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티즘 - 개정판 현대사상의 모험 24
조르주 바타유 지음, 조한경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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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정치적 기도이며, 제사는 주술적 행위이고, 주연(酒宴)은 풍요로운 수확을 기원하는 염원이다. 그러나 바타유에 따르면 단지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어쩌면 그러한 정의는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노동의 질서와 금기로 촘촘하게 이루어진 세속의 세계에서 전쟁과 제사와 주연은 인간의 억눌린 잔인성과 폭력성, 탕진과 파멸에의 충동이 정당하고도 장엄하게 분출되는 실질적 효용을 갖는다. 그리고 바로 그런 경건한 절차야말로 폭력이 인간 사회의 질서에 성공적으로 통합되는 방식이다.

 

에로티즘 역시 금기와 위반이라는 테제 속에서 설명된다. 그 또한 정교하게 기획되는 위반의 게임인 것. 에로티즘은 자연으로 회귀하여 원초적인 동물성을 무한 발산하는 그런 종류가 아니다. 오히려 그와 같은 방식으로는 에로티즘의 미학을 구현하기 어렵다. 위반이란 금기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금기를 한 번 걷어 올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에로티즘은 존재론적 불균형과 불안과 긴장을 수반하는, 자극적인 즐거움과 고뇌가 공존하는 상태인 것이다.

 

금기의 위반을 통해 일시적으로 강렬하게 분출되는 왕성한 낭비(=폭력, 살해, 파괴, 생식을 초과하는 유희로서의 성욕 등등)에서 전복적 진리를 발견하는 바타이유의 사유는 흥미롭다. 춤판의 속성을 떠올려볼 때 바타유가 논하는 에로티즘은 일견 수긍할 만한 점이 있는 통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역시, 금기의 위반을 통해 얻는 쾌락은 찌질한 쾌락이 아닌가 하는 의문. 그야말로 노예적인 쾌락이 아닌가. 압박으로부터의 폭발, 아름다움을 더럽히는 데서 오는 파괴적 기쁨, 공포와 고통 속에서 극대화되는 도취와 희열... 바타유의 에로티즘은 억압적 에로티즘이다. 신경증적 에로티즘이다. 죽음 충동으로 가득한, 강력한 부정의 철학이다. 그가 말하는 에로티즘이 못내 협소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에고의 회로에 갇힌 신경강박으로 느껴지는 까닭은, 아무래도 먼저 읽은 오쇼의 영향 때문인 것 같다.

 

오쇼가 말하는 쾌락은 웅대하고 높은 차원의 쾌락이다. 노예의 쾌락이 아니야. <섹스란 무엇인가>에서 오쇼는 섹스가 단순히 생물학적 결합에서 오는 감각적인 쾌락에서 더 나아가 얼마든지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인 쾌락으로, 우주와 신성을 만끽하는 쾌락으로 심오하게 확장될 수 있음을 얘기한다. 이것이 바타유가 말하는 '신성의 에로티즘'이라 할지라도 오쇼가 말하는 성적 쾌락은 금기의 위반에서 얻는 쾌락과는 급이 다르다. 오쇼의 쾌락은 어떤 부정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 긍정으로 가득한, 광대한 스케일의 쾌락이다. 바타유의 에로티즘이 고뇌와 고독의 에로티즘이라면 오쇼의 에로티즘은 평화와 자유와 해방의 에로티즘이다.

 

제목과 달리 썩 에로틱한 책은 아니었다. 행간 곳곳에 스며 논지의 전제를 이루는 봉건적 여성관도 그렇고 여기저기 궤변 같아 보이는 대목들 하며. 다만 아래 옮겨 적은 대목은 곱씹어볼 만 하다. 바타유의 이론은 에로틱하지 않지만 그의 철학적 자세는 에로틱해 보인다.

 

"[헤겔 류의] 전문 작업으로서의 철학은 말하자면 하나의 노동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철학은 내가 처음에 언급한 강렬한 감동적 순간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을뿐더러, 배제한다. 따라서 그것은 가장 일차적이고도 중요한 종합 작업으로서의 가능성의 총체가 될 수 없다. 그것은 가능성의 총체도, 가능한 경험의 총체도 아니며, 단지 인식을 목적으로 하는 한정된 경험의 총체에 지나지 않는 지식의 총체일 뿐이다. 전문작업으로서의 철학은 의식적으로 나아가 감정적으로 이질적인 물체를 거부하며, 아무리 강렬한 감동을 얻을 수 있다고 해도 더러운 것 또는 적어도 오류의 근원, 탄생, 생명의 창조 등과 결부된 것은 마치 죽음을 거부하듯이 거부한다.

 

사실 극단적 인간성, 즉 인간의 성행위와 죽음의 폭발을 외면한 채 오로지 평범한 인간성만을 설명할 뿐인 철학의 기만적인 결과에 놀라는 것은 내가 처음이 아닐 것이다. 내가 보기에 철학의 이러한 싸늘한 측면에 대한 반발은 키에르케고르는 말할 것도 없고, 니체에서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근대 철학자들의 특징을 이룬다. 당연한 일이지만 철학은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철학은 (...) 방랑이나 탈선적 사고를 용납하지 못했다. 사실 철학은 다른 데가 아닌 거기에서 심오한 정당성을 획득하지 않던가. 그러나 철학이 규율과 조화로운 노력만을 끌어들인다면, 다시 말해 철학이 어떤 극단성에 노력을 기울이지 못한다면, 철학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종합 작업과 가능성의 총체’로서의 철학을 진정한 철학이라고 한다면, 위의 철학은 심오한 존재 이유를 잃어버린 철학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 철학은 삶의 극단과 관련된, 내가 어디에선가 ‘가능성의 극단’이라고 표현한 것, 즉 철학적 대상의 극단을 끌어안지 못한 이유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 물론 철학은 죽음에 파묻힐 때, 즉 죽음의 끝인 혼미에 자신을 내던질 때만 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엄밀히 말해서 철학은 철학을 부정할 때에 한해서, 철학에 조소를 보낼 수 있을 때에 한해서 가능하다. 정말 철학이 철학을 비웃는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한 가정은 철학적 계율을 인정하는 동시에 파기를 전제하는데 그러면 이제 철학은 모든 가능성의 총체로서의 종합 작업이 될 수 있다. 그 총체는 종합이지 단순한 더하기가 아닌 것이 왜냐하면 그곳은 인간의 노력이 한계를 드러내며, 인간이 무기력에 기꺼이 자신을 맡기는 곳이기 때문이다. (...) 나는 이처럼 밖으로 흘러넘치는 극단적 체험을 묘사하고자 하는 것이다." -p.302~303

 

바타이유는 자신이 에로티즘이라고 하는 철학적 가능성의 극단을 탐사하고는 있지만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애당초 노동과 금기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철학의 언어로 에로티즘을 규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넌센스이고 한계를 갖는다는 입장을 보이면서도, "위반 자체가 위반의 담론을 대체하는 결정적인 순간" 직전까지는 접근의 길들을 묘사하는 언어가 의미를 갖는다고 하면서 철학적 불가능에 뛰어든 자신을 변호한다. 금기의 최전선까지 나아가 끊임없이 위반을 시도하고 생명을 빼앗기기 바로 직전까지 위험에 탐닉함으로써 극도의 쾌락을 얻는 것이 에로티즘적 윤리라면- 철학답지 않은 철학, 정통적 흐름으로부터 이탈해 있는 철학, 경계의 철학, 변방의 철학, 외곽에 걸쳐있는 철학, 철학의 외연을 넓히는 철학, 사이비성을 의심케 하는 비주류 철학 따위에의 천착이야말로 철학 탐구에 있어서는 진정으로 에로틱한 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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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지 2016-07-29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해하는 철학도 이쪽 끝으로 갔다 저쪽 끝으로 갔다 중화시켰다 반발했다 하더라고요, 글 재밌게 읽고 갑니다-.

수양 2016-07-31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여러 부류가 있을텐데 성향 때문인지 저는 중화보단 반발 세력에 더 호감이 가네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