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구회 추억
신영복 지음, 조병은 영역, 김세현 그림 / 돌베개 / 200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교사로서 첫 발령을 받아 간 학교는 이 대도시에서도 외곽지대, 아주 가난한 동네였다.
여기 무슨 학교가 싶을정도로 온갖 공장으로 둘러싸인 낮에는 사람그림자 보기도 힘든 동네.
이 도시에서는 1960, 70년대 한국의 산업을 이끌어갔던 그러나 이제는 대부분 쇠락해가는 공단지역내에서 아직 남은 공장들에서 뿜어내는 온갖 오염물을 들이마시며 사는 곳이었다.

당연히 아이들은 가난했다.
한 해는 우리반에서 제일 잘 사는집 애가 동네에서 쬐끄만 세탁소를 하는 집이었다.
가난했을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애정이나 보살핌에도 늘 굶주려 있는 아이들이었다.
그 때는 한 반에 50명정도 됐었는데 3년간 담임하면서 대졸 학부모 한번도 못봤고, 그나마 부모중 하나가 고졸인 경우도 겨우 10여명 정도? 나머지는 중졸, 국졸, 아니면 무학.....
1960년대 얘기가 아니다. 1996년의 얘기다.

다행히 선생님들은 대부분 아이들을 늘 애처롭게 바라보며 뭔가를 더 주기 위해 그들을 좀 더 안아주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이 많았다.
몇몇은 내가 보기에도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올인하는 헌신적인 선생님들도 꽤 되었다.
아이들은 중학생인 주제에 늘 담배냄새에 쩔어다녔고 가끔은 술이 덜깨서 헤롱거리며 등교를 하기도 했고 행동도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로 무지막지하게 험했지만 그래도 아이들이었다.
늘 애정에 굶주린 아이들은 조그만 관심과 배려에도 감격하고 선생님을 졸졸 쫒아다니는....

같이 초임발령을 받은 선생님 중에 남자 체육선생님이 있었따.
적당한 키에 괜찮은 외모에 초임답게 늘 열성적이었던...
그가 특별히 뛰어난 건 아니었던 것 같다.
다만 그 선생님은 체육시간에도 다른 사람들처럼 아이들만 뛰게 하지 않고 늘 같이 뛰고 하나 하나 아이들을  지도했다.
그리고 방과후에도 늘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같이 축구를 하거나 농구를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한 번씩 아이들과 얘기를 하다보면 아이들이 "체육선생님처럼 되고 싶어요"라고 자주 말하였다.
나중에 다른 학교에 가서 느꼈지만 다른 곳의 아이들은 선생님을 아무리 좋아해도 그렇게 말하는 아이들은 별로 없었다.

이 가난하고 작은 아이들에게 체육선생님은 무엇이었을까?
이제 막 사춘기를 통과하고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중학교 남자애들에게....
나는 그때 깨달았다.
이 애들에게 체육선생님은 그들이 처음으로 제대로 만나는 역할모델이라는 것을.
아이들의 집이나 주변은 생활고에 시달려 늘 아이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쏟을 수 없거나 아니면 술에 쩔어있거나, 아니면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무책임하게 사라져버렸거나 혹은 폭력적이거나 그런 남자 어른들로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tv의 스타는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었지 그들의 현실적인 모델링의 대상이 될수는 없었다.

신영복선생의 청구회추억을 읽으면서 문득 그때의 일들이 이렇게 장황하게 떠오른다.
아주 오래전에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 증보판을 보지 못했으니 처음 접하는 에세이다.
아이들을 만나고 청구회를 만든게 신영복 선생님의 20대였던듯 하다.
신영복 선생의 글을 읽을때면 느껴지는 인간으로서의 깊이가 난 오랫동안의 감옥생활로 인한 사색과 관조덕분일거라고 생각했다.
또한 제목만 봤을때는 무슨 노동조합내의 소모임 비슷한 걸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아이들과의 모임이라니... 잠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하다.
20대는 이제 막 사회에 대해 눈을 뜨고 또한 그것이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쉬운, 그래서 거시적인 것에 목을 매고 나머지 자잘하다고 생각하는 인간관계나 상황들은 쉽게 무시되어버리는 그런 시기인듯하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랬다.
그런데 그런 20대에 누가 소풍길에서 생전 처음 만난 아이들을 신경쓴단 말인가?
신영복 선생이니까 그랬겠구나 싶어 그의 사람됨의 깊이가 더 깊숙히 느껴진다.

가난한 동네의 그만그만한 아이들에게 당시의 신영복 선생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내 예전 학교의 그 체육선생님 같은 이는 아니었을까?
그 체육선생님은 모든 조건이 일단 주어졌지만, 신영복선생의 경우 자신이 그 조건을 만들고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 정성을 다했다는 면이 다르긴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다가갔으리라 싶다.
아이들의 성장기에 어떤 역할모델을 만나는가는 정말로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은 어쩌면 아이들의 일생을 두고 마음속에 담아두게 되는 그런 믿음이 되기도 한다.
신영복선생은 그것을 이론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알고 있었던 듯 하다.
비단 아이뿐이랴.
누구든 사람을 만날때 내가 어떤 마음으로 한 사람을 대해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세상에 나보다 못한 사람은 없다.
세상에 내가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은 없다.
누구를 만나든 나는 나의 진심과 성의를 다하고 있는가?
피상적인, 마음없는 만남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를 돌아보고 나의 주변 사람을 돌아본다.

덧붙이는 글
1. 따뜻한 진달래빛 표지의 그림부터 책속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이야기 그림들은 어떻게 보면 일면 촌스러워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다시 보면 그 색채들은 어릴 적 향수를 아련히 자극하고 과감하게 생략된 얼굴의 이목구비는 오히려 아이들과 신영복 선생님 사이에 흐르는 마음을 느끼게 해준다. 그림이 아니라 글이 주인이라며 한 발 물러서 있는 느낌이지만 그럼으로 해서 또한 글에서 느끼는 따뜻한 감성을 포근히 감싸주는 그림이다.

2. 아래에 실린 서평들을 읽다보니 이 책의 출판에 대한 비판적 시각들이 만만찮다.
비판의 요지는 결국 우려먹기이며 출판사의 상업적 의도가 지나치게 드러난다는거 같은데 일면 동의되는 부분이 없지는 않다.
이미 발표된 글을 다시 우려먹으면서 책 역시 고급재질에 만만찮은 가격이고 책의 분량 역시 턱없이 작으니 이런 비판이 나오는 것일게다.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굳이 여기에 대해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싶은 건 또 왜인지...(내가 출판사 관계자도 아닌데 말이다. ㅎㅎ)
책이라는게 같은 글이라고 해서 꼭 같은 형식으로 한 번만 출간될 이유가 있는지?
또 개인의 취향이겠지만 난 이 책속의 그림들이 맘에 든다.
글 뿐만 아니라 그림 때문에 소장하고 두고 두고 보고싶다는 생각도 들고....
어떤 이에게는 이 길지 않은 글과 그림이 마음의 위로가 되거나 자신을 반추하기에 딱 좋은 그런 책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출판사의 상술이라는 것도 이런 책이 시리즈로 나오고 그것에 올인하는 출판사라면 분명히 퇴출되어야 마땅하리라 생각된다.(새로운 책과 작가, 기획에 무능한 출판사일 것이므로...)
하지만 내가 아는 한 돌베개라는 출판사는 그렇지 않다.
돈 안되는 무수한 책을 뚝심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요즘의 사회에서는 고마운 그런 출판사다.
그런 출판사에서 이런 책을 내놨다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구판을 읽고 뒤에 나온 신판이나 엽서 같은 책들을 보지 않음으로써 이 글을 읽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도 있지 않았을까?
또 굳이 그게 아니라도 글과 그림을 어우러지게 하여 보는 책보다는 하나의 예술품으로서의 책에 방점을 두는 그런 책을 한번쯤은 시도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지 않았을까?
보기에 아름다운 책, 그 자체로 예술이 되는 책 말이다.(그것이 개개인의 취향에 맞아떨어지는가 아닌가의 문제는 순전히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변명 아닌 변명이 길어진다.
그저 돌베개라는 출판사에 믿음을 가지고 있고, 이 책을 두고 두고 읽다가 우리 아이들과도 언젠가는 같이 읽고 싶은 이의 변명이라고 해두자.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몽당연필 2008-08-24 0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장하는 아이들이 어떤 역할모델을 만나는가가 정말 중요한 문제다....그렇군요. 공감가는 대목입니다. 제 학창시절을 돌아보면 뚜렷하게 생각나는 선생님이 안 계십니다. 아마도 제가 무딘 탓이 크겠지만 그래도 해마다 스승의 날이 되면 왠지 허전해지더군요. 이맘때마다 생각나는 선생님이 계시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도 들구요. 자연히 울아이는 저와 같지 않길 바라게 되더군요.
그나저나 '청구회'가 초등학교 아이들과의 모임이라니, 역시 신영복 선생님이란 생각이...^^

바람돌이 2008-08-24 23:59   좋아요 0 | URL
그렇죠. 신영복 선생은 젊을때조차도 약간 도인같은 분위기를 풍기더군요. 요즘은 좀 더한 것 같긴하지만... ^^ 학창시절 정말 존경할만한 선생님을 만나는 것도 일종의 행운이란 생각이 들어요. 참 드물었잖아요. 요즘 아이들은 어떻게 느끼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마노아 2008-08-24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을 보면서 이게 어떤 모임일까 궁금했는데 리뷰 보고서 의문이 풀렸어요. 정말 신영복 선생님 다운 모습이네요. 짠하고 먹먹하고 그래요...

바람돌이 2008-08-25 00:00   좋아요 0 | URL
제목만 보고는 신영복이라는 이름값과 맞물려 뭔가 좀 그래도 불온한게 있는 단체였으리라 지레짐작하기 딱 쉽잖아요. 근데 초등학생이라니... 걔들과 책도 한달에 한권씩 같이 읽는데 로빈훗 이런거더라구요. ^^ 그래서 신영복선생이 더 존경스러워지는건 참 뭔 맘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