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용어 바로쓰기
박명림, 서중석 외 지음 / 역사비평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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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의식을 구속하고 제약한다.
더군다나 역사용어는 당연히 그냥 어떤 사실을 단순히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건을 어떤 말로 이름지를 것인가에는 그 사건의 성격과 평가가 모두 들어있다고 봐야한다.
19세기 동학교도들을 중심으로 한 농민항쟁의 표현법인
동학농민운동, 농민반란, 갑오농민전쟁은 이 사건에 대한 전혀 다른 관점을 표현하고 있다.
농민반란을 제끼고 얼핏 비슷해보이는 동학농민운동과 갑오농민전쟁만 비교하더라도 항쟁의 주체와 주요성격을 누구를 중심으로 볼것인가에 대한 아주 큰 이견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제대로 된 역사용어 표현을 쓰기위해 나름대로 노력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솔직히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무지함을 통탄하게 된다.
얼마나 많은 용어들을 별다른 생각없이 써왔는지...
또는 별로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생각의 방향을 바꾸면 큰 문제가 될 수 있음도 느끼게 된다.
역사용어라는 것이 단순히 용어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관의 문제로 나아갈 수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대표적인 경우  - 삼국시대에 대한 문제제기
사실 삼국시대에 대한 문제제기는 오래된 것이었고, 따라서 교과서는 그에 대한 답을 준비해놨다. 즉 가야는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 뭐 나도 솔직히 여기에 대해서 딱히 동의한다기보다는 별 생각이 없었다. 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라는....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그런 생각이 얼마나 정치 중심적이며 지배층 중심적인 생각인가를 절감하게 되었다. 왜 한 나라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정치제제나 지배층의 지배력 정도라는 한 가지 요인에 의해서만 결정되어져야 하는가? 그들이 이룬 사회체제와 문화의 성숙도는 왜 일고의 가치도 업이 배제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 자체를 가로막는 대답이 바로 저 중앙집권화란 개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중앙의 권력집중에 너무도 익숙한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저 대답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한 건 아닌지.... 생각의 전환은 늘 쉽지 않다. 그럼에도 늘 필요한 것이다.

위의 삼국시대 용어문제와 통일신라시대라는 용어문제를 제외하면 나머지 책의 내용은 모두 근현대사에 해당한다. 아무래도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는 시대이다 보니 왜곡이나 용어의 혼란이 가장 심할 수 밖에 없는 시대이다.

이 책의 내용들은 일률적이지는 않다. 책의 머리말에 보면 전체 내용을 5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1. 그동안 통용되어온 기존의 용어를 비판하고 새로운 용어를 제안하거나 대안 검토를 제안한 경우
     - 삼국시대를 사국시대로, 신사유람단을 1881년 일본시찰단으로, 소군정의 실체를 묻고 소군정이라는 말 자체가 인정되지 않음을 얘기하는 경우, 외국 국가명에 들어가는 관습적 이미지를 바꿀 것을 제안하는 경우같은 것들이다. 이 중에서 외국 국가명 표기법에 대한 문제 제기는 참 신선했다. 관습이니까 뭐 그렇게 별 생각없이 써 왔었고 고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제기를 하기가 어려웠으리라 보이는데 그 관습 자체도 필요하다면 바꿔야 함을 역설한것이 좋았다고나 할까...

2. 혼용되고 있는 용어들을 소개하고 바람직한 용어를 대안으로 제시한 경우
  - 위안부, 정신대, 공창, 성노예는 모두 같은 사실을 지칭하고 있으나 혼용되어 쓰여지고 있다. 역사적인 상황을 정확히 고려한다면 군대 성노예가 맞는 표현이나 그 단어가 주는 어감의 섬뜩함이 현재 살아계신 당사자 할머니들에게 또다른 아픔이 될 것을 고려한다면 아직은 군 위안부로 그대로 통용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라는 말에 동의한다. 역사용어의 엄정함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
또 한 예로 무정부주의와 아나키즘이 혼용되고 있는데 무정부주의라는 말이 그 부정성을 강조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말이라는 역사적 연원을 밝히면서 아나키즘의 내용을 다시 정리해내는 것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읽다보면 용어의 정리속에서 역사적맥락을 다시 정리하기에도 깔끔한 책이다.

3. 혼용되고 있는 상이한 용어들을 소개하고 이 용어들이 사용되는 담론의 맥락을 비교분석한 경우
   --- 특별한 대안이 제시되어있지 않고 그저 각 용어들이 사용되는 맥락을 다시 한 번 짚어보는 경우이다. 마지막에 소개된 중국애국주의의 실체: 신중화주의, 중화패권주의, 민족주의를 인상깊게 읽었는데 아무래도 동북공정이니 해서 시끄러운 덕분이다. 이것은 용어의 문제라기보다는 현재의 중국의 애국주의를 어떻게 볼것인가의 관점을 얘기하고 있다. 결론은 중화패권주의나 신중화주의로 보는 것은 어쩌면 지나치게 앞서가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 현재의 중국의 애국주의는 민족주의의 수준에서 얘기할 수 있으며 그것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더 두고봐야하지만 그렇다고 미리 앞서가서 난리를 부릴 이유는 없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중국을 견제하고자 하는 미국의 논리에 우리가 그대로 휘말려드는게 아닌지 생각해볼 문제다. 어쨌든 제발 동북공정이니 하는 것에 대해서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그만했으면 좋겟다. 지금은 차분하게 학문적인 대응과 토론이 필요한 단계가 아닐런지....

4. 의미변천사를 포함하여 기존 용어의 의미를 상술한 경우
책의 전체 내용들 중에서 그나마 가장 쉽게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글들이다. 역사적으로 백성, 평민, 민중이라는 용어의 사용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 지를 적은 글이라든가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시대에 따라 어떤 방법으로 쓰여져왔는가 같은 내용들이다.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의사와 열사는 어떻게 다른가" "양력과음력'의 사용 같은 경우도 편하게 재밌게 읽을 수 있는 글이었다.

5. 복합적인 성격을 가진 경우
해방공간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과를 둘러싼 찬/반탁운동에 대해 찬탁이라는 용어가 성립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당시의 사회상과 좌우익의 대립을 다시 한 번 차분하게 정리하는 글도 괜찮았고, 한국전쟁을 표현하는 6.25라는 용어가 내포하고 있는 반공적, 냉전적 논리를 다시금 되돌아보게 하는 글도 좋았다. 또한 6.25라는 용어를 폐기하고 새로운 평화의 페러다임을 제공하는 논리도 신선했다.

워낙에 많은 필진들이 참가하다보니 일관된 관점이나 서술방향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 대해 용어를 통해 사고의 전환이나 패러다임의 변화를 고민해볼 수 있게 하는 글들이 많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책의 모든 글들에 동의하는것은 아니고 또 어떤 부분은 지나친 문제제기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전체적으로 대부분이 고민을 하고 새롭게 생각해야할 이야기들이었다는 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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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10-15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에 담아 갑니다. 축하드려요^^

바람돌이 2006-10-16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갈 문제들을 제대로 다루고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잠 안 올때 아무곳이나 펼쳐서 한 장씩 읽어나가도 괜찮은 책이라는 생각도 하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