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펠 씨는 참 묘하다고 생각했다. 죽은 사람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죽은 사람의 손을 만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필체에서도 뭔가 죽은 것이 느껴졌다.  - P10

어쩌면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 속에서 뭔가 특이하고, 중요하고, 아주 극적인면을 보고 싶어 하는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자신이 경험한 사건에 주목해 주기를 바라고, 그로써 더 많은 관심과 경탄의 대상이 되기를 기대하는가 보다.
- P19

 하지만 인생이란 별난 모험이아닌 일상적 법칙의 흐름이다. 삶에 나타나는 특이하고 비일상적인 것은 단지 삶의 바퀴가 덜컥거리는 소리일 뿐이다.
오히려 정상적이고 평범한 삶을 찬미해야 옳지 않을까? 덜컥거림이나 비통함이 없고 산산이 부서지지 않았다고 해서 부족한 삶일까? 그 대신 우리는 많은 일을 해냈고,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책임을 완수했다. 나의 삶은 전체적으로 보아 행복했고, 소심하지만 목가적인 삶에서 발견한 조그맣고 규칙적인 행복은 부끄러울 게 없다.
- P20

나는 오래전에 세상을 뜬 이 사람들을 회상하면서, 그때의모습으로 그들을 다시 한번 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들 모두 각자의 세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세계 속에서 각자의신비스러운 일과를 영위해 나갔다. 모든 직업은 그 자체로하나의 세계였고, 다른 소재와 다른 의식(儀式)을 가지고 있었다. - P27

(〈행복한 청춘 시절)이라는 말은 얼마나 단순한 표현인가! 그런 표현과 더불어 우리는 분명 그 당시 건강했던 치아와 위장을 생각할 따름이지 고통스러워하던 영혼은 간과해버린다. - P57

 세상 끝에 있는 마지막 역에서 아버지의 소목 공장 마당을 연상시키는 목재 더미 위에 앉아 있을 때 나는 난생처음으로 경이로움과 무상함을 느꼈고, 인생의 아름답고 단순한 질서를 좇으며 살기 시작했다.
- P86

사랑은 그런 식으로 전개되었다. 처음에는 서로를 소유하는 것으로 족했고, 그것만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자, 우리는 공동의 세계를 위해 물건들을 소유하기시작했다. 어떤 새로운 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 때마다 말할 수 없이 기뻤고, 우리의 소유가 더 많아지도록 앞으로 실천에 옮길 계획들을 짰다. - P109

그래, 하지만 그녀에게 다른 선택이 있었나? 이혼을 하거나, 결혼한 사람들 간에 그러듯 은밀하면서도 광적으로 서로미워하거나, 아니면 남편의 게임 룰을 인정하여 그가 주인이고 모든 것이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 말고 서로를 결속시켜 주던 것이 사라지자, 그녀는 남편의 것으로남편을 붙잡으려 했지. 그의 안락과 습관과 욕구들로 말이다.
그러자 단지 남편만이 존재하게 된 거야. 그의 가정과 부부생활은 오로지 그의 편안과 영달을 위해서만 존재했지. 그는역과 가정의 주인이었어. 그것은 작고 폐쇄된 세계였지만 그의 것이었고, 그를 숭배했어. 그때가 사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지. 그러기 때문에 죽은 아내를 회상할때면 실은 바로 이 시기를, 그의 자존심을 강하고 건강하게) 만족시켜 주던 이 시기를 생각하는 거야. - P146

그에게는 수많은 가상(假想) 인생들이 있었다. 온통 연애 사건과 영웅적 행위와 모험으로 가득한 삶으로, 그 속에서 그는 늙지 않는 청년이자 건장한 기사였다. 때로는 죽을 때도 있었지만, 늘 용감했고 희생적인죽음을 맞았다. 훌륭한 행동을 하고 나서는 뒤로 물러났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이타적이고 고귀한 행동에 감동을 느꼈다. 그런 겸손한 모습에서 다른 현실의 삶으로 깨어나고싶지 않았으며, 현실의 삶에는 훌륭한 행동을 할 일도, 고매하고 희생적으로 자신을 부정할 일도 없었다.
- P178

평범한 자아는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자신의 일을 했고, 억척스러운 자아는 그 일을 상품화하면서한눈팔지 않고 이 일은 하고 저 일은 하지 말라는 지침을 정해 주었으며, 우울증 환자인 자아는 가장 괴로워하며 어두운표정을 지었지만 자신을 파멸시키지 않았고 모든 일을 적당히 처리했다. 그처럼 세 개의 상이한 본성이었지만 서로 불화하지는 않았다. 말없이 타협했고, 아마도 서로를 배려하기도 했을 것이다.
- P202

그것은 나의 자아와 대립했고,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몰락이나 자기 파멸을초래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전체를 볼 수 없는 존재였고, 항상어둡고 은밀하게만 경험될 뿐이었다. 마치 짐승의 악취가 나고 자물쇠가 걸린 더러운 판잣집에서 그랬듯이.
- P204

 인간은 왜 늘 그런 일을 하는 건지. 그저 존재하면서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그것은 아주 조용하고 현명한 죽음이다. 나는 그게 나름대로 삶을 부정하는행동이었음을 알고 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런 행동은 다른어떤 삶의 연관성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다. 그 삶은 단지 존재했었고,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게 허무한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수는 없었으니까.
- P211

이제 나는 가능성이란 게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인생은 여러 상이하고 가능한삶들의 집합이며, 그중에서 단지 하나 또는 몇 개만이 실현되는 반면, 다른 삶들은 단편으로서나 가끔 발현되든지, 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 P213

그것이 진정하고 평범한 인생이며, 가장 평범한 인생이다.
내 것이 아닌 우리의 삶, 우리 모두의 광대한 생명 말이다. 우리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면 우리 모두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평범하면서도 그것은 축복이다.  -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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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03-15 16: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의 글을 읽고 - 평범하기도 힘들다는 걸 알게 되면 인생을 조금 알게 된 거라고 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라는 말을 떠올리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 봅니다.

바람돌이 2022-03-20 23:58   좋아요 0 | URL
어쩌면 가장 어려운게 평범하게 사는게 아닐까 뭐 그런 생각도 가끔합니다. 평범의 기준이 또 사람마다 다른게 함정이겠지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