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지도자들은 과거 번이나 신분 계급에 따라 나뉘어 있던 농민들을 의도적으로 단일 국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편입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에도 시대 농촌생활과 긴밀하게 엮여 있던 각 지방의 제도와 문화적 관습을 대체하는 새로운 정치적·사상적 프레임워크를 성공적으로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앞서 언급한 자유민권운동처럼 격렬하고 때로는 폭력적인 저항에 부딪힐 것이뻔했다.  - P138

이런 프레임워크를 지탱하는 핵심적인 이데올로기는 일본이 원래 조화로운 사회이고, 합의에 의해 움직이며, 정치경제적 결정은 신의뜻, 곧 천황의 신성한 승인을 받아 이루어진다는 개념이었다. 여기에 따르면 정치경제적 결정에 대한 노골적인 반발은 ‘반일본적‘일 뿐 아니라곧 신성한 질서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 P139

위계질서에 대한 숭배를 중시하던 신유학 (주자학)이 정치적 사상의 근간을 이루던 도쿠가와 시절의 토대가 있었다고는 해도, 이런 프레임워크를 주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메이지 지도자들에게는예전 사람들에게 없던 수단이 있었으니, 공공 의무교육과 남성의 전원징병제가 바로 그것이다.  - P139

그러나 일본이 갑자기 외부로부터의 군사 위협과 국내의 격화된 자우민권은 동에 직면하자, 사무라이 가치는 에도 시대 박물관으로부터 꺼내져서 단지 근대화된 군대만이 아닌 군국주의 사회 전체에 필요한 가치로 재포장되었다.
삶의 모든 부분이 군사적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 P140

국가신토는 국가에 대한 충성이 다른 무엇보다 우선하며, 국가가 영원한 진리의 체현이라는 사상을 주입하는 지극히 의도적인 정치적 산물이었다. - P142

일본에서 유난히 정치적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에까지 이른 것은, 일본에서는 정치적 현실과 그 현실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던 ‘허구‘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런 간극은 물론 중학교 도덕 교과서를 빼고는 어디든 존재한다. 그러나 일본이 유독 독특했던 것은 나라의 지배 구조에 대해 하나도 아닌두 가지 다른 허구가 병존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과거로부터 이어져온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양에서 들어온 것이었다. 과거로부터 이어받은허구는 천황제이고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허구는 입헌정치와 법치주의다. - P149

비록 공식적인 형태는 아니었으나 실제 의사결정이 막부를 전복시킨사쓰마와 조슈의 과거 사무라이들로 구성된 ‘삿초‘ 파벌명에 의해 이루어지는 한, 일본 지배 구조의 중심적인 결함은 숨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나이 들어 죽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심각해진다.
카럴 판볼페런은 일본에서 정치적 책임을 지는 주체가 없다는 문제의 원인으로 바로 이 결함을 지목했다. - P151

소위 원로라 불리며 20세기까지 살아남은 메이지 지도자들은 적극적인 정책활동에서 물러나면서 추밀원 같은 자문기관으로 소속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거부권을 행사하되 결과에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역할을 맡으면서, 거대한 정치적 무책임의 무대가 마련되었다.  - P152

일본을 재앙으로 몰아넣은 범인(들)을 찾는 부질없는 작업을 하기보다는, 전쟁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간 일본 지배 체제의 연속성이 단 한번도 끊어지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P156

중국에서의 갈등을 격화시킨 핵심 세력은 관동군이었다. 1900년만주 지역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된 관동군은1920년대에 이르면 사실상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 세력이 되었다.  - P159

명목상의 지도자들은 실은 법바깥에 존재하는 익명의 세력이 미리 만들어놓은 시나리오를 숨을 헐떡이며 따라가기에 항상 급급했다"라고 평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이전쟁의 궁극적인 원인은 (또는 적어도 전쟁에서 일본에 책임이 있는 부분에관해서 말하자면) 권력을 탈취한 사람들의 손에 권력이 집중된 데 있었던것이 아니라, 권력이 통제를 벗어나 여기저기 분산되었다는 데 있었다.
- P16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