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거는 한번 더 돌아보았다. 푸르스름한 산이 그림자처럼 보였다. 멀어서 갈 수 없는곳이었다. 안개 낀 하늘 속에 서서히 녹아 드는 푸르른 산 어딘가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놓고 온 기분이 들었다.
- P95

우리 시대에서 평화를 찾아 헤매는 전설 속 비둘기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이 비둘기는 불안에 떨며 지친 날개로 우리 머리 위를 날아다닌다. 가끔 밤에 악몽에서 깨어나면 허공에서푸드덕대는 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어둠 속을 쫓기듯 날며 어딘가로 정신없이 도망지는 소리 말이다. 우리의 온갖 암울한 상념이 비둘기의 날개를 타고 떠다니며, 우리의 온갖 소망이 비둘기의 불안속에 일렁이고 있다. 하늘과 땅 사이를 떨며 나는 길 잃은 비둘기,
일찍이 신뢰를 저버린 전령이었던 이 비둘기는 이제, 인류의 선조노아에게 우리의 운명을 알리려 한다. 수천 년 전에 그랬듯이, 세상은 누군가 손을 내밀며 이제 시험은 끝났다고 선언해 주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다.
- P175

"안녕히 가시오!" 저 위 창가에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환한 얼굴은 착한 망상이라는 흰 구름에 사여 살포시 우리의 역겨운 현실 세계 위로 솟아 있었습니다. 그 얼굴이 쫓기듯 거리를 바삐 오가는 퉁명스러운 사람들 위에 둥둥 떠있던 광경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오래된 속담이 절로 떠오르더군요. 괴테가 한 말일 겁니다. "소장가는 행복한 사람들이다."
- P259

그런 대담한 행동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을 틈도 없이, 그 무엇‘은 마술사처럼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어떤 의지는 그들을 밀쳐서 떨어트립니다. 바로 그렇게,
저는 당시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맑은 정신으로 따져 보지도 않고카지노에서 출구로, 출구에서 테라스로 그 불행한 사람을 뒤따라간 것입니다.
- P297

이 무서운 우연이 아니었더라면 저 역시 버림받고 망가진 사람이 얼마나 열렬히, 얼마나 필사적으로, 얼마나 거친 욕망을 품고,
살아 있는 붉은 피를 한 방울이라도 더 빨아 마시려 드는지를 상상도 못 했을 것입니다. 20년 내내 온갖 마성적인 힘과는 거리가먼 삶을 누렸던 저로서는 자연이란 것이 종종 얼마나 기막히게 탁월한 솜씨로 열기와 냉기를, 죽음과 삶을, 도취와 절망을, 찰나의순간에 농축해 놓는지를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날 밤에는싸움이 벌이졌고, 대화가 오갔으며, 열징과 분노와 미움이 가득했고, 맹세하는 사람은 감정이 복받쳐 눈물을 흘렸습니다. 천년과도같은 밤이었습니다. 이 밤에 우리 둘은, 하나는 죽을 작정을 하고다른 하나는 뭐가 뭔지도 모르는 채, 서로 부둥켜안고 낭떠러지로비틀거리며 떨어졌다가 죽음과도 같은 혼란을 겪은 후 다른 모습으로 완전히 바뀌어서, 다른 감각과 다른 감정을 지니고 태어났던것입니다.
- P309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한번 마음에 담았던 것들을 이야기로 풀어낸다면, 어쩌면 사라지지 않는 강박관념과 끊임없이 그때를 회상하는 증상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아마 내일그리로 가서, 내 운명을 마주친 바로 그 카지노로 들어설 수 있을것이고, 그 사람도 나 자신도 증오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과거 위에 육중한 무게의 돌을 올려놓고 과거가 되살아나지 않도록 막고 있는데, 이야기를 하고 나면 그 돌을 영혼에서 떨쳐낼 수있을 것 같았습니다.  - P347

나, 츠바이크라는 악기에 달린 모든 현이 처음으로 열렬히 소리를 내게 되면서 이전에 기회 닿는 대로 만든 작품에 깃든 유희적 요소는 이후 열정으로 변모했다.
-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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