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 이영주
 
쪽문 옆에서 언니는 잠이 든다. 저녁이면 마당에서 펄럭이는 셔츠의 한쪽 소매를 만지던 언니. 동생은 더러워진 빨래에 대해 단 한 번도 말하지 않는다. 하늘을 날지 않는 새들은 동작을 멈출 줄 아는 도롱뇽 같아. 끝에 닿기 전에 한 번쯤 정지하는 일 말야. 언니는 동물도감을 펼치고 도롱뇽 꼬리를 부엌칼로 잘라 낸다. 쪽문을 드나들다 키가 큰 언니는 매일 밤 흰 목을 구부린다. 난간에 걸친 달이 몸속에 뼈를 세울 때마다 언니는 어깨가 아프다. 그를 찾아가도 될까? 이제 더 이상 손발이 자라지 않으므로 언니는 밤마다 짐을 꾸린다. 오늘의 달은 구겨진 흰 셔츠처럼 마당에 떨어진다. 쪽문을 떠나기 위해 언니는 립스틱을 바르고 깊은 잠 속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묵을 곳은 분화구밖에 없어. 달의 도면을 펼치고 도롱뇽이 분화구 안으로 기어 들어간다.   

1 내가 골룸 같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음습한 동굴 속으로 기어 들어가 반짝이는 절대반지를 움켜쥐고 아무도 모르게 혼자만 있고 싶던 마음일 때, 어둡고 따듯한 골방에 숨어들어 모든 촉수를 내부로 말아넣고 온종일 웅크린 채 지내고픈 마음이었을 때, 나는 스스로 즐거이 유배 당하고 싶었다. 꼬리를 떨쳐버리고 분화구 안으로 들어간 언니, 언니도 나와 같았을까. 

2 하늘을 날지 않는 새들은 의젓하다. 살기 위해 자신의 일부를 베어낸 도롱뇽처럼, 더러워진 빨래에 대해 아무 말 없는 동생처럼, 단념할 줄 아는 짐승들은 모두 의젓하다. 그것은 슬픔을 견디는 고귀한 방식이다.

3 마당에서 펄럭이는 셔츠는 난간에 걸친 달처럼 닿을 수 없이 찬란했겠다. 그러나 셔츠는 언니에게 고작 한쪽 소매 정도만을 허락할 뿐이다. 그마저도 오늘은, 달조차 "구겨진 흰 셔츠처럼 마당에 떨어"지고 마는, 그런  날이 아니던가. 그리하여 살기 위해 단념했을 때, 단념하고 도롱뇽처럼 제 몸뚱이 일부를 잘라 삶에게 내어주었 때, 언니는 이제 더 이상 “손발이 자라지 않는” 의젓한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된 언니가 곱게 단장하고 길 떠나는 곳은 "깊은 잠 속"이다. 그리고 깊은 잠 속에 도착해 여장을 풀 곳은 "분화구"다. 분화구는 뜨거운 내부이자, 안에서 바깥을 향해 최초로 그 뜨거움을 터뜨리는 입구이다. 분화구는 자폐적인 공간이지만, 동시에 분출을 위해 마련된 공간이기도 하다. 언니는 그곳에서 "첫사랑"인지도 모를 "그"을 만나 시를 쓰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쓰여진 것들이 모여 한 권의 시집이 되었을 것이다.  

4 이 시는 아마도 시인이 발표 후에 약간 손을 본 듯하다. <2007 올해의 좋은 시>(현대문학, 2007)에 실려 있는 것과는 몇몇 구절이 다르다. 나도, 바뀐 시가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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