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별 대수로운 일이 아니기도 하고 그래서 다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새로운 사회에서 새로운 춤을 배우고 있자니 스윙판에서 과거에 받았던 상처가 다시금 스물스물 생각이 난다. 이 바닥에 오래 머문 이 치고 마음의 상처 하나 없는 인간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또 부지불식간에 나 역시 누군가에게 상처준 적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지마는. 소규모 부족사회 같은 이곳 춤판에선 언제나 뒷말이 무성하고, 그 뒷말 속에 오해와 억측과 소문이 난무하고, 그러다보면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고 그러는 것 같다. 이들과 더불어 춤추며 살기 위해서는 그 또한 견뎌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초연해지기가 쉽지 않다.

 

사실 초연해지기는 커녕 무슨 구설수 공포증 같은 게 생겨버린 것 같다. 경거망동했다가 자칫 구설수에 휘말려 이슈메이커가 되고 뒷담화의 주인공이 되면, 춤추고 싶어서 춤판 갔는데 정작 춤을 추고 싶어도 못 추게 되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는 것을 눈물로 밤잠 설치며 깨달은 지라, 더 이상 옛날에 스윙 막 입문했을 때의 그 철없던 시절처럼 오픈마인드가 안 된다. 조심성이 생겼다고 해야 할까, 극소심해졌다고 해야 할까. 무엇보다도 두려움이 크다. 또 예전처럼 상처 받을까봐. 신뢰할 만한 유대가 아직 형성되지 않은 사람 앞에서는 경계심을 가지고 행동하게 된다. 춤판에서 늘 처신이 중요하고 인간 관계가 쉽지 않다는 걸 뼈아프게 깨달은 뒤로는 사람을 향한 마음에 뭔가 단단한 껍질이 한층 생겨버린 것 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5-04-16 14: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16 15: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땅고 음악 중에 까를로스 디 살리(Carlos Di Sarli)의 <tu, el cielo y tu>. 이 곡으로 유투브 검색하다 발견한 동영상. 춤도 물론 멋지지만 오직 춤을 위해 마련된 아르헨티나 특유의 이런 공간도 더없이 근사해 보인다. 천장에는 팬이 돌고, 플로어 가장자리에는 벨벳 식탁보를 두른 테이블이 일렬로 늘어서 있고, 곱게 단장한 채 그곳을 가득 메운 사람들과, 광택이 도는 헤링본 마룻바닥, 그리고 벽에는 크고 작은 액자들이 옹기종기 걸려있는 공간. 으리으리하지 않아도 정갈하고 맵시있는, 새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정성들여 관리해온 태가 나는, 구석구석 세월의 손때가 묻은 공간.

 

무엇보다도 이 공간은 춤과 일상이 양지에서 공존하는 공간이리라. 유투브 구경하다 보면 땅고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이런 공간에 대한 판타지도 동시에 자라나는 것 같다. 왜 땅고에 미친 이들이 직장을 작파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날아가서 그곳의 공기를 마시며 춤을 추려고 하는지, 그리고 왜 국내 땅고인들이 그토록 훈고학파적인 열정으로 아르헨티나 현지 밀롱가 인테리어를 애써 재현하려고 하는지 이해가 된다. 노인과 젊은이, 여자와 남자, 춤과 음악, 술과 맛좋은 식사, 따스한 조명과 다정한 포옹이 다함께 어우러진 이런 생활 공간을 어찌 누군들 꿈꾸지 않을 수 있을까.

 

 

Tú…el cielo y tú

그대, 하늘 그리고 그대

 

Tibio está el pañuelo, todavía 손수건이 아직도 식지 않았어
que tu adiós me repetía 그대 내게 또 다시 이별을 말하네
desde el muelle de las sombras. 그림자 진 부두로부터.
Tibio, como en la tarde muere el sol, 열기는 남았어, 어두워질 때 태양이 지듯
mi sol de nieve, sin esperanza 눈 내린 나의 태양은, 희망도 없이
y sin alondras. 행복(종달새)도 없이.
Tibio guardo el beso que dejaste 아직 따뜻해, 그대 입맞춤을 간직해.
en mis labios al marcharte 그대 떠나면서 내 입술에 남긴
porque aún no te olvidé. 아직 그대를 잊지 못했으니까.

Tú, 그대
yo sé que el cielo, 나는 하늘을 알아
el cielo y tú, 하늘과 당신
vendrán a mí para salvar 내게 돌아올 거란 걸
mis manos, presas a esta cruz. 이 십자가에 묶인 내 두 손을 구하러
Si esta mentira audaz 만일 두려움 없는 이 거짓말이 (그대가 돌아올 거란)
busca mi pena, 내 고통을 찾는다면
no la descubras tú 당신 그걸 밝히지 말아
que me condena. 그건 내게 유죄를 선고하는 거야
Guárdala en ti, 당신 안에 그걸 간직해줘
que es mi querer 바로 내 사랑이니
desengañarme así 그렇게 내게 진실을 깨우쳐 주는 건
será más cruel. 더 잔인할 테니.

No… 아니
no me repitas ese adiós… 이렇게 자꾸 내게 이별을 말하지 마
que esto lo sepa sólo Dios, 그걸 아는 이는 오직 하늘 뿐이야
el cielo y tú… 하늘과 당신

 

*http://blog.naver.com/blondefish 

출처는 여기. 도도님이 번역하신 그대로 긁어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탱고 배우는 도중에 스윙 추면 자세가 망가진다는 얘길 듣고 나서는 스윙 빠에 가보고픈 마음이 움츠러들어버렸다. 안 그래도 스윙 출 때의 자세가 남아있는 모양인지 춤 출 때 무게 중심이 너무 내려가 있다는 지적을 받았던 터라. 그럼에도 이런 스윙곡 들으면 뭉클하다. 탱고가 갖지 못한 가볍고 따스한 안락과 여유, 위트와 사랑스러움, 말랑말랑한 낭만 같은 게 느껴져서. 내게 다시 오지 않을 짧은 시절이었는데 그때는 그런 줄도 모르고 백년만년 영원히 스윙만 출 줄 알았네. 탱고는 언제까지 출 수 있을까.

 

 

 

Oh, It's time to dream,

a thousand dreams of you
It's been so grand together, yes, together
You thrilled me from the start
You brought the spring again
Your fingers touched the strings
of my heart and made it sing again
I hope you dream a thousand dreams of me
All things we're planed doing together
And if you do, I dream my whole life through
A thousand, a million, a zillion dreams of you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책 읽을 때는 춤이야말로 지극히 소모성의 말초적 운동으로 여겨지다가도 춤 출 때는 또 반대로 책이야말로 한심한 헛소리처럼 생각된다. 내 변덕은 몰두했던 대상을 야멸차게 부정하며 항상 극단을 오가고, 언제나 한 쪽에 질릴대로 질려서 폭발할 때 그 반동의 힘을 빌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 같다. 다시 댄스화를 신고 나니 활자 강박 대신 날마다 30분이라도 스텝 연습을 해야 한다는 새로운 강박이 생긴 것 같다. 예전에 스윙 출 때는 책을 읽기는커녕 글도 안 썼는데, 뒤풀이 한다고 날이 새도록 술만 마셨는데, 너무 아무 것도 안 써도 지나놓고 보면 남는 게 없어 후회가 되더라. 그래서 탱고는, 배우면서 느낀 점이라도 틈틈이 글로 남겨놓아야지 싶다.
 
2 탱고 음악은 애수가 넘치기도 하고 비장하기도 하고, 아무튼 뭔가 이 음악은 인간의 감정을 격앙시키는 묘가 있는 것 같다. 왜 춤판 사람들이 탱고를 제일 나중에 배우라고들 했는지 알겠다. 이십대에 심수봉을 들어서 뭘 알 건가. 내가 지금이라고 심수봉을 제대로 들었다 할 수 있을까. 사십대에 듣는 심수봉은 또 얼마나 다를 것인가. 딱 심수봉 만큼이나 탱고 음악은 신파적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마냥 신파라고만은 규정할 수 없는, 신파를 신파 이상으로 깊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 있는 것 같다.
 
3 직장 생활도 결혼 생활도 꿈꿨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고 겉으로나마 그럴싸하게 굴러가는 게 기적적이라는 생각만 들고 온갖 부조리로 점철된 이번 생은 아무래도 객관적인 관점에서 다소간 망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밤마다 솟구치는 와중에 마치 술주정뱅이가 신변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라스베이거스로 떠나듯이 그렇게 나도 춤판으로 복귀한 면이 없지 않아 있는데, 인터넷을 돌아다녀보면 일도 사랑도 춤도 심지어는 외국어와 전국 맛집까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정복한 듯한 땅게로스들이 많이도 보인다. 분명 라스베이거스에도 영락할대로 영락하여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는 결기로 찾아든 사람부터 환갑잔치를 하러 온 사람까지 다양하겠지. 하지만 그 모두에게도 승률은 공평할 테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춤은... 왜 빠져나오기가 힘드냐면. 왜 자꾸 돌아가게 되냐면... 다른 춤은 몰라도 무도댄스의 경우는 단순히 춤만을 의미하는 게 아닌 것 같아. 이건, 다른 '체제'의 경험이야. 북한 사람들이 귀순하는 거랑 똑같아. 한 번 어떤 체제를 알아버리면, 그 체제를 잠시라도 맛보고 경험해버리면, 그리고 거기서 벅찬 자유와 해방감을 느껴버리면, 돌이킬 수 없는 거야.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지, 새로운 체제를 경험해버린다는 것은. 현실 세계가 일부일처제라면 이곳은 폴리아모리즘 체제야. 이 곡은 이 애랑 추면서 오르가슴 느끼고 다음 곡은 저 애랑 추면서 오르가슴 느낄 수가 있어. 하루에 몇 명이고 번갈아가면서 부둥켜 안고 그렇게 이 곡 저 곡 추는 거야. 동성끼리 추는 건 물론이고 심지어 스윙은 셋이서 추기도 한다고. 그렇다고 여기가 부도덕한가. 그런 것도 아니야. 여기도 여기 나름의 엄격한 관습과 질서와 문화와 법도가 존재하고, 이곳에서도 신용과 평판이 중요해. 경쟁과 질투, 사랑과 슬픔이 있어. 다만 체제가 다를 뿐이지."     

 

왜 또 춤판으로 돌아갔냐는 친구의 물음에 답하다가 나온 얘기. 가끔은 머리보다 입이 더 빨라서, 말하다가 내가 한 말을 듣고 나 자신의 행동이 이해될 때가 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15-03-24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한권 읽는 것보다 더 곱씹으며 상상하며 읽었네요..
봄은 오고, 갈길 없는 제 이 마음이 이러다가는 춤의 세계로..

식신을 써놓으셔서, 제 생각엔 수양님은
학당귀인과 식상, 그리고 문창귀인, 화개살이 함께 있으실 듯.. 싶어요.
아시죠. 화개살의 위력!
사람들에게 매력을 뿜어내는.. 도화살과는 차원이 틀린..

글이 이렇게 맛과 멋이 묻어나다니...^^

2015-03-24 1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지온 2015-03-26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리보다 입이 빠르다는 말이 와닿네요

수양 2015-03-26 17:17   좋아요 0 | URL
가끔은 정말 그런 거 같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