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지혜로운 철학자가 천명하였듯이 우리는 말 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해서는 침묵해야만 한다. 침묵은 어쩌면 최소한의 양심이나 예의 같은 게 아닐까. 삶에도 뼈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의 성분은 오로지 말할 수 없는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을 것이리라. 말이라는 것은 대저 얼마나 본질로부터 먼 곳에 있는가. 그것은 얼마나 남루하고 곤궁한가. 우리는 묵직한 짐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사막을 횡단하는 한 마리 낙타처럼 육중한 말들 속에 파묻혀 끝끝내 고독하리라. 무수한 말들은 모조리 실패할 운명이다. 세계의 모든 비밀은 말 속에서 더욱 더 견고하게 은폐될 것이므로. 말이 알리바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체념 속에서 한동안 아무 말도 못 쓰고 그냥 살았다. 무슨 말을 해도 그것은 결국 내 삶의 언저리에서 변죽만 울려댈 것이었다. 그러나 말문이 막혀버린 세헤라자데에게는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임을 이제는 알겠다.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결코 말해질 수 없는 것들 속에서 끊임없이 자맥질을 하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굴러 떨어질 바위를 열심히 밀어올리는 시지푸스처럼, 절망적이고도 힘차게 무슨 말이든 지껄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쓴다,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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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진화 - 2010 제17회 김준성문학상 수상작 문학과지성 시인선 362
이근화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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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한 계절에 한 번씩 두통이 오고 두 계절에 한 번씩 이를 뽑는 것
텅 빈 미소와 다정한 주름이 상관하는 내 인생!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나를 사랑한 개가 있고 나를 몰라보는 개가 있어
하얗게 비듬을 떨어뜨리며 먼저 죽어가는 개를 위해
뜨거운 수프를 끓이기, 안녕 겨울
푸른 별들이 꼬리를 흔들며 내게로 달려오고
그 별이 머리 위에 빛날 때 가방을 잃어버렸지
가방아 내 가방아 낡은 침대 옆에 책상 밑에
쭈글쭈글한 신생아처럼 다시 태어날 가방들
어깨가 기울어지도록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아직 건너보지 못한 교각들 아직 던져보지 못한 돌멩이들
아직도 취해 보지 못한 무수히 많은 자세로 새롭게 웃고 싶어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中에서 

 
   

시인은 자기 인생이 마음에 든다고 말하지만, 이 말이 마냥 명랑하게 들리지만은 않는다. "텅 빈 미소"와 "다정한 주름"과 "기울어진 어깨"로 선언하는 긍정이기에. 결코 쉽지 않은 긍정일 테다. 비감을 품었지만 그렇다고 자조적이지도 않은, 수굿한 자세로 담담하게 선언하는 이런 긍정이 어떻게 쉬울 수 있을까. 쉽지 않지만 나도 따라서 말해볼까. 나도 내 인생이 마음에 든다고. 늘어나는 체중과 변변찮은 통장 잔고와 못 갚은 이자처럼 불어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도 내 인생이 마음에 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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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6
프란츠 파농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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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흔히 악으로 규정된다. 박애정신과 시민의식을 갖춘 사람들은 비폭력 평화주의만이 갈등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도라고 말한다. 이런 와중에 폭력을 선동하는 무리들은 언제나 극단주의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경계와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모든 도덕 판단이 그러하듯 폭력이 악이라는 테제 역시 특정한 계보 속에서 산출된 명제일 뿐이다. 그리고 이 계보는 지극히 '정치적'이다. 폭력의 종류에도 여러 가지가 있으며, 그중에는 분명 ‘옹호해야 할 폭력’이 있다. 폭력이 악이라는 테제는 이런 폭력의 가치마저 폄하하고 부정하게 만든다. 

옹호해야 할 폭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억압받는 소수자가 행하는 폭력이다. 소수자가 저지르는 폭력은 강자가 자기 보존과 확장을 위해 수행하는 폭력과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강자의 폭력이 생명욕동에서 비롯하는 유기체적 성장의 수단이라면, 소수자의 그것은 온통 죽음욕동으로 들끓는 폭력이다. 소수자의 폭력은 목숨을 걸었으되 아무런 승산도 전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이다. 극한의 절망 속에서 분투하는, 처절한 자멸의 폭력인 것이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을 이끌었던 프란츠 파농은 착취당하는 원주민이 식민지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 극단적인 폭력투쟁 뿐이라고 강변한다. 그는 폭력의 행사가 다양한 부족의 원주민을 한 덩어리로 묶어주며, 각 개인의 의식에 공통의 대의와 민족의 운명, 집단의 역사 같은 관념들을 싹트게 한다고 말한다. 결집된 민중의 폭력을 식민지 해방을 위한 결정적 수단으로 여겼던 파농에게 비폭력 평화주의, 점진적 개혁, 지배국가와의 타협을 외치는 식민 치하의 민족주의 정당은 어디까지나 ‘자유를 누린다고 착각하는 노예계급’에 불과했다. 민족주의 정당은 겉으로는 평화를 부르짖으면서 실제로는 착취국의 정치 세력과 은밀하게 결탁하여 식민 체제를 영속화했기 때문이다. 

1961년 이 책의 서문을 쓴 사르트르는 알제리 독립전쟁 당시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을 지지했던 프랑스의 유일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식민 치하에서 착취당하는 소수자 계급의 극단적 폭력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을 재창조하는 과정이다. (...) 부드러움으로 폭력의 흔적을 지워버릴 수는 없다. 오직 폭력 자체만이 폭력을 부술 수 있는 것이다. 원주민은 무력으로 이주민을 몰아냄으로써 자신의 식민지 노이로제를 치료한다. 분노가 들끓을 때 그는 잃어버린 순수함을 되찾으며,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서 자신의 자아를 스스로 창조한다. (...) 반역의 무기는[즉, 폭력은] 그가 인간임을 증명하는 증거다. -p.36 <1961년판 서문 中에서>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알제리 원주민들이 보여준 극단적인 무력투쟁은 정당방위로서의 폭력도 아니고, 정당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폭력도 아니었다. 그들의 폭력은 도덕이나 정의의 범주를 초월한 영역에 있었다. 그들의 폭력은 ‘존재론적’이었다. 그들은 폭력을 통해 실존하는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인간은 궁지에 몰렸을 때 폭력적으로 돌변한다. 궁지에 몰린 인간이 보여주는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폭력, 그것은 일종의 자해다. 자해는 자기를 파괴하는 행동이지만, 한편으로는 죽음욕동의 분출 속에서 자기의 실존을 확인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실존하게 하는 폭력,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폭력, 자멸 속에서 생의 감각을 느끼는 데 소용되는 폭력. 과연 이러한 폭력을 ‘악’이라 규정할 수 있을까. 만약 이것이 '악'이라면, 자유와 평화와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이러한 '악'을 타도해야 한다고 호들갑을 떠는,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교묘한 정치적 제스처는 어떠한가. 그것이야말로 더 끔찍한 ‘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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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 케이블 채널 QTV에서 하는 '순정녀'라는 오락프로를 거의 한 회도 안 빼먹고 열광적으로 시청하고 있다. 이 프로에서는 매 회 열 명 남짓한 여자 연예인들이 대거 출연해서 서로 순위를 정한다. 그때그때 달라지는 순위의 기준은 대략 이런 식이다. 가장 가식적일 것 같은 여자, 가장 뒷담화 심할 것 같은 여자, 가장 남자를 밝힐 것 같은 여자 기타 등등. 순위를 정하는 과정은 언제나 흥미진진한데,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인신공격성 발언이 쉴새없이 터져나오기 때문이다.

최근 이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한 여자 연예인이 방송 도중 성희롱에 가까운 막말을 해서 인터넷이 잠깐 들썩였다. 사람들은 그녀가 내뱉은 원색적인 막말에 대해 비난을 쏟아부었고 그녀는 졸지에 인간 말종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그녀를 도덕의 잣대로 심판하기보다 차라리 그녀의 막말에 더없이 환호하는 편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좀 더 자연스러운 행동일 것 같다. 사실 비난했던 사람들 역시 이미 충분히 즐거움을 향유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방식으로 막말의 즐거움을 향유한 셈이다. 비난은 즐거움의 우회적 표현이다. 어쩌면 비열한 표현인지도 모른다.  

내가 이 프로를 좋아하는 까닭은 굉장히 잔인하기 때문이다. 이 프로는 고대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이루어졌던 검투사들의 경기를 연상케 한다.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피 튀기고 싸우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환호했던 당시의 로마 시민들과 오늘날 나를 비롯한 QTV 순정녀 시청자들의 궁극적 차이가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순정녀 출연자들은 매 회 방송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처참한 막말을 내뱉으며 만신창이가 된다. 우리는 그들의 공멸에 환호하고, 그들은 만신창이가 된 대가로 출연료를 지급받는다. 아마도 그 옛날 로마 콜로세움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 이긴 검투사들이 받았던 급료와 비슷한 수준일 것 같다. 방송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순정녀 출연자들은 언제나 씩씩하고 용감하다. 그들은 존재론적 비애마저도 쿨하게 헤쳐 나간다. 검투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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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 - 악에 대한 의식에 관한 에세이 동문선 현대신서 40
알랭 바디우 지음, 이종영 옮김 / 동문선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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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4. 진리들의 윤리학 

(...) 이 말의 뜻은 그의 존재의 모든 것, 그의 몸, 그의 능력들이 어떤 주어진 시점에서 진리가 자신의 길을 펼치는 데 사용된다는 것이다. 바로 그때 인간 동물은 불사적 존재가 되도록 독촉을 받는다. 그러한 ‘정황들’이란 어떠한 것인가? 진리의 정황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지금 주어진 것(다양성들, 무한한 차이들, ‘객관적’ 상황들: 예컨대 사랑의 만남 이전의 타인과의 관계에서의 평범한 상태)으로는 그러한 정황을 규정할 수 없다는 점은 명백하다. 그러한 객관성의 유형 속에서 동물은 보편적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껏 헤쳐 나갈 뿐이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가정해야 한다. 주체를 구성하도록 소환하는 것은 잉여의 것이라는 것, 또는 상황에 도래하는 것이지만 그 상황이, 그리고 그 속에서의 일상적 행동 방식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동물을 뛰어넘는(그렇지만 동물이 그 유일한 담지자인) 주체는 무엇인가가 일어났기를, ‘이미 주어진 것’ 속의 그 일상적 기입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일어났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 잉여적 부가물을 사건이라고 부르자. 그리고 진리가 문제삼아지지 않는(오로지 의견만이 문제삼아지는) 다양태적 존재를 사건과 구분하자.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 방식을 결정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건들은 명백히 입증되는 것이다. 

충실성 (...) 그렇다면 진리의 과정은 어떤 ‘결정’으로부터 유래하는가? 이제부터 사건적인 잉여적 부가물의 관점에서 상황에 관계하려는 결정으로부터이다. 이를 충실성이라고 부르자. 사건에 충실하다는 것은, 이 사건이 잉여적으로 부가되는 상황 속에서 움직이면서 사건‘에 따라’ 상황을 사고한다는 것이다. [사건 그 자체의 정언명령(계속하라!)하에서 상황에 대한 지속적 탐구] 물론 이것은 상황 속에서의 새로운 존재 방식과 행동 방식을 발명하도록 구속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사건은 상황의 모든 정규적 법칙들 밖에 위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사건적 충실성은 사건이 발생한 고유한 질서(정치적, 사랑의, 예술적, 과학적) 속에서의 (사고되고 실천되는) 실질적인 단절이다. 

진리 우리는 한 사건에 대한 충실성의 실재적 과정을 ‘진리’(하나의 진리)라고 부른다. 그 충실성이 상황 속에서 생산되는 것이 바로 진리이다. (...) 근본적으로 하나의 진리란, 사건적 잉여 부가가 상황 속에서 긋는 물질적 궤적이다. 따라서 진리는 내재적 단절이다. ‘내재적’이라는 것은, 하나의 진리는 결코 다른 어떤 곳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 전개되기 때문이다. (...) 진리에 충실한 과정들은 매번 새롭게 발명되는 내재적 단절들이다. (...) 하나의 진리는 지식들[선재하는 상황 속에서 순환하는 지식들]에 구멍을 낸다. 진리는 지식들에 대해 이질적이다. 그러나 진리는 또한 새로운 지식들의 유일한 원천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진리가 [새로운] 지식을 촉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 (...) 진리의 힘은 단절의 힘이므로 진리는 기존의 유통되는 지식들에 폭력을 가하면서 상황의 직접성으로 회귀하고, 의견과 의사 소통과 사회성에 자원을 공급하는 그러한 일종의 휴대용 백과사전을 재편한다는 것이다. (...) [진리의 효과는] 지식의 촉성, 의사 소통 코드들의 확장된 수정.

주체 우리는 충실성의 담지자, 즉 진리의 과정의 담지자를 ‘주체’라고 부른다. 따라서 주체는 결코 과정에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 주체는 사건이 생기기 ‘이전의’ 상황 속에서는 절대적으로 부재한다. 우리는 진리의 과정이 주체를 도출시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우리가 말하는 주체는 어떠한 ‘자연적’ 선재성도 갖지 않는다. (...) 주체들은 진리의 과정의 국지적인 지점이며, [진리의 과정에서 생성되는] 특수하고 비교 불가능한 도출물이다.  

(...) 진리의 과정에 담지자적 지점으로서 속한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 속에 포착된 ‘어떤 자’는 그 자신,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다양태적 개별성이면서, 동시에 그 자신에 대한 초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충실성의 우발적 궤적은 그를 거쳐 지나가고, 그의 개별적 몸을 통과하며, 그를 시간의 내부에서부터 영원성의 순간에 기입시키기 때문이다. (...) 이 모든 것은 진리의 과정의 내재적 단절 속에 포획된다. 그리하여 자기의 고유한 상황(정치적, 과학적, 예술적, 애정적)과 생성하는 진리에 동시에 속하는 ‘어떤 자’는, 그 자신이기도 한 이 알려진 다양성을 관통하여 ‘통과하는’ 이 진리에 의해 내적으로-그러나 알아차리지 못한 채- 단절되거나 구멍난다. 

사건 상황, 의견 및 제도화된 지식과는 '다른 것'을 도래시키는 것이다. 우연적이며 예측 불가능하고 나타나자마자 사라지는 잉여적 부가물이다. (...) 사건들이란 환원 불가능한 개별성들이며, 상황들의 ‘법에 대한 외재성’이다. (...) 사건은 상황[=기존의 지식들의 순환에 의해 구성되는 선재하는 상황]에 의해 알려지지 않은 것을 명명하면서 공백을 명명한다.  

진리의 윤리학 분열을 피한다고 주장하는 합의적 윤리와는 달리 진리의 윤리학은 항상 어느 정도 투쟁적, 전투적이다. 왜냐하면 의견들과 기존 지식들에 대한 그 이질성은 중단, 부패, 인간 동물의 직접적 이해 관심으로의 회귀, 주체에게 도래하는 불사의 존재에 대한 억압 등을 위한 모든 종류의 시도들에 대항하는 투쟁 속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 진정한 주체적 충실성의 적은 바로 닫혀진 집합, 실체, 공동체이다. 우리가 진리와 그 보편적 호소의 우연한 궤적을 부각시켜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관성에 대항해서이다.  

 

5. 악의 문제 

(...) '선'이라는 말로 어떤 자가 진리의 주체의 구성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면, 선이란 바로 삶의 계속되는 교란의 내적 규범이다. (...) [관건은, 진리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로잡힘의 유쾌하고 열광적인 자명성을 뛰어넘어, 과연 그리고 어떻게 내가 그처럼 일차적으로 교란된 것[구멍의 발견, 사건]에 이차적인 역설적 질서[스스로를 알고 있는 어떤 자의 법칙, 자신의 끈질김을 그 끈질김을 파괴하고 교란시키는 것 속에 개입시키는 방식]를 부여하면서, 즉 우리가 '윤리적 일관성'이라고 명명한 것을 부여하면서 삶의 교란의 길을 계속 걸어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 악은 선과의 만남에 의해서 열려지는 [=선이 전개되는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즉 진리 과정 속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다. (...) [진리의 발생 과정에서 일어나는 세 가지 악의 가능성으로는]  

(1)사건이 공백을 호출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적 상황의 충만성을 호출하는 경우 ['진리의 실재적 과정'으로부터 도용된 이름들이 '사라진 사건과 관련한 흔적'을 호명하는 것이 아니라, 선재하는 상황의 충만성을 호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상황의 재편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상황의 강화를 몰고 오는 경우. 이 경우에는 공백을 추방해버리는 부작용, 즉 상황의 '주위'에 공백을 만들어 버리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그러나 추방된 공백은 회귀한다. 억압된 욕망이 반드시 돌아오는 것처럼.]  

(2) 충실성이 쇠퇴하는 경우 [진리의 과정은 내재적 단절의 과정이다. 이러한 단절과 다시 단절하게 되는 것(충실성의 쇠퇴, 주체성의 배반)은 기존의 상황과 의견들의 연속성을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러한 '단절과의 단절' 이후 '계속하시오!'라는 정언명령의 수행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사건에의 충실성'을 '기존의 상황과 의견들의 연속성'을 위해 '양보'해버린다면, 이 또한 '용기 없음'에서 비롯하는 '악'이다.]   

(3) 하나의 진리를 전능한 힘으로 간주할 경우 [진리의 과정은 모든 지식을 관통하듯 기존의 상황과 의견들의 언어를 관통한다. 그런데 진리에 절대적 권한을 부여해서 기존의 의견을 변형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의견들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경우, 그리하여 의견들이 진리에 의해 완전히 대체되는 상황을 전망할 경우, 그 결과는 언제나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진리는 자신이 도출시키는 주체들의 구성 속에 '어떤 자'의 지속성을, 진리에 포획된 인간 동물의 이중적인 활동(단절과 지속)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전제 없이, 진리들의 전능한 힘을 설정해버리면, 그 진리들을 담지하는 공간(?)은 황폐화되고 만다.]  

(...) 진리가 전능한 힘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이 종국적으로 뜻하는 바는, 진리 과정의 생산물인 주체적 언어가 상황의 모든 요소들을 명명할 수 있는 권력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리적 명명이 행해질 수 없는 적어도 하나의 실제적 요소가, 상황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다양성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한 요소는 오직 의견에만, 상황의 언어에만 주어져 있는 것이다. 진리가 촉성할 수 없는 지점이 그곳이다.

나에게도 ‘도래하는 사건’이랄 만한 게 있다면, 현재로서는 그나마 독서의 체험만이 유일한 듯하다. 드물게 만나는, 나를 교란시키는 책들만이 나를 사건의 주체로 만들어주는 유일한 장소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적고 나면 퍽 우스워지는데, 나의 독서 활동이란 건 냉정히 말해서, 정신적으로 말라비틀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종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윤리적 일관성'이 없다. 아무래도 나는 그다지 사건에 충실한 주체는 못 되는 모양이다. 열량이 높은 이런 책을 읽으면, 마치 거대한 한 자락의 파도에 온몸이 잠시 들려 올려졌다가 내려오는 기분이다. 해표면을 부유하는 작고 가벼운 티끌의 운동처럼. 그러니까 나라는 것은, 사유의 여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 그런 미미한 현상의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 이 책은 시집만큼 얇다. 마음에 드는 챕터는 전문을 베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시를 베끼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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