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관계는 없다 - 성적 차이에 관한 라캉주의적 탐구 바리에테 3
브루스 핑크 외 지음, 신형철 외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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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은 왜 “성적 관계 같은 그런 것은 없다”고 선언하는가. 그 의미는 무엇인가. 우선 라캉이 거세, 남근, 그리고 남근 기능 등을 통해 결여로부터 개시되는 욕망의 순환을 말하고자 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생물학적 성 구분을 부정하면서, 존재의 결여의 기표이자 욕망의 순환의 최초의 개시자가 되는 바로 이 남근을 둘러싸고 각각의 주체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남성적인 범주(가)와 여성적인 범주(나)를 새롭게 구분한다. 상징적 질서에 안착해 있는 분열된 주체로서의 이들 각각의 모습은 각자가 상이한 층위에서 기표와 맺는 서로 다른 관계 방식들에서 기원한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타자가 빗금 쳐진 타자(A)와 대상a로 분리된다고 할 때,

 

(가) '남자'로 범주화되는 이들에게 있어서 타자(기표로서의 타자, A)는 이미 확고하게 들어앉혀져 있다. 따라서 남자의 문제는 대상(a)와의 문제이며, 남자는 대상(a)와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주체화된다. 즉, 남자들의 경우 기표에는 이미 확실하게 순응되어 있으니 기표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와 관계 맺는 것이 관건이다. 가령 아래 시에서 시적 화자의 태도를 보자. 이들은 꽃 혹은 오렌지라는 기표 자체에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이들은 대상을 꽃으로 혹은 오렌지로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있다. 시적 화자는 이미 기표에 철저히 종속된 상태에서 물 자체로서의 대상에 육박해 들어간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明)의 어둠에 /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 나는 한밤 내 운다. //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 탑을 흔들다가 /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김춘수, <꽃을 위한 서시> 전문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 더도 덜도 아닌 오렌지다. /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 마음만 낸다면 나는 /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 있다. / 마땅히 그런 오렌지 / 만이 문제가 된다. // 마음만 낸다면 나도 /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 있다. / 마땅히 그런 오렌지 / 만이 문제가 된다. //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 대는 순간 /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신동집, <오렌지> 부분

 

이들은 기표(형식)에는 종속되어 있으나 정작 기표의 내용(의미)으로부터는 소외되어 있다. 한마디로 영원히 껍데기밖에 모르는 상태이고, 그래서 늘 대상(a)와의 거리감 때문에 괴롭고, 얼굴을 가리운 신부의 실체를 의심하면서 한밤 내 울 수밖에 없다. 

 

(나) 사실은 결코 (나)라는 하나의 범주로 유형화시킬 수 없는 것이 이들 부류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일단은 언어를 가지고 의미를 전달 해야 하니 불가피하게 (나)라고 해보자. '여자'로 범주화되는 (나)들에게 있어서 타자(기표로서의 A)는 애당초 그 자체로 완전하게 들어앉혀져 있지도 않다. 따라서 여자에게는 타자를 주체화하고 그것을 그녀 자신 안에 구성하는 것이 관건이다. 즉, 여자는 타자(A)와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주체화된다. 가령 아래 시에서의 시적 화자들의 태도를 보자. 시에서와 같이 ‘여자’로 범주화되는 이들이란, '그렇게 불리고 싶으면 불러드리지' 혹은 '그렇게 부르고 싶으면 그렇게 부르시던지'라고 말하는 유형의 인간들이다. 기표에 종속되지 않고 오히려 기표를 비웃어버리는 인간들.

 

멋대로 하세요 / 나는 당신 것이예요 / 옷을 벗기시든지 / 주무르시든지 /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 그러나 사랑하진 말아요 / 밑지는 건 당신이기 때문에 / 당신을 위해 그것만은 안 되겠네요 / 심각한 척도 마세요 / 그냥 우리 편하게 지내요 / 자, 가까이 오세요 / 아니, 가까이 오시든지 마시든지 / 마음대로 하세요 / 당신의 욕망 앞에 나는 / 순진한 창녀예요 / 즐거움도 아픔도 모두 껴안는 / 그런 작은 구멍이예요 / 멋대로하세요, 당신 /나는 나의 것도 너의 것도 / 그의 것도 아무 것도 아니예요.  -홍영철, <시간의 구멍> 전문

 

이제부터 세상의 모든 남자들을 / 모두 오빠라 부르기로 했다. // (...) // 오빠! / 이 자지러질 듯 상큼하고 든든한 이름을 / 이제 모든 남자를 향해 / 다정히 불러주기로 했다. // 오빠라는 말로 한 방 먹이면 / 어느 남자인들 가벼이 무너지지 않으리 / 꽃이 되지 않으리 // 모처럼 물안개 걷혀 / 길도 하늘도 보이기 시작한 / 불혹의 기념으로 / 세상의 남자들은 / 이제 모두 나의 오빠가 되었다. // (...) // 오빠로 불리워지고 싶어 안달이던 / 그 마음을 / 어찌 나물 캐듯 캐내어 주지 않을 수 있으랴 // 오빠! 이렇게 불러주고 나면 / 세상엔 모든 짐승이 사라지고 / 헐떡임이 사라지고 // 오히려 두둑한 지갑을 송두리째 들고 와 / 비단구두 사 주고 싶어 가슴 설레이는 / 오빠들이 사방에 있음을 / 나 이제 용케도 알아 버렸다.  -문정희, <오빠> 부분

 

위의 두 시만 보면 (나)들은 일견 교활하기만 한 것 같지만 실상 이들은 기표를 비웃어버릴 수 있을 만큼 기표와 일체감을 못 느끼고 있기 때문에, 기표와의 관계가 느슨하기 때문에, 오히려 바로 그 점 때문에 고통 받기도 한다. 아래 인용한 최정례의 시는 물질만능 사회로 대변되는 타자(A)와 나의 관계 맺기가 실패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을 노래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이미 물질사회의 혜택을 한껏 누리고 있으면서도, 그래서 결코 물질사회를 떠나지 못할 것이면서도, 그럼에도 이렇게 자꾸만 부정의 심리를 표출한다.  

 

그러니, 제발 날 놓아줘, /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거든, 그러니 제발, // 저지방 우유, 고등어, 클리넥스, 고무장갑을 싣고 / 트렁크를 꽝 내리닫는데...... / 부드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플리즈 릴리즈 미가 흘러나오네 / 건너편에 세워둔 차 안에서 개 한 마리 차창을 긁으며 울부짖네 // 이 나라는 다알리아가 쟁반만 해, 벚꽃도 주먹만 해 / 지지도 않고 / 한 달이고 두 달이고 피어만 있다고 / 은영이가 전화했을 때 // 느닷없이 옆 차가 다가와 내 차를 쾅 박네 / 운전수가 튀어나와 / 아줌마, 내가 이렇게 돌고 있는데 / 거기서 튀어나오면 어떻게 해 / 그래도 노래는 멈출 줄을 모르네 // 쇼핑 카트를 반환하러 간 사람, 동전을 뺀다고 가서는 오지를 않네 / 은영이는 전화를 끊지를 않네 // 내가 도는데 아저씨가 갑자기 핸들을 꺾었잖아요 / 듣지도 않고 남자는 재빨리 흰 스프레이를 꺼내 / 바닥에 죽죽죽 금을 긋네 // 십 분이 지나고 이십 분이 지나도 쇼핑센터를 빠져나가는 차들 / 스피커에선 또 그 노래 / 이런 삶은 낭비야, 이건 죄악이야, / 날 놓아줘, 부탁해, 제발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날 놓아줘 // 그 나물에 그 밥 / 쟁반만 한 다알리아에 주먹만 한 벚꽃 / 그 노래에 그 타령 / 지난번에도 산 것을 또 사서 실었네 // 옆 차가 내 차를 박았단 말이야 소리쳐도 / 은영이는 전화를 끊지를 않네 / 훌쩍이면서 / 여기는 블루베리가 공짜야 공원에 가면 / 바께쓰로 하나 가득 따 담을 수 있어 / 블루베리 힐에 놀러가서 블루베리 케잌을 만들자구 // 플리즈 릴리즈 미, 널 더 이상 사랑하지 않거든 / 그녀의 입술을 따스하고 당신의 것은 차거든 / 그러니 제발, 날 놔줘,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놓아달란 말이야  -최정례, <그녀의 입술을 따스하고 당신의 것은 차거든> 전문

    

기표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보면, 타자A와 관계 맺는 방식이 똑같이 느슨하다는 점에서 여우 같은 여자나 곰 같은 여자나 결국은 한통속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정희의 시 <오빠>의 화자는 오빠라는 기표를 비웃고 있지만, 실상은 바로 그 비웃는 방식으로 오빠와 계속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체제의 유지에 기여하는 반체제 운동처럼. 매일 맞고 살면서도 결코 이혼하지 못하는 여자, 담배를 끊는다고 하면서도 절대 끊지 못하는 학생,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면서 여당과 놀아나는 야당 세력 등이 모두 (나)로 범주화될 수 있을 것이다.

 

기표와 관계 맺는 방식의 특성상 (가)유형이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신하는 주체가 된다면, (나)유형은 끊임없이 아니오를 연발하며 변덕을 부리는 히스테리 주체가 된다. (가)의 유형이 대상(a)으로부터 소외된다면, (나)의 유형들은 내용은 이미 누리고 있으면서도 정작 기표(A)와의 관계 맺기에는 난항을 겪고 있기 때문에, 혹은 완곡하면서도 교묘하게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기표(A)로부터 소외된다. 이런 유형의 인간들은 기표를 자기 안에 확실히 들어앉힘으로써, "기표를 그녀 자신 안에 구성"함으로써, “기표와의 조우”가 일어남으로써, 주체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향유와 관련해서 (나)의 경우는 (가)와는 대칭적이지도 상보적이지도 않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가)유형이 전적으로 기표 세계 안에서만, 반드시 허락되는 것들 안에서만 남근적 향유($→a)를 누리는 데 반해, (나)는 전적으로 남근적 향유(La→∅) 누리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때로 타자적 향유(La→S(A))까지도 누린다. 앞서 언급한 홍영철, 문정희, 최정례 시의 화자들은 (나)유형중에서도 주로 남근적 향유에 익숙한 이들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의 화자들은 hommosexuelle로 남는다. “즉 그녀는 남자들을 사랑하고 남자처럼 사랑하며, 그녀의 욕망은 남자의 그것처럼 환상 속에서 구조화된다.” 재차 강조할 점은 hommosexuelle만이 (나)들의 전부는 아니며, 그중에는 반드시 타자적 향유를 누리는 여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나)의 유형들 중에서도 타자적 향유(La→S(A))를 누리는 주체를 시에서 찾아보면,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 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 / 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 / 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 /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 벌 나비를 생각해야만 꽃이 봉오리를 열겠니 /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 얼레지...... / 남해 금산 잔설이 남아 있던 둔덕에 / 딴딴한 흙을 둟고 여린 꽃대 피워내던 / 얼레지꽃 생각이 났습니다 / 꽃대에 깃드는 햇살의 감촉 / 해토머리 습기가 잔뿌리 간질이는 / 오랜 그리움이 내 젖망울 돋아나게 했습니다 / 얼레지의 꽃말은 바람난 여인이래 / 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 / 대궁 속의 격정이 바람을 만들어 / 봐, 두 다리가 풀잎처럼 눕잖니 / 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 / 얼레지는 얼레지 / 참숯처럼 뜨거워집니다  -김선우, <얼레지> 전문

 

세상에서 얻은 이름이라는 게 헛묘 한 채인 줄 / 진즉에 알아챈 강원도 민둥산에 들어 / 윗도리를 벗어 올렸다 참 바람 맑아서 / 민둥한 산 정상에 수직은 없고 / 구릉으로 구릉으로만 번져 있는 억새밭 / 육탈한 혼처럼 천지사방 나부껴오는 바람 속에 / 오래도록 알몸의 유목을 꿈꾸던 빗장뼈가 열렸다 / 환해진 젖꽃판 위로 구름족의 아이들 몇이 내려와 / 어리고 착한 입술을 내밀었고 / 인적 드문 초겨울 마른 억새밭 / 한기 속에 아랫도리마저 벗어던진 채 / 구름족의 아이들을 양팔로 안고 / 억새밭 공중정원을 걸었다 몇 번의 생이 / 무심히 바람을 몰고 지나갔고 가벼워라 마른 억새꽃 / 반짝이는 살비늘이 첫눈처럼 몸속으로 떨어졌다 / 바람의 혀가 아찔한 허리 아래로 지나 / 깊은 계곡을 핥으며 억새풀 홀씨를 물어 올린다 몸속에서 / 바람과 관계할 수 있다니! / 몸을 눕혀 저마다 다른 체위로 관계하는 겨울풀들 / 풀뿌리에 매달려 둥지를 튼 벌레집과 햇살과 / 그 모든 관계하는 것들의 알몸이 바람 속에서 환했다 / 더러 상처를 모신 바람도 불어왔으므로 / 햇살의 산통은 천 년 전처럼 / 그늘 쪽으로 다리를 벌린 채였다 / 세상이 처음 있을 적 신께서 관계하신 / 알 수 없는 무엇인가도 내 허벅지 위의 햇살처럼 / 알몸이었음을 알겠다 무성한 억새 줄기를 헤치며 / 민둥한 등뼈를 따라 알몸의 그대가 나부껴 온다 / 그대를 맞는 내 몸이 오늘 신전이다  -김선우, <민둥산> 전문

 

<얼레지>보다는 <민둥산>이 좀 더 강력한 타자적 향유를 보여준다. 김선우가 누리는 이러한 향유는 종교적 열락과도 맞닿은 탈성화된 향유로서 같은 여자들한테도, 예를 들면 <오빠>의 문정희에게도 타자적으로 느껴진다. “그녀가 스스로를 한 남자의 견지에서 규정하는 한, 저 다른 국면은 불투명하고 낯설고 타자적인 것으로 머문다.” 김선우 식 여자들은 음탕하다. 같은 여자들이 보기에도. 왜냐하면 남근과의 그 어떤 관계도 요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근적 향유의 보잘 것 없음마저 드러내기 때문이다. 욕망의 순환경제로부터 해탈(?)하여 타자적 향유를 누리는 김선우 식 여자는, 상징 질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두려움과 질투가 뒤범벅된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을 것이다.  

 

(나)유형은 이렇게 부분적으로(결코 분리할 수 없는 일부로서의 부분) 타자적 향유를 누리는 면이 있기 때문에 (가)처럼 상징 질서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고는 결코 할 수가 없다. 그들 가운데는 항상 김선우처럼 “전체를 의문에 빠트리는 어떤 사례”, “논리적 예외의 지위”에서 향락을 누리는 주체가 있는 것이다. 상징 질서에 의해 설정된 경계 너머로 나아가서 실재적 심급에서 타자적 향유를 누리는 '탈-존'하는 주체가 있기 때문에 여자들은 결코 하나의 범주로 엮이지 못한다. 집합을 이루지 못한다. 유형화되지 못하고 늘 비-전체로서만 존재하게 된다. 그래서 여자의 기표는 빗금 쳐진 La. (나)도 정확히 말하면 (나)라고 써야 한다.

 

타자적 향유와 관련하여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와 정을 통해 헤라클레스를 낳은 인간 여인 알크메네의 경우를 예로 들어볼 수 있겠다. 알크메네는 아무도 모르게 세상의 모든 남자들을 능가하는 절대자(S1)와 동침함으로써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희열을 만끽하고, 결과적으로 모든 인간 남자들(S2)을 일시에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남자들은 물론이고 제우스와 동침해본 적 없는 여자들 역시 그 믿을 수 없는 사건의 실체와 내막에 대해서는 전연 알지 못한다. 알크메네의 불러오는 배를 보며 어떠한 기미만을 어렴풋이 감지할 뿐이다. 당혹감과 허탈감 속에서 그들은 알크메네에 대하여 알 수 없는 공포와 신비를 느낄 것이다.

 

요약하면, "성적 관계 같은 것은 없다." 왜냐하면, 각각의 성들은 기표와의 관계라는 제3의 관계 속에서 각기 따로따로 상이하게 정의되며, 각각의 성들이 주체화 과정에서 관계 맺는 파트너들 역시 대칭적이지도 중첩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남자의 경우 대상a, 여자의 경우 남근적 향유의 대상이 되는 S(A)와 타자적 향유의 대상이 되는 ∅)

 

홀로 '승화'됨으로써 상징 질서 내의 욕망의 총량의 보존 법칙이 성립하지 않도록 하는, 욕망을 실재적 차원으로 누출시켜 버리는, 그럼으로써 구조주의적 한계를 초월하는 주체의 존재 방식으로서 타자적 향유를 누리는 주체의 방식, 즉 ‘탈-존’이라는 개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탈-존으로서의 타자적 향유라는 개념은 (...) 리비도 경제를 열려 있는, 총체화될 수 없는 경제로 만든다. 향유의 보존은 결코 없으며, 희생된 향유와 획득된 향유 사이의 비례적 관계는 결코 없다. (...) 타자적 향유는 근원적으로 불균형적이며, 계량불가능하고, 불비례적이며, 정숙한 사회에는 음탕한 것이다. 그것은 남근적 경제나 단순한 구조주의 안으로 결코 만회될 수 없다. 탈-존으로서의 대상 (a)처럼, 타자적 향유는 구조의 매끄러운 작동에 치유될 수 없는 효과를 남긴다.”

 

라캉의 성 구분 도식은 소위 말해 사회에서 정상인 급으로 분류되는 신경증자(강박증자와 히스테리증자)들에 관해서만 다루고 있다. 왜 라캉은 언어 질서로부터 완전히 이탈하여 폐쇄적이고도 자족적인 세계를 구축한 분열증자의 도식은 안 만들었을까. 안 만든 게 아니라 못 만든 거라면(왜냐하면 분열증자는 기표와 아무런 관계도 맺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남근 기능이 전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주체이기 때문에), 분열증자야말로 그 어떤 도식으로도 포착할 수 없이 완벽하게 타자적 향유를 누리고 있는 인간 유형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황병승이 보여주는 분열증적이고도 나르시시즘적인 자폐성의 시 세계로부터 그 어떤 상징적 질서의 억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 홀로 오롯이 충만한 희열을 체험하는 탈-존의 비결을 배워볼 수 있겠다.

 

요요 / 엄마 잘못했어요 / 검은 마을에 폭설이 내리고 / 흰 마을의 당나귀들은 / 빨간 풍선을 열심히 불었죠 뿌뿌뿌뿌 / 삼백육십 더하기 피눈물 곱하기 달 없는 밤은? / 모르겠어요. / 배고파 배고파서 새로 산 넥타이를 삶아 먹은 뚱뚱보 원숭이? / 발길질? 따귀 백 대? / 시간을 줘요 / 저 늙은 나뭇가지가 가리키는 건 12시를 지나는 다음 생 / 그렇지만 딸아 엎드려뻗쳐. / 언제나 되돌아오는 / 요요 / 신경질 // 검은 마을에 검은 눈이 멎고 / 흰 마을의 당나귀들은 답답해 아유 숨 막혀 / 뿌뿌뿌뿌 빨간 풍선이 날아오르고 / 눈물콧물 뒤범벅의 우리 엄마, / 유리창 가득 출렁이는 저 / 새파란 달들 좀 봐라 엄마는 마르고 / 엄마 아닌 것들은 전부 뚱뚱하구나 / 그러나 뒤바뀐 옷장 더하기 눈물콧물 나누기 삼백육십 개의 회초리는? / (천년만년 벌받아라 미운 오리 새끼들!) / 흑백을 사이에 두고 걸어가는 모녀와 모녀와...... / 바다 대 호수? 구두 속 구두? / 아아 모르겠구나 딸아 / 창밖의 저 늙은 나뭇가지가 가리키는 건 새벽을 알리는 12시 / 그렇지만 내 속에도 죽은 벌레들은 아주 많아요 엄마, 똑바로 엎드려뻗쳐. / 언제나 되돌아오는 / 요요 / 신경질 / 세월이 가도 / 콩알만한 요요는 / 미친년 정신없이 오락가락 흑색백색 / 함께 두근거려 봐요, 엄마!  -황병승, <너무 작은 처녀들> 전문

 

사족: 이런 식으로 시를 끌어들여 인용하는 것이 무리한 시도일 수도 있고, 야생의 시에게 올가미를 덧씌우는 이론의 횡포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라캉 이론을 임상적으로(?) 이해해보는 데에는 확실히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글 다 썼으니 방생한다. 잘 가라, 시야. 아무에게도 잡히지 말고 누군가의 귓가로 자유로이 날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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