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을 보라> 6에서 니체는 실제로 투병 중이거나 아니면 은유적인 차원에서 투병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고 느끼는 이들에게 유용할 만한 이야기를 한다. 그는 먼저 병들어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일종의 원한에 찬 상태라고 전제하고 “병자는 오직 하나의 위대한 치료책만을 갖고 있을 뿐”이라면서 이를 일컬어 “러시아적 숙명론”이라 칭한다.
러시아적 숙명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행군이 너무 혹독하면 결국 눈 위에 쓰러지고야 마는 러시아 군인의 무저항의 숙명론”이다. 혹독한 행군 속에서 러시아 군인은 저항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견딘다. 죽을 때까지 견딘다. 니체에 따르면 이 같은 자세는 단지 “죽음에의 용기”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가장 치명적인 상황 하에서 삶을 유지하게 한다. 마치 극한의 추위를 견디기 위해 동물이 신진대사를 감소시키고 겨울잠을 자는 것과 같은 이치로.
“원한이라는 격정에 의해 사람들은 가장 신속히 자기 자신을 불살라버린다. 노여움, 병적인 예민함, 복수할 수 없는 무기력, 쾌락, 복수에 대한 갈망, 모든 의미의 독살- 이런 것은 소진되어버린 자에게는 확실히 가장 불리한 반응 양식이다. 이것은 신경에너지의 급격한 소모나 해로운 배설의 병적 증가를, 이를테면 위에서 담즙의 병적인 분비 등을 발생하게 한다. 원한은 병자에게는 그 자체로 금물이다.”(342)
원한은 병자의 생존에 있어 생리학적으로 유해하다. 살아있는 것조차 가까스로 해내고 있는 병자에게는 원한 감정을 불태우는데 기력을 소진하는 행위야말로 목숨을 위협하는 사치이며 낭비다. 자신을 병자로 만든 치명적 환경 및 그러한 환경을 야기한 모든 원인에 대하여 일체의 원한을 철회하라. 이는 도덕의 명령이 아니라 생리학의 명령이다.
루쉰이 말했듯 절망은 무망하다 희망이 그러하듯. 어디 절망과 희망 뿐이랴. 분노와 원한, 복수심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신경에너지’를 급격히 소모시킬 뿐인 일체의 그 모든 격정적 반응들이 “풍부한 본성의 소유자”에게는 (부러 고딕체로 강조까지 하면서) “불필요한 감정”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극한 상황에 처해있는가. 그렇다면 러시아적 숙명론의 태도야말로 유일한 섭생법이다. 궁극의 자기 보존 조치이다. 무서우리만큼의 무반응. 조용히 온몸으로 견디는 것. “스스로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것, ‘다른’ 자기 자신을 원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그런 상황들에서는 위대한 이성 그 자체”다. 요근래 나 자신이 어떤 면에서는 사뭇 병자 같다고 느껴져서였을까, 니체가 말하는 이 ‘러시아적 숙명론’이란 것을 여러 번 곱씹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