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황홀 - 김도언 문학일기
김도언 지음 / 멜론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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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도언이 2004년에서 2009년 사이에 쓴 일기. 김도언의 일기여서 재미있는 건지 남의 일기여서 재미있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이 책은 남의 일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나 같은 이들을 겨냥한 책인 것 같다. 그러나 ‘소설가의 일기’라는 것은 얼마나 모순적인 말의 조합인가. 나는 소설을 쓰기 위해 자신의 인생마저 소설처럼 만들어버린 소설가들 몇몇을 알고 있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가게 간판 밑을 회의 없이 지나간다. 회의하지 않을 때 사태는 더욱 멀리 달아난다. 나는 회의하지 않는 이들과 무엇 하나 나눌 게 없다고 생각한다. 회의는 사태의 세포를 분열시킨다. 회의는 누룩 속에 피는 곰팡이처럼 시간의 엷은 막에서 태어나 맹렬하게 사태의 형질을 전환시킨다. 그것은 내가 죽어가는 생물이라는 것만큼이나 자명한 사실이다. 회의에 기대하고 회의에 의존하는 방식, 이것은 뚜렷하게 비극적이다. 뚜렷하게 비극적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대체로 비극처럼 보이지 않는다.  -2009.5.6. 수요일의 일기 中에서
  
그에게 ‘사태’란, 회의하지 않으면 달아나 버리고 회의하면 분열해서 형질이 변해버리는 어떤 것이다. 그는 사태를 회의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태에 대해서 ‘회의를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는 상황’마저 회의하고 있는 것 같다. 굉장한 회의주의자가 아닐 수 없다. 일기라고 하기에는 수상쩍고, 소설이라 하기에는 정직하고, 잠언이라 하기에는 노골적인 이 책은 바로 그 회의주의의 산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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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적 체질 문학과지성 시인선 375
류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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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정말로 '상처적 체질'이었다면 시집의 제목을 이렇게 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시인은 상처를 남발함으로써 상처를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누설한다. 상처, 눈물, 슬픔... 이런 언어들이 시에 자꾸 들어있으면 의심스럽다. 그런 시들은 대개 극점에서 씌어지지 않은 것들이다. 적어도 시는, 스노비즘이어서는 안 된다. 그건 이미 시가 아니다.  나는 잔인하게도, 이 시집의 시인이 좀 더 상처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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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에게 민음의 시 165
이영주 지음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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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밤에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밖에서 안으로, 아무도 없는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차가운 칼날 같은 손잡이를 떼 낸다. 손잡이가 있으면 한 번쯤 돌려 보고 배꼽을 눌러 보고 기하학적으로 시선을 바꿔 볼 수 있을 텐데. 어머니가 방바닥에 늘어놓은 축축한 냄새들. 언니라고 부르고 싶은 버섯들이 있었는데, 잠에서 깨면 어머니는 버섯 머리를 과도로 똑똑 따고 있었다. 손잡이를 어디에 붙여야 할까. 너는 아래쪽에 서 있다. 몸속이 어두워질 때마다 울음을 터트리는 이상한 반동. 축축하게 썩어 들어가는 안쪽을 언니라고 부르고 싶어. 너는 봉긋하게 솟은 버섯 같은 자신의 심장에 손잡이를 대고 안쪽을 열어 본다. 거꾸로 자라나는 버섯들이 잠에서 깨어 어머니의 머리를 똑똑 따 내고 있다. 네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바깥에 두고 온 손잡이를 어두워서 찾지 못할 때, 아무도 없는 안쪽이 버섯 모양으로 뒤집어질 때, 너는 성에 낀 202호 창문을 언니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언니에게> 전문

슬픔은 상상력을 만나 유희가 된다. 그러나 그 유희에 동참하기에는, 내겐 너무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시집이었다. 빈한한 시적 상상력을 탓할 뿐이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시집이지만, 이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언니에게>라는 시만큼은 애틋하고 애틋해서 자꾸 읽어보게 된다. 그러게, 손잡이는 어쩜 버섯같이 생겼을까. 손잡이-버섯-심장-축축한 냄새... 언어는 또 다른 언어를 상상하고, 다정하게 부르고, 불러온 혹은 불어온 언어들이 서로 찰지게 아귀가 맞아서, 서로 다정하게 이어져서, 낭창낭창한 시 한 벌이 되었다. 나에게는 이 시가 곧 "손잡이"와도 같아서, 이 시를 "돌려보고 배꼽을 눌러보고 기하학적으로 시선을 바꿔 보고" 하다보면 문득, 내 가장 축축하고 어두운 안쪽에 버섯처럼 피어있는, 모든 언니같은 것들을 왠지 가만히 불러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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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과 그 적들
조영일 지음 / 비(도서출판b)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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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대학가에서 학생회의 위상이란 아무래도 독재정권 시절과는 판이할 수밖에 없었다. 가령 나와 내 친구들의 경우, 우리는 대체로 학생회 활동에 비참여적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생회 그룹에 딱히 반감을 가졌거나 냉소적이던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대단히 관용적으로, 조심스럽게 무관심했다. 무수한 관심사 가운데서도 특히 정의와 대의에 관심이 많은 집단이었던 그들을, 아마도 우리는 일종의 '동아리'처럼 받아들였던 것 같다.

 

이 책을 읽어보면, 90년대 이후 학생회 그룹과 비슷한 위상에 놓여 있는 게 오늘날 한국 문단 문학의 상황인 듯하다. 한때 자신을 수식했던 '대표성'이라는 기의가 얼마간 미끄러져 나가버린, 그래서 이제는 자신의 텅빔을 끊임없이 은폐해야 하는 일만 남은, 한없이 불안한 상태의 기표라는 점에서 이 둘은 처지를 공유한다. 한국문학의 종언을 둘러싸고 벌어진 문단 내부의 여러 논의들은, 문단에 속해있지 않은 외부자의 시선에서 봤을 때조차도 무척 강박적인 인상으로 비춰진다.

 

“우리는 문학이 철학책이나 사회과학서적보다 더 많이 읽히며 영향력을 가졌던 시기를 경험한 바 있다. (...) 그때의 독자구성은 오늘날의 독자구성과는 상당히 달랐다. 상층 엘리트계층은 물론이고 하층 노동자계층도 한국문학의 매우 큰 소비자였다. (..) 그러나 이런 독자들이 모두 떨어져나가고 20~30대 중산층 여성, 여학생, 문학청년만 남은 것이 오늘날의 문학상황이다.” 저자가 말하는 독자구성의 변화는 문학의 장르화(化)와 궤를 같이 한다. 근래에 국내 문예지에 실리는 단편 소설들만 하더라도 다루는 소재나 주제, 서술 기법이 어느 정도 일관되어 있고, 그 일관성이 모여 어떤 독자적인 '풍'을 형성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장르적 스타일이 뚜렷해지고 독자 구성이 협애해져 가는 이러한 상황을 가리켜 문학이 바야흐로 임계지점에 다다른 것으로 진단하며 꼭 개탄하기만 해야 할까. 오히려 이러한 새로운 국면이 보여주는 특징들을 한국 문단 문학의 또 다른 정체성으로 삼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장르화(化)가 거스를 수 없는 현실이라면,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문단 문학은 대의에 대한 미련을 깨끗하게 버리고 오히려 더욱 더 철저히 특정 독자층을 공략하는 길로 나아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종점의 징후라면 좋다, 종점으로 돌진해보자. 한국 문학 최후의 수요층인 “2~30대 중산층 여성” 독자의 조심스런(다소 도착적인?)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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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초상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12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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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못 생생하게 지난날 목격했던 민중적인 삶의 고통과 비참을 증언하곤 했지만, 솔직히 말해 그때까지도 민중이란 내게는 어떤 서먹한 추상이었다. 그것도 김형과는 달리, 시대의 강자로서가 아니라 영원히 고통받고 이용당하게 되어 있는 극히 비관적인 추상이었다. 만약 내게 애정이나 신뢰가 있다면, 그것은 언젠가는 내가 그들 민중 위에 군림하며 누리는 계층에 끼어들게 되리라는 예측에서 오는 부채감이나 죄의식의 변형이었지, 민중 그 자체에 대한 애정이나 신뢰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용기있게 옳다고 믿는 바에 따라 행동했던 이들에게는 죄스럽게도, 나는 차츰 심한 자기모멸과 원인 모를 부끄러움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기껏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소년시절의 충동적인 모험의 연장이며, 추구하는 것 또한 영광과 승리의 동참자로서 나누게 될 자랑스러운 기억 따위나 아닐까. 막연한 의무감에 사로잡힌 지성의 정신적인 자위행위거나 우리도 언젠가 빼앗기고 억눌린 자들을 위해 노력한 적이 있노라는, 장차 혜택 받는 계층에 끼었을 때의 변명을 준비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것이 그 무렵 이미 병적인 피로에 빠져있던 나의 결론에 가까운 자기검토였다. -p.86  

“변명을 준비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라던 소설 속 화자의 “자기검토”는 예리하게 들어맞았다. 적어도 <젊은 날의 초상>을 사랑하는 나 같은 독자들에게는 이 소설의 존재 자체가 오늘날 이문열이 그 어떤 정치적 망발을 일삼아도 결코 이 소설가에 대한 애정을 철회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젊은 날의 초상>을 비롯해서 그의 많은 소설들이 나에게는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고, 이 사실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덕분에 나는 이문열에 대해 아무 말도 못하게 되어버렸지만.  

최근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어느 운동권 학부생이 올린 글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학생이 공부나 할 일이지 왜 정치에 끼어드느냐는 어르신들의 비난에 그는 단단히 골이 난 모양인지 이렇게 적고 있었다. "나는 이문열이라는 작자가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는 말 따위 운운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정치적 기회주의로 정당화하는 것을 보고 구역질을 참지 못했다. 감히 ‘학부생’ 주제에 이문열의 뒤통수를 거세게 후려칠 날을 위해서 우리는 사상의 날을 벼리고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공부’를 실천해야 한다."

<젊은 날의 초상>은 자전소설로 알려져 있다. 이 소설에서 화자는 젊은 날의 상당 부분을 저 위의 학생이 역설한 “사상의 날을 벼리고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공부”에 헌신하는 것으로 나온다. 때문에 "이문열의 뒤통수를 거세게 후려치고픈" 어느 학부생의 글을 읽었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도 <젊은 날의 초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뭔가 아이러니한 느낌을 주었다. 흔히 '시절'은 한때라고 하지만, 어쩌면 개체로서의 인간만이 한때이며 오히려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야말로 '시절'인지도 모르겠다.

작중 인물의 대화에서 작가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묻어나는 데서 오는 근대소설적인 분위기라든가 중간중간 무협소설을 읽는 것처럼 허황되고 작위적인 대목 때문에 이 소설은 서술 기법 면에서 다소 촌스럽게 느껴지는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소설이 주는 감동은 이 모든 약점을 충분히 무마하고도 남는다. 소설 출판 당시 매캐한 교양의 숲에서 현실을 망각하게 만들었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 모든 비난이 꼬투리처럼 느껴질 정도로 매력적인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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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8 2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양 2010-08-20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그게 참 어려운 화두란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