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제는 이런 ‘불편한‘ 작품을 그린 과거의 거장들에게 그리고그들을 거장으로 만들어낸 시스템에 대해 질문을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든다. 미술계의 일원으로 다양한 전시를 기획하고 글을 쓰면서, 어떤 작품이 신화로 떠받들어져 남겨지기 위해서는 특정한 ‘인정 시스템‘의 내부로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누군가가 이미 만들어놓은 특정한 기준의 그물로 거른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어야 하는 일이다. 누군가의 취향, 누군가의 이론, 누군가의 지원이라는 성근 그물망 안에서 살아남는 과정은 그 작품에 대한 한 시대의 총체적 평가라고 볼 수도있다. 그렇다면 이 시스템을 만드는 ‘누군가‘는 도대체 누구인가. - P5

이제 질문을 바꾸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 위대한 여성미술가는 없는가" 대신, "여성 미술가가 남성과 동등하게 위대한 화가가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는가"라고 말이다. - P24

그러나 안귀솔라의 자화상은 상류층 여성의 필수 교양인 악기연주를 하면서 하녀의 보필을 받는 사랑스러운 여성으로 그려져 있다. 당시 여성에게 요구되던 덕목과 화가로서의 정체성을 결합하는 일종의 자구책으로, 다른 화가의 모델이 된 것 같은 자화상이 탄생한 것이다. - P31

작품을 바라보는 데있어서 시선의 문제는 단지 원초적 욕망에 관한 것일 뿐 아니라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다. - P58

크루거는 이작품을 통해 여성 조각상을 바라보는 남성 일반의 에로틱한 시선을 지적한다. 성별이 구분되어 있는 인간에게 에로티시즘 자체는 당연한 감정이지만, 그 시선의 방향이 일방적이라면 시각적 통제, 폭력성의 관점으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말이다. - P84

남성 누드상이 누가 자신을 바라보든 전혀 의식하지 않는 반면, 지금까지 제작된 많은 비너스상은 자신이 관람객의 시선에 노출되고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여성 누드는 신화 속에서 행동하는 주체가 아니라 시선의 대상으로 만들어진, 보여주기 위한 신체이다.
남성 관객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는 여성 누드는 신화에서 빠져나와 현실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다. - P96

 지금까지는 아무런 감흥 없이 오달리스크를 그린 그림을 감상했을지 모르지만, 앞으로는 이 작품을 보았던 것과 같은 불편한 느낌으로 앵그르의 <터키탕>을 바라보도록말이다. 슬레이의 그림은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과 남성을 바라보는 시각이 미술사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는 점, 그리고 여성의 시각에서 미술사를바라볼 때 느끼는 위화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 P119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가만히 있지 않고 행동하는 여자들이었다. 자신의 힘과 의지로 자신과 타인의 삶을 바꾸고 역사를 바꾼 여성이었다. 완력에 의해 납치당해서 몸부림치는 여성의 정반대편에 서있었던 여성, 오히려ㅠ그 힘으로 남성들을 위협하는 여성이었다. - P132

근대 이후 유디트는 남성으로부터 자신의 성적 욕구를 채운 뒤 그 남성을 살해하는 팜므파탈로 다시 각색되기 시작한다. 민족을 구하기 위해적장을 홀로 찾아간 용기는 음탕하고 선정적인 행태로 바뀌고, 영웅적인모습은 모두 사라져 성욕의 화신으로 거듭났다. 당내의 시대정신이라 할만한 이러한 각색은 비단 미술뿐 아니라 문학, 연극 등에서도 동시적으로이루어졌다. - P146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에서 아기 엄마든 아니든 상관없이 젊은 여자들을 납치해가는 이 야만의 장면은, <레우키포스 딸들의 납치>에서 그랬던 것처럼 대단히 남성적이고 영웅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쯤 되면 여성을 납치하거나 성폭행하는 장면들은 신화나 역사를 빙자해 여성에 대한 폭력을 에로티시즘과 영웅주의로 둔갑시킨 일종의 포르노그래피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화가들은 잔혹하고 무자비한 납치 장면들을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써 관람객에게 폭력과 에로티시즘이 결합된 결과로서의 흥분감을 주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납치를 당하면서 여성들이 겪게 되는 성적 학대의 측면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그저 이 격렬한 장면을흥미롭게 즐겼던 주체는 누구였을까? - P174

여성에 대한 폭력을 다루는 여성 미술가들은 여성으로 살아왔던 삶의경험에 기초하고 있다. 과거의 남성 작가들이 납치와 성폭행이라는 주제를 성적 판타지를 자극하기 위해 사용한 데 반해, 여성 미술가들은 전혀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여성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여성의 납치와 성폭행과살해라는 주제에는 어떤 에로틱한 시선도 개입되지 않고,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승화‘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들의 작품은 집요하게 묻고 또 묻는다. 과거의 작품이 보여주는 주제 해석의 태도는 어쩐지 이상하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그러한 작품은 누구의 시각에서 만들어져 누구의 눈에 의해 감상되도록 고안된 것인가? 여성에 대한 폭행의 장면이 아름답게 그려지는 것은 정당한 재현의 방식인가? - P189

거울을 보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거나 거울 앞에 누워 나른하게 자신을감상하는 그림 속 여성은 진짜 여성이 아니고, 그러한 여성을 보고 싶어 하는 남성 시선의 산물이라는 관점의 전환을 불러온 것이다. - P207

‘출산의 신비‘
가 아니라 생과 사를 넘나드는 여성의 실존적 경험인 출산을 그림으로써말이다. 남성의 시각에서 에로틱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여성의 누드가아니라 대개의 여성이 실제로 겪는 생리적 사건들 속의 누드는 기존의 아름다움의 맥락에서 멀리 벗어나 있다. 오히려 그 모습은 추에 가깝다. 그러나 여기서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아름다움과 추함을 판단하는 주체는 과연 누구일까? - P244

여성들은 다음과 같이 질문할 권리가 있다. 정확히 말해 이 작품은 누구를위해 에로틱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남성이 지배하는 에로틱한 이야기에왜 내가 복종해야 하는가? 성도착적인 남자의 시선이 에로틱한 이야기와 동등하거나 동일시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인가? 미약하면서도 유혹적인 청소년의 이미지를 보편적인 에로티시즘으로 만들면서 나의 성을 계속 신비화시키고 있는 담론을 내가 왜 승인해야 하는가? - P282

남성 노인의 묘사가 미추에 관계없이 나이만큼의 지혜와 경륜을 보여주는 반면, 여성 노인은 왜 젊은 날의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기괴한 늙은이로 묘사되는 것인가. 그리고 왜 여성 노인의 모습이 인생의 허무함을 깨달으라고 가르치는 알레고리로 소비되는것일까. 남성이건 여성이건 인간으로 태어나 살다 보면 늙기 마련이고, 인샘은 허무를 향해 달려간다. 노화는 인간 보편의 문제임에도, 이러한 대비가 나타나는 이유는 여성의 존재에 대한 혐오가 은연중에 짙게 깔려 있기때문이 아닐까. - P295

정신이 온전치 않은 동네 미친년들은 머리에 꽃을 꽂고 다녔다고 한다. 몸은 다 컸지만 동네 어린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며 놀려도 놀림을 받는줄 모르고 신나게 뛰어다니는 여자들이 있었다. 동네바보형과 쌍벽을 이루며 어느 마을에나 있었다는 그들은 조신하지 않게 돌아다녀도 ‘미친년이니까‘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미친년‘의 뉘앙스 통제 범위 밖을 벗어나자기 멋대로 돌아다니는 여자들, 기존 질서에 종속되지 않고 고정되지 않으며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여자들이라는 뉘앙스에서, 사진을 매체로 다루는 작가 박영숙은 어떤 반짝임을 보았다. 1999년에 시작된 박영숙의 ‘미친년 프로젝트‘는 ‘미친년‘이라는 용어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에 주목했다. - P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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