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의 집
김남주 지음 / 그책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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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위화감을 조성한다느니 가진 자의 삶을 전시한다느니 투덜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사실 우리는 바로 그 위화감을 느끼기 위해서 이 책을 집어든 것이니까 말이다. 위장이 고생할 줄 알면서도 매운 음식을 찾는 사람들처럼. 그리고 그걸 또 울면서 먹는 사람들처럼. 차라리 이 책에서는 김남주가 '뭘 샀는지' 보다는 '어떻게 샀는지'를 눈여겨보는 게 낫겠다. 어차피 그녀가 구입한 고가의 물건을 우리도 똑같이 장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리고 구태여 그럴 필요도 없으니까. 평소 꾸준한 관심을 기울여 충분한 안목을 쌓은 뒤에 시간과 비용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최적의 물건을 장만하는 수집가형 소비 자세만큼은 배워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여배우는 마음에 든 물건을 참으로 끈기와 인내와 정성을 다 바쳐 구입하고 있으며, 그런 자신의 모습에 대해 몹시 긍지를 느끼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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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깊이 읽기 왕실문화 기획총서 3
김동욱.유홍준 외 지음, 국립고궁박물관 엮음 / 글항아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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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여덟 번 째 꼭지 <조선의 서울 자리를 겨루다>에서 글쓴이는 조선시대의 풍수를 ‘문화적 코드’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문화적 코드란,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규약 체계라고 할 수도 있고, 인식론적 프레임 혹은 사유 체계의 토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글쓴이가 소개하고 있는 것이 조선의 지방 고을의 산세를 그려놓은 18~19세기 무렵의 고지도들이다. 모든 고을이 하나같이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잘 갖추어진 전형적인 ‘명당’풍으로 그려져 있지만, 흥미롭게도 이들의 실제 지형은 오늘날 우리가 아무리 풍수학적 관점을 고려하여 살펴본다 하더라도 그다지 명당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한다. 현재의 지도 읽기 잣대로 평가하면 조선 시대의 지도들은 현실을 상당 부분 왜곡한 부정확한 지도라는 것이다.

 

현대인의 인식 능력으로는 도무지 연관성을 찾을 수 없는 노릇이지만, 조선시대 사람들은 전국의 모든 산세에서 즉각적으로 왼쪽과 같은 식의 패턴을 발견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렌즈를 착용하고 자연세계를 바라봤으며, 그들만의 인식론적 프레임 속에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인식할 수 없는 것들을 인식했다. 고지도는 바로 그 정직한 인식의 기록인 셈이다. (왼쪽은 이 책 375쪽에 실린, 1872년경의 석성현을 그린 지방도)

 

조선 건국 당시 풍수는 수도를 결정하는 데 주요한 코드로 작용한다. 글쓴이는 이때의 풍수가 “본질론적 차원의 절대적 명당을 전제하는 풍수라기보다는 장소 의미를 구성하는 담론으로 작용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볼 수 있겠다. 서울의 풍수가 ‘절대적으로 명당’이어서 수도로 확정된 게 아니라, 다양한 권력 의지들이 풍수 담론의 언표들을 둘러쓰고 수면 위로 부상하여 엎치락뒤치락한 결과 최종적으로 서울이 수도로 확정된 거라고. 무정형으로 부글대던 권력 의지들이 풍수 담론을 통해서 비로소 의미작용이 가능하게 언어화되어 풍수의 이름 아래 경합하게 되었다고. 하나의 ‘언어’로서의 풍수. 하나의 ‘게임 룰’로서의 풍수. ‘때마침’ 풍수였지, ‘반드시’ 풍수일 필요는 없었던 셈이다. 의미를 관철하기 위해 풍수는 (소통의) 수단으로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풍수는 언제부터 미신이 되었을까. '풍수학자'는 언제부터 더 이상 '지리학자'가 아니게 되었던 걸까. 우리는 언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풍수를 버리고 풍수 아닌 다른 인식의 프레임으로 갈아타게 되었을까. 언제부터 새로운 언어게임을 시작하게 되었을까. 그 환승의 지점은 어디쯤이며,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 과정 속에서, 어떤 사건의 펼쳐짐 속에서 그러한 이행이 이루어지게 된 것일까. 새로운 프레임은 세계를 어떻게 재편했고, 그 구체적 동역학은 어떠했을까.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한국인의 지리적 공간적 사유에 있어서의 역사적 단절의 지점 및 그 계면에서 발생했을 사태들에 관해서 기회가 닿으면 좀 더 찾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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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규방문화
허동화 지음 / 현암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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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규방공예 작품집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갖가지 진귀한 조각보와 자수 작품들이 알차게 실려있다. 책장에 꽂아놓고 두고두고 볼 만 하다. 아래는 책에서 발견한 100퍼센트의 보자기. 무심한 듯하면서도 교묘한 사선의 파격이 전체를 일순 긴장시킨다. 공손하면서도 세련된 위트! 이런 앙큼한 보자기를 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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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상류 주택의 내부 공간과 가구 우리 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19
최상헌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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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상류 주택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탐나는, 그래서 언젠가 꼭 흉내내보고 싶은 공간으로 사당과 사랑방을 꼽을 수 있겠다. 조상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사당은, 자기성찰의 시간을 보내거나 명상수행을 하는 내향적 공간으로 혹은 저마다의 신께 기도드리는 영성적 공간으로 방 한 구석에 조그마한 자리를 마련해서 응용해볼 수 있겠다. 책 읽고 글 쓰고 때로는 친구 불러 차나 술 마시며 장기와 바둑을 두기도 했다던, “한 시대의 문화와 사회생활의 척도이자 주인의 교양과 안목, 지식, 가풍과 전통 그리고 재력을 보여주는 곳”이었던 사랑방도 거실에 흉물스런 텔레비전만 치우면 오늘날 얼마든지 복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에는 페이지마다 주택 내부 모습과 갖가지 고가구들 사진이 두루 실려 있는데, 볼수록 참, 곱기도 하다. 어찌나 담백하고 정갈하고 기품이 있는지 요즘 유행이라는 북유럽 인테리어가 다 무어냐 싶다. 고가구야말로 가구 중에 가구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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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소심한 사도마조히스트들의 사랑이야기'라는 설정은 좋았는데 그걸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는 박찬욱 감독의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이하 사이보그)가 한 수 위인 거 같다. <세크리터리>에서는 어디까지나 '그들'의 sm을 보여주는 거 같다. 낯설고 신기하고 특이한데 어쨌든 그들의 이야기인 거다. 영화를 보면서 '아, 나도 지금 저 장면 속으로 들어가서 sm에 동참하고 싶다' 이런 생각은 안 들거든. 근데 <사이보그>는 애초에 영화 자체가 그들의 시선, 그들의 관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잖아. 그래서 울고 웃으며 영화를 보고 나면 어느새 나도 자연스럽게 그들이 되어 있는 거지. <사이보그>와 <세크리터리>의 차이는 마치 동물원에 가서 우리에 갇힌 동물을 보는 거랑 사파리차 타고 여행하는 거랑의 차이랄까. 난 개인적으로,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사조마조히스트 커플의 본격적인 sm'을 다룬 이 영화 후속편이 나왔으면 좋겠다. <사이보그> 스타일로. (...) 나는 이 영화가 러닝타임을 좀 더 길게 잡아서 주인공들의 내면 깊은 곳까지 섬세하게 비춰줬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든다. 아니면 완전 <사이보그> 식으로 철저히 그들의 관점에서 이야길 풀어나가든가.
 

B: 난 <사이보그>보다 이 영화가 더 좋았는데. 난 <사이보그>가 더 타자적인 영화 같아. 난 사이보그 주인공들이 특이해 보였거든. 근데 이 영화 주인공은 특이해 보이지 않아. 난 등장인물이 특이해 보이면 그 작품은 어느 정도 실패한 거 같아.

 

A: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예를 들어 우리한테 정말 낯설고 특이한 대상이 있는데, 영화에서 그걸 너무나 자연스럽고 친숙한 방식으로 보여준다면, 그건 다시 말해 그들을 우리의 방식으로 쉽게 절단하고 재단하고 난도질해서, 그러니까 우리의 프레임 속에 딱 맞춰서, 통조림처럼 만들어서 팔아먹는 거랑 다를 바 없다고 봐. 그런 식으로 우리는 그들을 함부로 이해해버리고, 그렇게 이해했다는 것에 대해 쉽게 카타르시스를 느끼지만 사실 우리가 그들을 이해한 건 굉장히 나이브한 방식인 거다. 불편함과 낯섦, 그로 인한 고통의 과정이 없는 타자 이해는 기만이 아닐까. <사이보그>가 좋았던 건 그 영화가 철저히 그들의 시선으로 영화를 진행해나감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당혹감과 낯섦을 체험케 하면서도 그것이 단절감이나 불안, 공포, 거부로 이어지지 않고 즐거움, 유쾌함, 함께 어울려보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관객을 유도한다는 점이다. 타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나는 박찬욱 식 태도를 굉장히 존경하고 지지해.

 

B: 난 그 영화 보고나서 별로 유쾌하거나 어울려보고 싶지 않았어. 오히려 통조림화는 박찬욱 쪽이 더 심하고 노골적이었던 거 같아. 감독은 마치 '자 봐봐, 이렇게 특이한 애들이 있어'라고 말하는 거 같았어. 그래서 난 그 영화 보고 나서 박찬욱 감독의 모든 작품에 더 이상 기대를 안 하게 되었어. 난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 영화를 볼 당시 (사회로부터) 매우 특이한 아이 취급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 영화가 불쾌하게 느껴졌던 것 같아.

 

A: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sm에 심취한 사람이 <세크리터리>를 봤다면 그 사람한테는 <세크리터리>가 굉장히 불편한 영화일 수 있지 않을까. 너님이 <사이보그> 보고 기분 나빴던 거처럼. '자 봐봐, 이렇게 특이한 애들이 있어.' 이렇게 말하는 건 <세크리터리>도 마찬가지지. 그런데 <사이보그>는 특이한 애들을 특이한 애들의 프레임으로, 특이한 애들의 언어로 보여주니까 낯설게 보이는 거지. 하지만 <세크리터리>는 특이한 애들을 우리들의 언어로 보여주니까 안 특이해 보이는 거고.

 

B: 난 그 특이하다는 표현 자체가 뭐랄까. 소외의 도구라는 생각이 든다.

 

A: 나도 특이하다는 표현은 야만적이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지양되어야 할 표현이라고 보지만, 특이하다거나 야만적이라는 표현 자체가 우리의 현재 정치적 위치나 수용의 한계, 인식의 마지노선 등을 적실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식적으로(자신이 언제 어디에 어떤 곳에 그 단어를 쓰는지를 의식하면서) 써볼 만한 단어라고 본다. 그런데 너님한테 <사이보그>가 불쾌했던 건 너님은 <사이보그> 주인공들에게 동질감을 느꼈는데 감독이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뭔가 희화화시키는 거 같았다는 뜻이니?

 

B: 아니. 캐릭터에 동질감을 느끼지도 않았고 감독 입장도 전혀 이해가 안 되었어. 나는 사이보그가 기분 나빴어.

 

A: 나는 사이보그 완전 좋았는데 ㅜ.ㅜ 박찬욱 감독 영화 중 쵝오라고 생각했는데. ㅜ,ㅜ (그런데 너님은 <사이보그>가 더 통조림 같다고 했지?) 그렇다면 넌 사이보그에서 임수정 캐릭터가 더 통조림 같다는 거니? 나는 세크리터리 여주인공이 더 통조림 같은데. 더 전형적이고. 세크리터리 여주인공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전형화된 캐릭터잖아. 마음에 상처를 가지고 있고, 그게 치유가 안 되서 자기 스스로를 해하는 그런 전형적인 서사를 가진 캐릭터잖아.

 

B: 캐릭터 자체로는 통조림성을 논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캐릭터를 바라보는 시선도 중요하지 않을까.

 

A: 그렇다면 감독의 시선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나는 <세크리터리>가 더 철저히 타자적이었다고 생각해. 감독은 별로 노력하지 않았어. 자기가 만들어낸 캐릭터의 내면에 좀 더 깊이 들어가지 않았어. 특히 변호사의 내면에 대해서.

 

B: 음. 난 그 부분에 대해서도 반대로 느꼈는데...ㅠ_ㅠ

 

A: 이해하는 척만 하고... 차라리 그렇게 나이브한 태도로 이해할 거면 아예 이해하려는 기만적 제스처 자체를 거두고 철저히 그들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던지. 이해라는 단어도 사실 특이하다거나 야만적이라는 말하고 비슷하게 관점주의적인 단어인 거 같아. 뭘 이해할 수 있다는 거지? 어떻게? 누가 누구를 감히? 내가 보기에 <세크리터리>는 어설프게라도 이해하려는 스타일(그러나 나는 이런 거 자체가 그야말로 어설픈 기만인 거 같아.)이고 사이보그는 아예 이해하려고 안 하는 스타일, 아니 이해의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스타일인 거 같아.

 

B: 나는 좀 달리 생각하는 게 이해의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건 굉장히 위험한 행위 같아. 정치적으로 극우적인 태도랄까. 난 우리가 서로 다르기보다는, 닮거나 비슷한 점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하고, 영화도 그런 면을 강조하는 영화를 선호해. (예를 들어) 왜 내가 너님을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되지? 물론 내가 너님을 이해했다고 말하는 건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해했다고 한다고 말하는 건 기만이지만, 이해하려고 하는 태도 자체는 기만이 아니지.

 

A: 그것은 기만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이해하려는 자신의 정의로운 태도 자체에 쉽게 자기만족 하는 거는 기만이겠지. 그런데 너님이 <사이보그> 보고 기분이 나빴다면 그건 어쩌면 너님이 그들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은 때문 아닐까. 나는 관객들이 빠지기 쉬운 그런 타성을 지적해주는 영화, 그런 타성으로부터 관객들을 구출해주는 영화가 좋아. 나는 <세크리터리>처럼 낯선 걸 친숙하게 보여주는 영화보다는, <사이보그>처럼 낯선 걸 낯설게 보여주는 영화가 더 좋아. 낯선 걸 낯선 방식으로 보여줌으로써 당혹과 불편 속에서 그것을 이해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게 해주는 영화. 관객들로 하여금 좀 더 스스로 적극적으로 운동하게 해주는 영화. 그래서 결과적으로 낯선 세계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세계를 낯설게 보도록 해주는 영화가 좋아.

 

B: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나는 우리가 충분히 낯선 걸 낯설게 보고 있다고 생각해. 난 우리가 근본적인 부분에서 생각하는 관점이 다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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