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맛을 알았다. 내가 이제까지 먹었던 게는 게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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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청송 송소고택에서 하루 묵었다. 9대에 걸쳐 만석의 부를 누린 영남의 대부호가 1880년경에 건축한 가옥이라고. 새벽을 여는 산새소리, 다음날 오전까지 사그라들지 않던 아랫목 온기, 온돌방 안에 가득했던 참나무 내음... 사진으로 담아낼 수 없는 게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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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6-05-04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880년경 지어졌다고 해도 130년이 훨씬 넘은 집이네요.
산새소리, 아랫목 온기, 참나무 내음... 시각, 청각에 후각까지 자극받고 갑니다.
사진에 풍경을 담는 시각이 멋지세요.

수양 2016-05-04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사체가 워낙 훌륭해서요. 사진에 미처 다 담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예요. 정말 좋드라구요.
 
명리 : 운명을 읽다 - 기초편 명리 시리즈
강헌 지음 / 돌베개 / 2015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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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를 먼저 접한 후 읽으면 좋을 것 같다.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가 사주명리의 전반적인 철학과 총론에 치중한다면 강헌의 명리는 천간합, 지지합, 충, 형, 십이운성, 신살 등등 고미숙의 책이 자세히 다루지 않고 넘어갔던 보다 구체적인 내용까지 들어간다. 같이 읽었더니 보완도 되고 복습도 된다. 두 권 읽고 나면 남의 팔자까지 진단하기는 어렵더라도 내 운명학적 꼴 정도는 조망해볼 수 있겠다. 내게 닥친 미래를 뭉툭하게나마 조금은 가늠해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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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움직여라!
최종현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02년 6월
평점 :
절판


정기신이란 무엇인가.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에서 고미숙은 ‘정(精)’을 정액, 질액, 림프액, 소화액, 혈액, 골수 등등을 아우르는, “온몸을 적셔주는 물질적 신진대사를 총칭”하는 것으로, “생명의 기초를 이루는 물질적 토대”로 이해한다. 한편, ‘기(氣)’는 “주로 몸 안팎을 돌아다니면서 항상성을 유지시켜주는 에너지의 흐름”으로, ‘신(神)’은 “정기의 흐름에 벡터를 부여하는 컨트롤러 역할”을 하는 “고도의 정신활동, 변화를 주관하는 무형의 작용”으로 본다.

 

기를 곧바로 에너지로 보는 고미숙과 달리 이 책의 저자는 기와 에너지를 엄격히 분리한다. 에너지는 동물이 음식을 통해 흡수한 탄소화합물의 산화 작용에 의해 생기며, 이는 기와 다르다는 것. 에너지와 기가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몸 안에 기가 아무리 가득해도 에너지가 부족하면 힘을 낼 수 없고, 반대로 몸에 에너지가 충분해도 기가 몸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가면 몸이 목석처럼 굳어져 힘을 전혀 못 쓴다는 점, 또 음식을 많이 먹어 영양이 과잉되면 에너지가 소모될 때까지 기의 운용이 원활하지 못하다는 점 등을 예로 들고 있다.

 

우리 몸 안에서 기와 에너지의 관계가 아주 밀접한 것은 사실이다. (...) 그렇다고 해서 기를  ‘생체 에너지’라고 하거나 ‘기 에너지’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단전에 기를 축적할 때 몸속에 ‘정(精)’이 생기며, 이 정의 힘, 즉 ‘정력’을 ‘생체 에너지’라고 부를 수 있다. (...) 기와 에너지는 같은 것이 아니며, 다만 둘이 얼마나 몸 안에서 긴밀하게 조화를 이루며 작용하느냐에 따라 생명의 활력이 좌우된다. (...) 기를 잘 활용하면 에너지를 필요한 때에 필요한 곳에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즉 수련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단련하여 생명력을 강화시키는 과정에서, 몸 안의 에너지를 발생시키고 활용하는데 기가 커다란 역할을 하는 것이다. -69쪽

 

신에 대해서는 이렇게 얘기한다. “‘신(神)’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God)이나 절대자가 아니며 흔히 쓰는 ‘정신(精神)’의 ‘신(神)’이다. 우리는 정신을 마음 즉 심리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만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원래는 ‘정기신’의 ‘정신’으로서 기로 단련된 심신을 가리키는 말이지 단순히 심리 상태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정은? 정은 우리가 흔히 정력, 정기라고 할 때의 그 정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이 책에 따르면 양정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는 체조, 호흡, 명상 순이고, 양신에 있어서는 명상, 호흡, 체조 순이라고. 양생은 양정과 양신이 합쳐진 것으로, 수련을 할 때 정에 더 치중하게 되면 무술이나 차력사 방면으로 나아가고 신의 개발에 집착하면 예지력이나 독심술 등의 신통력 쪽으로 나아가는데, 저자는 사회생활을 건강하게 잘 해나가는 데 양생의 목적이 있다면 구태여 양정 혹은 양신 각 한쪽 방면으로 파고들어 오타쿠가 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면서 자기는 그런 게 하나도 안 부럽다고, 그저 양정과 양신을 적절히 균형 있게 해나가는 편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아니 그래도 양생법을 통해 궁극적으로 어벤져스가 될 수 있다니 이 소설 같은 소리를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쨌든 흥미로운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저자가 에스케이그룹 전 회장이다. 대기업 총수가 도가적 양생법에 천착한다는 거 자체가 아이러니하지 않나. 그가 주창한 심기신수련법은 ‘패기’를 강조하는,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에스케이 직원들에게 적용하기 위한 생명관리기술인데, 이를 푸코가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는 흔히 푸코 말기 사유에서 자기배려의 기술이 저항의 소극적인 방식이 아닌가 하지만 글쎄 어쩌면 양생법조차도 저항과 탈주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오히려 이 또한 하나의 효율적인 권력장치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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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과 은총
시몬느 베이유 지음, 윤진 옮김 / 이제이북스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다. 한순간의 우연으로 모든 것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라고 말할 수 있는 힘만이 예외이다. 우리는 바로 그 힘을 신에게 바쳐야 한다. 즉, 파괴해야 한다. ‘나’를 파괴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자유 행위이다. -48쪽

 

이 책의 모든 구절들이 죄다 저런 식이다. 문장을 하나씩 톺아보자. 첫 문장과 두 번째 문장의 흐름은 자연스럽다. 세 번째 문장은 반전이다. 그렇다면 다음 문장은 반전에 대한 근거가 와야 한다. 그런데 그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일단 넘어가자. 그 힘을 왜 신에게 바쳐야 하지? ‘즉’이라는 연결부사는 왜 뒤따라야 하는데? 나를 파괴하는 것이 왜 신을 향한 봉헌의 의미를 갖지? 오리무중. 납득불가.

 

잠언 형식의 글임을 감안하더라도 문장의 연결이 도저히 매끄럽지 못하다고 여겨지는 이런 대목을 만나면 인내심에 한계가 온다. 연결이 모호해도 바로 그 모호함으로 인해서 행간에 불가사의한 신비로움이 생겨날 수도 있는 걸텐데 이 책에서 끝내 그런 신비로움을 발견해내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나의 독해 능력 부족인가. 읽다 던져버림. 시몬 베유는 어떤 사람일까. 기독교 신앙에 뿌리를 둔 스피노자주의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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