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고래서점에 책을 한 백 권 정도 팔아버렸다. 읽다 포기한 책, 선물 받았던 책, 계륵 같은 책, 이제는 작별해도 좋을 책, 왜 샀나 싶은 책 등등. 팔아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한 권 한 권 박스에 넣을 때마다 밀려오는 소회를. 견디기 쉽지 않은 그 헛헛함을. 지난번에는 돈이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팔았었지만 이번에는 내 나름으로 거행한 의식이자 상징적인 퍼포먼스 같은 거였다. 그러니까 다 접고, 다시 춤으로 돌아가기 위한. 계절이 지나 서식지를 옮기는 철새들처럼, 활자와 관념의 인간에서 몸을 쓰는 인간으로 돌아가겠다. 그것도 스윙에서 탱고로 종목을 바꿔서 새롭게. 아주 새롭게. 거짓말처럼 나는 재편성될 것이다.

결심을 굳히고 나니 잠이 안 온다. 두려운 게 있다면 첫 입맞춤의 설렘과 환희 그리고 생의 모든 감각을 되찾은 듯한 열락의 시절이 지나고 나서 결국 언젠가 다시 또 무섭게 마주하게 될 허무와 권태다. 환상이 소진하고 난 뒤의 그 경이에 가까운 지겨움. 도망치고픈 평범함. 완벽하게 육체적인 세계의 무구한 생물성에 대한 끔찍한 절망. 어제도 오늘도 지속되는 익숙한 음악과 시시한 사람들의 똑같은 웃음소리. 그것이 주는 지긋지긋한 환멸감. 기적을 체험했던 곳에서 언젠가 훗날 필연적으로 지옥을 발견하고 절규하게 되리라는 경험에 근거한 전망이 나를 두렵게 한다. 그래도 용기내어 해보기로. 용기. 나로서는 정말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스윙에 대해서 돌이켜 보면, 나는 진지하지도 헌신적이지도 못했다. 그 바닥에 그렇게 오래 눌러 붙어 있었으면서도 끝내 고수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 존재감이라고는 없이 흡사 구천을 떠도는 유령처럼 춤을 춰왔다는 사실이, 나의 불성실을 여실히 방증한다. 사념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매진해도 모자랄 시간을, 나는 얼마나 많은 회의와 염증과 망설임으로 헛되이 흘려보냈나. 우직하게 돌진하는 과격분자가 되고 싶었지만 나는 결국 구제할 수 없는 신경증적 회의주의자였다. 어떤 일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혹은 어떤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불만와 경멸, 미련과 후회를 동력으로 삼는다는 것. 무엇을 배우든 누구를 사귀든 어떤 세계와 조우하든 이런 것이 내 분과 내 꼴일 거라는 생각을 하면 좀 서글퍼진다. 나의 이런 고질적인 태도를 그 누구보다도 혐오할 사람이 바로 나라는 걸 떠올리면 더더욱. 나는 정말 영원히 나를 좋아할 수 없을 것이다.

춤판 사람들 중에는 근면하고 냉철한 정복자처럼 다양한 장르의 춤을 차례로 마스터해나가는 이들도 상당하고, 오늘은 스윙빠 갔다가 내일은 살사빠 모레는 밀롱가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포스트모던하게도 혼용적인 춤을 도입해 즐기기까지 하지만, 애당초 '쿨'하고는 거리가 먼 나 같은 위인으로서는 모두 꿈도 못 꿀 일이다. 아, 그런 건 정말 돈쥬앙 같은 짓이 아닌가, 속으로 분개하면서도 과연 나는 스윙이라는 춤에 한 번이라도 순정하게 몰두해본 적이 있었던가, 절대적 의미를 부여해본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돌이켜보면 부끄러울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목을 바꾼다는 건 확실히 나로서는 전향에 가까운 감행이라고 억지를 써본다. 용기 내어 주사위를 다시 던지는 일이라고. 밀물이 할퀴고 지나간 모래사장 위에 다시 그림을 그리는 일이라고. 결심만으로도 이렇게 잠이 오질 않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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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3-07-19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이팅입니다.

수양 2015-08-05 12:02   좋아요 0 | URL
앗.. 감사해요...
 

황홀의 극한을 체험해볼 수 있는 분야 가운데 하나로 춤판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가로등불 아래 모여들어 생명을 내걸고 광란의 군무를 추는 나방들처럼 춤판에서 우리는 방향을 잃고 정신없이 황홀해질 수 있다. 거역할 수 없는 반대 급부의 명제로서, 황홀은 어김없이 숨막히는 허무로 귀결되고 마는 것이지만. 그러나 황홀이 되었든 허무가 되었든, 춤판에서 느끼는 극도의 감정들은 독서를 통해서는 결코 느껴볼 수 없는 경지의 체험인 것 같다.

 

활자의 세계가 극지방의 풍광처럼 날카롭고 정적인 반면에, 춤판은 공허조차도 열대의 기후를 닮았다. 춤판에서 발원하는 정서는 그것이 어떤 종류가 되었든 원색적이고 자극적이다. 에밀 시오랑과 앙드레 지드와 전혜린조차도 춤판의 세계에 비하면 차가운 활자로 박제되어버린, 고운 자태로 굳어버린 정념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구두점과 서술형의 세계 속에서는 그 어떤 절규도, 환희도, 비합리성도, 광기도 가차 없는 동결건조의 과정을 겪게 되고 마는 것일까.

 

누구에게나 만지면 만질수록 부수어지고 마는 마른 낙엽 같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사람과 맺은 관계이든, 지난날 알 수 없는 열기에 사로잡혀 광적으로 쌓아 올렸던 모종의 내적 세계이든, 추억이든, 장소든... 나에게는 그 중 하나가 아무래도 춤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붉게 이글대는, 혹은 물기를 머금고 살아 날뛰는, 오로지 춤판에서만 벌컥벌컥 들이킬 수 있었던 생명과 격동의 기운을, 지킬의 가면을 벗어던진 하이드들의 성난 축제를, 육신의 전부를 제물로 바쳐도 아깝지 않을 만큼 고귀하게 느껴졌던 그 디오니소스적 열정을, 이제는 이렇게 골방에 엎드려 등 굽은 노파처럼 끼적대고 있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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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2015-08-20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은 스윙에만 국한시켜야 할 것 같다. 탱고는 좀 다른 것 같다.
 

아마추어 댄서들의 수명은 짧다. 5년 전에 플로어를 가득 메웠던 사람들 중에 지금 남아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마 1%도 안 될 거다. 인체 장기조직의 세포재생주기가 6개월 정도라고 하는데, 그렇담 춤판의 재생 주기는 대략 2년 정도 되는 것 같다. 그 정도를 주기로 해서 구성원의 대부분이 매번 새롭게 바뀐다. 그래서 춤판에서는 얇고 넓은 인간 관계는 쉬운 반면 깊은 사귐은 무척 어렵다. 춤판에 오래 있다보면 사람들과의 헤어짐에 대해서도 쿨해지게 된다. 좋게 말하면 의연해지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냉정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춤판에 오래도록 눌러앉은 소수의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고수급들이다. 춤판의 생리를 꿰고 있는 그들은, 그 생리에 어떻게 편승해야 하는지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부단히 강좌를 열어 춤판 인구를 증식시키고 그 대가로 돈을 벌거나 명성을 얻는다. 그러나 그들도 언젠가는 하나 둘 사라질 것이다.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는 것은 오로지 윤기나는 플로어와 흐르는 음악, 에너지와 열기다. 춤판은 늘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정작 사람 외의 것들만이 유구하다는 사실이 가끔은 진정으로 경이롭게 느껴진다. 온갖 소문과 스캔들로 무성한 사교계의 찬란한 덧없음을 상대적으로 실감하게 되기도 하고.

 

춤판에 발을 디딘지는 5년이 지났지만 춤을 끊었다고 할 수도 없고 여전히 춘다고 할 수도 없는 미지근한 상태로 지낸 시절이 춤인생의 대부분이었던 나는 당연히 아직도 고수가 되지 못했다. 하수는 아닌 것 같지만, 고수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중수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몇 년 째 늘지 않는 실력으로, 패턴이 가물거릴 때 쯤 되어서야 간간이 춤추러 가는, 그러나 결코 춤을 완전히 끊지는 못하는, 하수도 중수도 고수도 아닌 내 처지는 뭘까. 어쩌면 춤판에서의 나는 이미 개체로서의 수명이 다해 진즉에 사라졌어야 할 몸인데, 미련 때문에 아직도 유령처럼 플로어를 떠돌고 있는 신세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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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정이 넘도록 땀에 흠뻑 젖어 쓰러지기 직전까지 춤을 추고 있으면, 이제껏 읽었던 고색창연한 텍스트들이 죄다 이 순간을 위한 구차한 수식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춤을 추는 동안에는 마치 아름다운 그림이나 시에 감전될 때의 경우와도 비슷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더없이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방식으로 순간의 어떤 강렬한 환희의 지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저는 춤판에서 느꼈던 그 무량한 환희야말로 이 세계의 궁극적인 의미이자 비밀스런 원천이라고 근거도 없이 확신해 봅니다. 바람 불어오는 방향으로 곱게 몸을 누이는 갈대들처럼 음악과 조화를 이루어 내 몸을 리듬에 완벽히 일치시킬 때, 온몸의 세포가 올올이 발기하던 그 벅찬 생동의 순간- 이는 단지 플로어 위에서의 특수한 체험이 아니라, 어쩌면 생명 가진 모든 것들이 자기를 최대한 표현할 때 만끽하게 되는 감격적인 절정의 순간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09년도에 적었던 자기소개서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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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만 관중이 운집해 있는 곳에서는, 어떤 이가 한 가지 행동을 취했을 때 그에 대하여 수만 가지 견해와 수만 가지 평가, 그리고 수만 가지 추측이 나올 수 있다. 그 중 진실은 어떤 것일까. 나는 절대적인 진실은 절대적으로 부재하다고 믿는다. 오직 저마다의 진실, 파편 같은 진실이 존재할 뿐이다. 좀더 냉정히 말하면, 그것은 '진실'이라 명명하기에도 보잘 것 없는, 그저 개인의 욕망의 반영일 뿐이겠지만. 그러므로 나의 진실을 너에게 강요하는 것은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침묵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스윙판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침묵하는 것은 이미 사교계의 속성을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스윙판이라는 곳은 말하자면 바로크 시대 궁중 사교의 장과 별반 다를 바 없다. 파편 같은 진실들이 날마다 무수한 공명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흥겨운 재즈 선율의 장막을 걷어내면, 그곳에는 저마다의 진실들이 수챗구멍의 머리칼처럼 미친 듯이 엉켜있는 것이다. 억측과 소문이 난무하고, 뒷담화와 요설이 끊이지 않으며, 오해와 곡해가 음산한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는 스윙판에서 우리는 모두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고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옥 같은 스윙판을 떠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미지의 허상을 부유하는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끼면서도, 혹은 표적이 되어 무수한 화살을 맞으면서도, 가십과 구설수의 핵심 인물이 되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면서도, 그도 아니면 열심히 춤추고 나서 홀로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가슴 저린 공허에 몸을 떨면서도- 그 모든 비인간적 사태를 감내하며 땀에 절은 스윙화를 꺼내드는 까닭은 무엇일까. 사람 때문에 쓸쓸하고 사람 때문에 상처받으면서 또 다시 사람의 소굴로 찾아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춤에 대한 미련 때문일까.

 

누군가 그 까닭을 물어본다면, 진부하지만 나는 그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서라고 말하겠다. 스윙판은 참으로 찬란한 사바세계다. 어쩌면 스윙판에도 프랙탈 구조처럼 소우주가 깃들어있는 게 아닐까. 저마다의 진실들이 수챗구멍의 머리칼처럼 미친 듯이 엉켜있는 형상, 그거야말로 복잡오묘한 만다라이며 눈부시게 다이나믹한 소우주인지도. 며칠 전에 스윙 동호회 '6개월 이후 사람들' 게시판에 처음으로 글을 남겼다. 동호회에서 춤도 배웠지만 인간과 사회도 함께 배운 것 같다고 적었고, 그 세 가지 모두를 동시에 가르쳐준 동호회에 빚진 게 무척 많다고도 적었다. 진심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나만의 진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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