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와 파스칼 - 인본주의냐 신본주의냐
이환 지음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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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미학적 자기완성을 위해 신 내지는 신으로 상징되는 무한, 영원, 불멸 등의 형이상학적이고 초이성적인 요소 즉 초월성을 필요로 하는가 하지 않는가. 파스칼과 몽테뉴의 차이는 여기 있다. 신본주의자 파스칼과 인본주의자 몽테뉴. 먼저 파스칼.

 

파스칼은 모든 주제 속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비참’의 현상과 그 이면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또 하나의 실체를 발견한다. 파스칼의 인간학에서 비참과 위대는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두 개의 축이다. 그래서 인간은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더 위대하고 반대로 위대하면 할수록 더 비참하다는 역설이 가능해진다. -p.59~60

 

파스칼은 비참의 현상 속에서 위대성을 읽어내고 그러한 사고 과정을 '배후의 사고'라 칭하면서, 몽테뉴가 현상적 사고에만 머물며 그것과 한쌍을 이루는 현상 배후의 원인 즉 위대성을 보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파스칼이 보는 몽테뉴는 "비참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않는다. 인간의 비참을 감지하는 그의 의식의 투명함과 감수성의 다양함은 우리를 매료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그는 이 비참을 비참으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 어떤 다른 시도도 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비참하니까 비참하다는 동의어 반복이 고작이다. 그의 비참은 그 안에서 맴돌 뿐 어떤 탈출구도 없다. 완전히 갇힌 세계이다."(119)

 

인간 인식의 근본적인 한계와 세계의 불확실성 속에서 그 어떤 심오한 배후의 실체도 인정하지 않고('신음하며 추구하기'를 포기하고) 다만 현세의 쾌락을 긍정하는 몽테뉴를 신의 아들 파스칼은 불성실하다며 비난한다. 그러나 글쎄, 오히려 파스칼의 인간론이야말로 병리적인 것이 아닐까.

 

파스칼의 인간론은 기독교인 특유의 마조히즘을 보여준다. 니체 식으로 말하면 비참의 한가운데서 위대성을 발견한다는 건 사자가 되지 못한 양떼의 자기연민이자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 그것은 피해자의 자기 성화(聖化)작업이며, 원한에 사로잡힌 약자의 위선적이고도 기만적인 세계인식일 뿐이다. 원죄와 추방, 대속과 구원이라는 줄거리는 어떤가. 마음에 인스턴트식 평안을 주는 하나의 괴이한 시나리오가 아닌가. 일단, 나는 죄진 게 없다. 설령 나도 모르게 어떤 끔찍한 죄를 저질렀더라도 예수님이 내 죄를 대속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게 죄가 있다면 그 죄는 오로지 내가 풀어나가야 할 나만의 고유한 과제일 것이다. 나는 오로지 내 책임이며 나만이 나를 구원할 자격을 지닌다.

 

그러나 더는 말을 말자. (그러기엔 너무 많은 말을 한 것 같지만) 모르는 세계에 대해서라면 개처럼 짖어대기보다 침묵을 택하자. 다만 이 모든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앞으로 파스칼보다는 몽테뉴를 더 찾아보게 될 것 같다. 오직 근대적 휴머니즘의 영향권 아래서 지적 성장을 이뤄왔고 또 이뤄갈 나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몽테뉴가 견지하는 아래의 입장에 동조한다.

 

[몽테뉴는] 자신이 속해 있고 자신이 인지할 수 있고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이 유형의 실재하는 세계만을 자신의 세계로 인정한다. 물론 이 세계는 유한하고 불완전하고 불안정하다. 우리는 그 안에서 그 어떤 완전성도, 절대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영역이고 그의 한계다. 인간은 그렇게 살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 '오, 나의 영혼아, 영원한 삶을 탐내지 말고 가능의 영역을 소진하라', 핀다로스(Pindare)의 이 명구는 바로 몽테뉴의 것이기도 하다. (...) 그는 자연을 넘어서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는 단호함이 있다. 인간이 자신에게 허락된 조건과 한계 안에 머무는 것은 그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지적 정직성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p.125~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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