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작품 을 보고 한 시대를 조망할 수 있도록 미술 공부에첫걸음을 뗀 분에게는 ‘완전한 생애 첫 미술사 수업‘, 적당한 수준을넘어 미술을 본격적으로 알고 싶어진 분들에게는 ‘제대로 된 생애 첫미술사 수업‘으로 이 책이 제 역할을 다하기를 바랍니다. - P10

조토가 위대한 이유는 중세의 공식들을 싹 다 깨부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신의 눈이 아닌 인간의 눈으로 대상을 관찰했습니다. 중세가
‘배운 대로‘라면 조토가 띄운 르네상스는 ‘보이는 대로‘ 입니다. 조토는 인간의 표정과 감정을 공부했습니다. 신이든, 성인이든 상관없이 그 대상에 자신이 탐구한 형형색색의 감정을 그려 넣었지요. - P29

바로크 미술의 핵심은 역동적 구조, 강렬한 색채입니다. 15세기 르네상스미술이 안정감과 단정함, 절제된 표현을 추구했다면, 바로크 미술은과장과 극적 효과를 추구합니다. 르네상스 미술이 깔끔한 교복 차림의 모범생이면, 바로크 미술은 것을 바짝 세운 채 껄렁하게 앉아 있는 반항아 정도로 볼 수 있겠습니다. 애초 바로크라는 말 자체가 ‘현란한‘, ‘불규칙한‘, ‘변덕스러운‘ 같은 의미로도 통합니다. 포르투갈어로 바로크는 ‘비뚤어진 진주‘라는 뜻입니다. - P96

윤두서는 수백 년간 이어진 조선의 화풍을 바꾼 혁신가입니다.
조선 땅에 등장한 첫 사실주의 화가입니다. 사실주의는 보이는 걸 그대로 담는 화풍입니다. 피사체의 외면을 넘어 요동치는 내면도 그립니다. 나아가 그 시대상까지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하는 기법입니다. - P196

윤두서는 조선이 낳은 첫 서민풍속화가이기도 합니다. 그의 사실주의는 자화상에만머물지 않았습니다. 윤두서는 서민을 그림의주인공으로 둡니다. 그간 아무도 하지 않은파격이었습니다.  - P199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기성 화단을 제대로 한 방 때리는 그림이었습니다. 이 그림은 감각을 다룬 작품입니다. 마네는 인간의 오감을 적극 활용했습니다.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인간의 누드를 그렸습니다. 뱃살이 접히는 걸 보고는 이마저도 똑같이 묘사했습니다. 그늘이 진 곳에도 빛을 표현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안 들리고, 무엇 하나 만져지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이 현실에선흔치 않다는 이유였습니다. 지금껏 인간의 주관이 이렇게나 가득 스며든 작품은 처음이었습니다. - P212

쇠라는 인상주의가 흩트려놓은 조형 질서를 다시 구축한 화가였습니다. 인상주의의 무기인 ‘감각‘이 신중한 계산, 입증 가능한 과학과도 함께 갈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한 혁신가였습니다. 그의 점묘법으로 인해 인상주의는 진화했습니다. 색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쇠라가 없었다면 인상주의 또한 ‘새로운‘이라는 수식어를 달지못한 채 잠깐 반짝인 뒤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신인상주의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이 화풍에서 영감받은 야수주의와 추상회화의 등장 또한 한참 늦어졌을지도 모릅니다. - P264

 세잔은 선과 색으로 대상을 모방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선과 색으로 대상에 ‘새로운 형태‘
를 부여하는 일도 미술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친 겁니다. 이는 급진적 발상이었습니다. 인상주의도 이해받기 힘든 시절에 이런 생각을 이해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현대에 들어서야 세잔의말이 그림에서 형태를 해방한 선언문으로 인정받습니다. - P299

세잔이 여러 방향에서 대상을 관찰하고 표현하던 버릇은 피카소가 이어받았습니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대상을 조각조각 낸 뒤캔버스 위에서 재창조했습니다. 입체파가 탄생한 겁니다. 피카소의<아비뇽의 처녀들>은 세잔의 <대수욕도>(그림 9)를 본 뒤 그린 작품입니다. 피카소와 함께 입체파를 이끈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역시 "세잔의 작품을 보자 모든 게 뒤집혔다. 나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다시 생각해야 했다"고 했지요. - P309

이런 점에서 로댕이 조각계에 남긴 업적은, 마네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미술계에 안긴 충격과 같다는 말을 합니다. 로댕은 조각의 땅.
인상주의 화가들은 미술의 땅을 넓혔기 때문입니다. 로댕 덕에 "조각은 아름다움 없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말이 설득력을 갖고, 마네와모네 등 인상주의 무리로 인해 "그림은 예쁜 장면 없이 예쁠 수 있다!"는 말이 생명력을 얻었으니까요.  - P322

한편 클림트를 내세워 회화 운동으로 시작한 빈분리파의 성과는건축과 공예 영역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찍어낸 듯 지을 수 있는건물, 별 생각 없이 만들 수 있는 공예품에도 예술을 투영시킨 것이이들의 가장 큰 공로 중 하나입니다. 고루하지만 않으면 된다는 식의빈 분리파는 엄청난 포용력을 가졌었는데요, 이들의 이상은 그들만의 예술 타파, 즉 생활 속의 예술 실현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회화보다 더 큰 영역으로, 회화보다 일상적인 영역으로 눈길을 줄 수밖에없었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과 사람이 쓰는 것, 건축과 공예로 무대를넓힌 이유였습니다. - P354

회화란 ‘대상‘ 없이 그 자체로 홀로 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칸딘스키의 신념이었지요. 생각, 즉 아이디어만으로도 그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대상 없이 점, 선, 면과 이를 아우르는 색만으로도 보는 이에게 감동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칸딘스키로 인해 회화는 대상에서조차 해방을 맞이합니다. 이렇게 회화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무언가를 재현하기는 해야 하는 것"이라는 불문율마저 무너집니다. - P401

반면 몬드리안 표 ‘차가운 추상‘은 감정 따위는 한 방울도 섞지않은 건조한 추상화입니다. 오직 질서와 규칙뿐입니다. 대상의 영혼을 그리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내다 버립니다. 감정을가라앉힌 채 천천착을 거듭하다 보니 시간도 오래 걸립니다. 몬드리안은 그런 점에서 해방, 폭발이 아닌 절제까지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화가라는 평도 받습니다. 무표정의 배우가 연기하는영화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겁니다. - P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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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8-09 2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언제 베트남에서 돌아오셔서 사적이고 지적인 미술관을 가셨습니까!

바람돌이 2023-08-10 15:40   좋아요 1 | URL
하하하~~ 베트남에서 돌아와서 일상으로 못돌아오고 미술관으로 잠시 피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