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 강의 듣고 나서 제 발제가 놓쳤던 부분이 무엇이었는지 좀 이해가 되었는데요, 대략 정리를 해보면: 니체는 진리나 신과 같은 금욕주의적 이상의 무가치함을 이야기한 게 아니다. 니체는 가치를 묻는 게 아니라 가치의 가치를 묻는다. 가치의 기저에서 그러한 가치에 다가가고자 하는 앎에의 의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은 것. 그리고 이때 니체는 앎에의 의지가 '허무를 향한 의지'라고 했지만, 이는 단순히 '허무에의 의지'가 아니라, '허무라도 향하는 의지', '허무조차도 욕망하는 의지'이다. 즉, 포커스를 두어야 할 지점은 허무주의조차 하나의 '의지'라는 것. 허무라도 의지함으로써 의지 자체가 구출되었다는 것.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니체가 끝나버린 것 같습니다. 사실 좀 얼떨떨하기도 하구요. 앞으로 니체를 좀 더 깊이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듭니다. 저의 노예적 삶에 대한 '위생학'으로서, 하나의 행동 강령으로서 니체를 읽어볼까 합니다.  

아무개님: 매우 대단한 니체선생에 대한 의지담론에 관한 서술이군요. 역시 큰 대인-선생아래 큰 이익(대리)-배움이가 있다는 공자의 사제도에 관한 말씀이 생각나는군요. 니체의 강자-귀족개념(권력의지, 초인, 영겁회귀)을 이해한다는 것, 또 그것을 오늘날 우리의 사정에 맞게 써먹는다는 것은 그리 심플한 문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또 더욱이 니체를 따라잡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포스트모던적 사유를 한다는 것 등등, 이러한 모든 것은 모든 위대한 독일 블란서 영미의 현대 철학자들의 고민이기도 했었구요. 특별히 수양님의 본 니체 세미나의 최종점 서술은 님의 고스승(주- 고병권 선생님을 말함)의 독특한 스칼라싶을 물씬 풍기게 하는 대목이기도 한 것 같군요. 원래 고스승의 니체 연구는 그의 학적인 이력을 따라가 볼 때에 매우 특이한 형태인 자연과학의 매개학문인(물리-화학-생물학)화학 학문을 거쳐서 독일의 관념론과 실재론자를 대표하는 칸트와 헤겔을 매개하는(?) 맑스의 사회학을 거쳐서 2000년 된 서구사상의 학문자체를 재배치하려는 니체의 망치를 든 철학에 도달하려는 모양을 자아내는 듯 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그래도 타국의 현대 니체해석자인 들뢰즈를 우리가 훌륭한 해석자다 라고 치고서도 그와는 전혀 색다른 아주 섬세한 니체 해석의 또 다른 해석 단면을 늘 깔끔하고 깔쌈하게 제시하고 있는 고스승의 매력적 니체읽기가 되기도 하는 셈이지요. 그의 니체에 관한 저서들을 한번 읽어 봐보세요. 마치 어린아이가 동시를 쓰듯이 그렇게 담백하게 니체의 뜨거운 사상 문체들을 맑은 시냇물로 그렇게 해석하고 있는 듯합니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이 안 그랬던가요? 참으로 위대한 위인은 하루에 한번씩 또 그 이상을 꼭 어린 아이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니체의 의지사상 역시 독일사상의 아니, 현대의 모든 서구사상의 원류인 칸트의 물자체 사상에 그 근간을 아낌없이 거기 두고 있지요. 아시다시피 니체의 사상적 아비인 쇼펜하우어의 스승은 칸트입니다. 칸트의 미학적 의지이론을 니체의 직계 스승인 쇼폔 선생께서 재해석에 성공했다는 말이죠. 니체의 사상적 전 학적 전술은 다음처럼 간단합니다. "무한하게 약자의 노예도덕에 대립되는 강한 자라는 귀족도덕의 비고정적 주체의지의 그 대립의 지평을 선-악과 진-위와 미-추의 대립지평마저 끝내는, 그리하여 자유로이 그 지평을 왕래할 수도 있게 되는, 그 영원한 모순적 부-드-러-운 생명의 의지력을 소유한 자기실현의 자유의지에 있다." 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약한 의지와 무한히 대립되는 강한의지 조차도 그 대립의 지배-실현 지평에 머물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서 무-대립의 지평인 부드러운 힘의 자기지평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강-약의 대립구도를 영원히 운명적 힘으로 안고서도 그래도 그것과 함께 부드러운 사랑의 숙명의 지평으로 다시 나아감으로서 니체의지미학의 진정한 방향타가 최종성립 도달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미 "미는 현실에서 자유다." 라는 칸트의 의지미학이 "니체의 조차와 마저 라는 그 역설적 미적인 생성해석학을 통한 심화의 과정의 다름이 아니다." 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가치의 가치추구에 대한 앎의 본질적 의미를 진솔히 형이상학적 자기반성에서 물어 들어가는 니체의 새로운 서구 형이상학에 대한 언어해석학은 하나의 통일을 거부하면서 생성하는 존재의 변증법적 형식을 띠고 있음에 분명해 보입니다. 우선 한국어(니체의 독일어 진술도 매우 유사합니다. 이거 연구해보세요. 큰 학문적 부가가치가 될 겁니다.)에 있어서 "조차"는 어미로서 또 "마저"는 조사로서 모든 자립 혹은 실질형태소에 붙어 살면서(기생하면서) 기능하고 있는 즉 단어와 단어들을 문법적으로 연결시키면서 그 의미들을 변형시키고 있는(가감하는) 형식 혹은 의존 형태소의 한글의 최소 단위의 언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수양님의 니체에 대한 위의 의지사상의 재진술은 니체의지의 변증법에 따른 순수한 자기 욕망의지의 방향으로의 그 정위의 지평으로 다가가는 데에 별 무리 없이 잘 진술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원래 그것은 이렇습니다. 우선 조차라는 어미는 그것의 사용에 있어서 이미 언급한 앞 한 단어의 사실에 대한 인정과 가정의 진술의 형태가 앞에서 언급한 말로부터의 뒷말에 대한 즉 뒤에 언급한 단어로 부터 자유로운 의지의 의미에 대한 뜻 강조의 축이 되는 주장 되고 있는 반면( 예: 낫 놓고 기억자조차 모른다), "마저"라는 조사의 사용방법에 있어서는 그 반대로 언급된 단어로서 즉 앞에 대한 뒷말로부터의 앞 단어의의지의 자유로운 의미에 대한 그 단어의 뜻의 강조점이 주장되는 형식형태소가 된다는 것이죠(예: 감기뿐만 아니라 배탈마저 났다). 

자, 그럼 위의 문장을 니체의 글쓰기 방식인 전술과 후술의 최종 글쓰기의 자유로 향하는 강-약의 대립을 넘어선 부드러운 선악의 피안 밖에 영원히 도달하려는(잠언적 글쓰기에 있어서 조차마저의 이 상호적인, 침투하는) 니체의 변증법적 텍스트로 다시 재구성해보면, "1)포커스화 된 형이상학적 가치- 2)가치의 가치전도화- 3)가치에 대한 앎에의 의지-4)앎에 대한 허무한 무지에의 의지-5)허무 자체를 의지하는 능동적인 허무의 의지, 즉 허무자체가 앎에 주체인 허무를 생성함 - 6)허무가 초점화 된 최초의 형이상학적 의지로부터 구원되는 영원한 부드러운 의지자체의 구출성" 이라는 이 도식과정에 '조차'와 '마저'라는 어미조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렇게 용체언에 붙어서 서술되면서 마치 유희하는 어린아이가 주사위를 땅에 던지고 놀며 유유자적 유희하는 주사위놀이와 같은 그런 형국을 이룬다는 것이됩니다. 물론 니체의 이러한 의지단계에 있어서 그 이전의 인간의지단계는 낙타와 호랑이로 상징 되는 그런 단계인 두 단계로서 강한 인내의 노략의지와 약한 단계의 그런 의지의 단계를 이루고 있고요. (최종도식화: 낙타-호랑이-어린아이-운명의 사랑의 의지단계) 

여하튼, 조차-마저! 이것은 멋있는 한글의 체언과 용언들의 주변언어들로써 기생하면서 붙어사는, 그러한 익명의 조사와 어미들 같습니다. 결국 니체의 모든 글쓰기가 이러한 마저-조차의 운동하는 잠언적 글쓰기의 방법형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한번 그의 모든 텍스트에서 확인해 보세요. 자 그럼 "입춘대길 화기만당!" 하세요.  

수양: 저도 이번 강의 들으면서 어미나 조사 때문에 해석이 굉장히 달라질 수도 있다는 걸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번역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고요. 무엇보다도 단지 의존형태소에 불과한 '조차'와 '마저'가 니체 사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 새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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