 실체가 없다. 

실체 없는 비인간, 노동인간이 생산해낸 산물은 더 이상 사회적이고 자연적이고 개별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는 그저 돈을 받고, 받은 만큼 생산할 뿐이다. 자본사회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이 노동을 통해 생산한 것에 대하여 임금의 대가 이상의 의미 내지는 사연을 부여할 수 없다. 이렇게 자본사회에서 생산된 모든 생산물(사유재산)은 그 자연적, 사회적 질(質, 고유한 의미)을 잃어버린다. 극히 다양한 종류의 자연적, 사회적 현존 속에서 그것의 현실적 내용에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본이 생산된다는 것, 이러한 대립이 극단으로 추동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이 관계 전체의 극단, 정점, 몰락이다. 

한편, 봉건 사회 질서에 익숙한 토지 소유자는 자신의 사유재산인 토지에 봉토라느니 세습 영토라느니 하여 각별한 사연을 부여하고 그것을 중시 여긴다. 그러나 자본가에게는 오로지 경작만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그들의 태도가 전근대적 취향으로 비추어질 뿐이다. 이렇게 토지는 자본에 비해 아직 정치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사유재산이다. 토지는 궁극적으로는 자본이지만 현재로서는 세계에 연루된 상태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여 자기 자신에 이르지 못한 자본이다. 그것은 아직 완성되지 못한 자본이다. 하나 이것은 세계적 형성의 과정에서 추상적인, 다시 말해서 순수한 표현에 이르러야 하고, 사실상 발전의 현실적 진행에서 실제로 그리 될 것이다. 토지 소유자에 대한 자본가의 승리는 필연적이다. 토지소유의 자본화를 억제하려는 일부 국가들의 시도는 헛된 노력일 뿐이다.

사유재산과 노동 

부의 주체적 본질은 무엇인가. 최초의 논의자인 중상주의자(≒중금주의자)들은 유통의 과정에서 부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그들에게는 유통의 과정에서 화폐 혹은 화폐로 쓰이는 물질인 귀금속만을 부의 현존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이후 출현한 중농주의자들은 부의 원천이 화폐나 귀금속이 아니라 토지(자연)에 있다고 말한다. ‘토지’라고 하는 천연의 재료는, 농업이라고 하는 인간의 노동을 거쳐 비로소 ‘부’가 된다. 다시 말해 잉여가치의 원천은 유통이 아니라 생산으로부터 나온다. 인간이 노동을 통해 풍요로운 자연에서 최초의 잉여를 발굴해 낸다는 사실, 이것은 곧 부의 주체적 본질이 인간의 ‘노동’에 있다는 얘기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때의 노동은 아직 그 보편성과 추상성 속에서 파악되고 있지 않으며(‘노동력’으로 파악되고 있지 않으며), 여전히 특수한 자연 규정적 존재 방식에서만 인식될 뿐이다. 즉 이 당시 중농주의자들에게 노동은 추상적 노동이 아니라 자연에 귀속되어 있는 구체적 형태로서의 농경 노동이었으며, 토지 역시 아직은 인간에게 독립적인 자연적 현존으로만 인정되었다. 다시 말해 토지 역시 노동 자체의 한 계기로서, 즉 ‘토지 자본’으로서 토지는 아직 인정되지 않고 있었다. 

이후 등장하는 경제학자들은 중농주의자들의 사고의 한계를 뚫고 나아간다. 사실상 경제적 관점에서는 농업이 다른 어떠한 산업과도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농경 노동이라고 하는, 어떤 특수한 요소에 구속된 특수한 노동으로서의 노동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노동 일반이 부의 본질인 것이다. 이들은 이제 (농경 노동이 아니라 보편적 의미의) 노동이 부의 본질이라고 언명함으로써 특수한, 외적인, 대상적일 뿐인 부를 부인한다. 이로 인해 부는 비로소 그 보편적 본질이 인식되었다. 부의 본질은 추상화된 인간의 노동이다! 

인간의 노동이 부의 본질로서 추상화되자, 아담 스미스는 인간의 추상화된 노동을 하나의 ‘사유재산’으로 간주한다. 그에게 있어 사유재산은 인간 바깥의 어떤 상태로서 있는 게 아니라, 사유재산 자체가 곧 인간의 노동 즉 인간 자신이었다. 노동력이라는 사유재산을 가진 인간이 그것을 자본가에게 팔아서 거기서 생긴 돈으로 먹고 사는 거다. (제 기운을 남한테 팔아서 먹고 사는 노동자!) 사유재산이 인간 자신과 합체되고 인간 자신이 사유재산의 본질로 인식됨으로써 이제 인간은 하나의 물적인 재산으로, 지극히 비인간적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부르면 꽃으로 다가오는 인간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노동력, 노동력이라는 상품인 거다. 

모든 가치의 근원을 노동으로 파악하는 국민경제학은 일견 노동하는 인간을 최대의 가치로서, 본질로서 존중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 배면에서는 이렇게 인간에 대한 부인을 철저히 수행하고 있었다. 모든 가치의 근원은 노동이라고? 따라서 노동하는 인간은 가치 있다고? 아니다, 어디까지나 ‘노동’하는 인간이 가치 있을 뿐이다. 노동하지 않는 인간은 무가치하다. 노동이 최고의 가치를 얻는 사회에서 인간은 철저히 소외된다.     

사유재산과 공산주의 

노동이 부의 본질인 사회, 노동이 사유재산인 사회, 오로지 노동만이 있고 본연의 자기는 소외되는 사회 속에서 진정한 공산주의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진정한 공산주의는 (인간의 자기 소외를 낳는) 사유재산을 적극적으로 지양함으로써 존재한다. 사유재산의 적극적 지양은 곧 인간적 생활의 회복이다. 그것은 모든 소외의 적극적 지양이다. 이를 통해 종교, 가족, 국가 등에서 자신의 인간적인, 다시 말해서 사회적인 현존으로 인간이 귀환할 수 있다. 그것은 최종적으로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적 본질의 현실적 획득이다. 

이러한 공산주의는 완성된 자연주의=인간주의로서, 완성된 인간주의=자연주의로서 존재하며,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충돌의 참된 해결이며, 실존과 본질, 대상화와 자기 확인, 자유와 필연성, 개체와 무리 사이의 싸움의 진정한 해결이다. (중략)  

욕구, 생산과 분업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인간은 다른 인간으로 하여금 자꾸만 새로운 욕구를 창출하게 한다. 이는 타인에게 새로운 희생을 강제하기 위해서이고, 새로운 의존 속으로 옮겨 놓기 위해서이며, 새로운 향유 방식으로, 따라서 새로운 경제적 파멸의 방식으로 유혹하기 위해서이다. (신발이 필요 없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자본주의사회에 포섭되면서 모조리 신발을 사 신게 된 경우가 이런 것 아닐까?) 각각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힘을 창출하려 하는데, 이는 그 안에서 자신의 이기적 욕구의 충족을 발견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모든 새로운 생산물들이 서로를 기만하고 약탈하는 새로운 잠재력으로 존재하게 된다. (경쟁의 심화를 얘기하는 건가?) 하나의 막강한 잠재력으로서 생산물은 점점 사회에 많아지지만 동시에 인간은 빈곤해지고 더욱 더 많은 화폐가 필요하게 된다. 화폐가 많아질수록 인간은 더 빈곤해진다. 자본사회는 물신숭배사회, 금권사회이다. 화폐의 양은 점점 더 인간의 유일한 힘 있는 속성이 되고, 화폐는 모든 존재를 그 추상으로 환원한다. 

자본사회에서 인간 소외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일어난다. 한 측면에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더 많은 것을 욕망하게 하고(지름신이 강림한 노동자), 다른 한 측면에서는 욕구가 한없이 상실되고 단순화되는 것이다. (퇴근하면 티비 보다 잠만 자는 노동자) 자본사회에서는 욕구의 증대와 욕구 수단의 증대가 어떻게 욕구의 상실과 수단의 상실을 만들어내는가. 자본가는 노동자의 욕구를 가장 필요하고도 가장 참담한 육체적 생존 유지로 환원시키고, 노동자의 활동을 가장 추상적인 기계적 운동으로 환원시킨다. 그에게 인간은 활동의 욕구와 향유의 욕구 이외에 다른 어떤 욕구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가능한 한 가장 궁핍한 생활을 보편적 척도로 산출한다. 그는 노동자의 활동을 모든 활동의 순수 추상으로 만들듯이, 노동자를 무감각하고 욕구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자본사회를 분석하는 국민경제학은 이런 점에서 체념, 궁핍, 절약, 금욕의 학문이다. 이 학문의 진정한 이상은 폭리를 취하는 금욕적 구두쇠와 생산하는 금욕적 노예를 만들어 내는 데 다름 아니다. 폭리와 금욕, 그리고 생산과 금욕! 두 대립항의 절묘한 결합이 참으로 기이하지 않은가. 다시 말해 낭비와 절약, 사치와 궁핍, 부와 빈곤이라는 대립 항이 이 학문에서는 하나의 매커니즘에서 발생하는 동시적 효과인 것이다.  

이제 분업을 고찰해보자. 분업은 자본사회의 필수요소다. 근대 국민경제학의 다양한 논의들은 분업의 문제에 있어서는 한 가지 입장으로 통일된다. 분업과 생산의 부, 분업과 자본 축적이 서로를 조건 짓고 있다는 것, 자기 방임된 사유재산만이 가장 유용하고 포괄적인 분업을 낳아 놓을 수 있다는 것. 분업에 관한 국민경제학자들의 입장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아담 스미스에 따르면, 인간의 이기심이 교환하려는 경향을 낳았고, 교환(거래)은 분업을 낳았다. 분업으로 인해 인간의 재능은 다양해졌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재능의 다양성이 분업을 낳은 게 아니라, 분업이 일어나다 보니 인간 재능이 다양하게 분화되었다는, 혹은 그런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분업은 노동에 무한한 생산능력을 부여한다. 분업은 교환과 시장의 확대에 의하여 증대되고 또 그것에 의하여 제한된다. 진보한 사회에서는 모든 인간이 상인이고(분업에 의해 생산한 걸 서로 교환 판매해야 하니까) 사회는 상업 사회가 된다. 

세이는 교환이 사회의 본질에서 근본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물론 교환이(그리고 교환에서 비롯한 분업이) 한 사회가 지속되는 데 어느 정도 유용한 수단인 것은 사실이다. 또한 교환은 사회의 부를 위한 인간 능력의 적절한 사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교환과 분업은 개인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능력을 저하시킬 수 있다. 

스카르벡은 인간에 내재하는 개인적 힘들, 지능과 노동을 위한 육체적 소질을 사회에서 유래하는 힘들, 서로를 조건지우는 교환이나 분업과 구별한다. (원래 내가 지닌 힘, 자본의 논리로 산출될 수 없는 힘, 고유하고 특수한 전인적 능력 vs 사회에 복무할 수 있는 능력, 사유재산으로 변환될 수 있는 사회적 능력, 이 능력은 현실적 개인으로부터 나온 능력이 아니라 분업과 교환과 관련된 사회에서 유래하는 힘, 사회가 나에게 길들인 힘, 사회가 나에게 할당한 힘) 그러나 어쨌든, 교환의 필수 전제는 사유재산이다. 

밀은 상업을 분업의 결과로 서술한다. 인간의 활동은 기계적 운동으로 환원된다. 부의 대량생산, 생산의 집중화를 위해 각각의 사람들에게는 가능한 한 작은 범위의 작업들이 맡겨져야 한다.  

인간의 이기심에서 비롯한 교환 경향과 교환이 낳은 분업. 분업은 대량생산을 통해 부를 효과적으로 창출하지만, 동시에 개인적 활동의 빈약화와 탈본질화를 낳는다. 이러한 분업과 교환의 근거는 사유재산이며, 따라서 인간적 삶을 위해 사유재산의 지양이 필요하다.

화폐 

화폐란 무엇인가. 화폐는 모든 것을 구매하는 속성을 가짐으로써, 다른 말로 모든 대상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속성을 가짐으로써 우월한 의미를 갖는 대상이다. 화폐가 전능한 존재로 간주되는 것은 화폐 자신이 (구매를 통해) 모든 것으로 변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화폐가 모든 것을 매개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것, 나의 모든 개인적 본질에 비추어 불가능한 것을 화폐를 통해서 할 수 있다. 고로 자본사회에서 화폐의 속성들은 곧 화폐 소유자의 속성과도 같아진다. 화폐의 존재와 능력이 곧 화폐를 가진 자의 존재와 능력이다. 

화폐가 없는 자의 수요는 한갓 비현실적 표상(공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화폐가 있는 자의 수요는 현실적으로 유효한 표상이다. 화폐는 표상을 현실로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실을 (고유한 의미나 본질이 표백되어버린) 단순 표상으로 만들어버린다. 화폐의 논리로 점령된 현실은 돈을 초월한 고유의 의미 같은 것은 모조리 말살되고 오로지 얼마짜리 값어치만을 갖는 한없이 추상적이고 몰개성한 표상으로 변질되어버리는 것이다. 

화폐는 만물을 혼란케 하고 전도시킨다. 그것은 모든 인간적, 자연적 성질을 혼용시킨다. 비겁한 사람도 용감함을 구매할 수 있게 되는 식이다. 이것은 결코 인간적 관계가 아니다. 인간적인 관계라는 것은, 인간이 의지하는 대상에 대하여 자신의 현실적이고도 개인적인 삶을 특정하게 표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화폐만능사회에서는 이 모든 게 불가능하고 또한 무의미해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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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2010-04-22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무 잘해서 내가 추천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