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결코 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나는 뒤늦게 깨닫는다. 이곳을 구성하는 모든 물질들이 비명을 지르며 고통을 호소한다. 내가 목격해온 폐허의 적막과고요는 어디까지나 살아서 그것을 목격하는 이들의 것이었다. 적어도 죽어가는 이들의 것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다.
- P30

나는 지금도 가끔 눈을 감으면 셀을 만난다. 그는 무너져 내리는 도시를 지키며 소리 내어 웃고 있다. 파편들이셀의 위로 떨어진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만 그 풍경 속에는, 내가 아닌 라이오니가 있다. 죽어가는 셀의 곁에서 라이오니는 셀의 손을 잡는다. 둘은 멸망을 맞이하고 있지만 불행하지 않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본다. 나의 원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최후이자 유일한 존재였던 라이오니의 모습을,
- P53

"이상하지 않아요. 보통은 플루이드를 우연히 경험한사람들, 모그의 가족이나 친구들이 전환을 고민해요. 플루이드는 모그가 된다는 게 결핍이 아니라는 걸 알려줘요. 변화인 거죠. 어쩌면 진보일 수도 있어요."
- P85

 그럴 때 움직임은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내재된것이었다. 근육 속에, 피부의 표면 아래, 혈관 속에. 마리와춤을 출 때 나는 구체성의 세계로부터 자유로웠다.
- P86

그리고 이해하기 힘든 어떤 선택들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치료를 받지 않은 채 계속 모그로 살아가기를 선택했다. 그들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했고, 사회적인 비난과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분명히 그런 선택을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다시 시각을 회복했지만, 이제야 모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논쟁적인 선택은 모그에 관한 다른 논쟁들을 이끌어냈다.
사람들은 모그들의 존재를 갑작스레 알아차렸고, 그 사실에 놀랐다. 어느 쪽이든, 사람들은 그 사건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 P94

봐, 지금도 그 팔이 너를 만지고 있는 것 같아. 우리가포옹할 때 나는 세 번째 손을 이용해서 네 뺨을 쓰다듬어.
그런데 그게 사실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내가 어떤 틈새에 낀 존재 같다고 느껴, 진, 네 감정에 대해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냐. 내가 너라면, 받아들이기 힘들 거라고도 생각했어."
- P118

눈이 마주쳤을 때, 로라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씩 웃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여전히 로라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동시에제가 앞으로도, 어쩌면 영원히 로라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도요.
하지만 그걸 깨닫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사랑하지만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신에게도 있지 않나요.
- P126

숨그림자의 사람들은 조안을 결코 같은 사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조안도 그것을 느낄까.
아마도 말과 말 사이에 벽이 있기 때문일 거라고 단회는 생각했다. 조안과 숨그림자의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기위해서는 이중 통역이라는 장벽을 넘어야 했다. 조안과의대화는 매우 느렸다. 효율적이지도 않았다.  - P169

"사람들이 나를 위해 대화를 멈춘 적 있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들을 서로 주고받는 걸 중단한 적이 있어?
공기가 침묵으로 가득 찬 적이 한 번이라도 있어? 그런 적이 없다면, 나는 여기 속한 적이 없는 거야."
- P174

우리의 긴 삶에 비하면 너희의 삶은 아주 짧은 순간이지. 그러니까우리가 행성의 시간을 나누어 줄게.
그리고 그들은 오랜 잠에 빠져들었어요.
- P223

"그렇게 말하지만, 너도 이 순간을 잊게 될걸."
"어째서?"
"공동 지식에 비하면 지금 우리의 감정과 생각나 일상은 시시하고 단조로워. 기억할 가치조차 없을 거야. 우린 더위대한 세계를 만나게 될 거야."
- P237

그 이후로 나는 이브를 피했다. 공동 지식에 자신의 뇌를 넘기지 않겠다는 그 애의 말을 생각할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만약 이브의 말을 인정한다면, 지금까지 내가 헌신해온 이 공간의 의미는 무엇이 되는 것일까? 이브는 몇 번이고 나를 설득하기 위해 내 집 앞에 찾아왔으나, 도저히 이브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 P262

한동안 이브는 격자 구조물의 어딘가에 남아 있겠지만, 나중에는 그 위에 새로운 정보가 덧씌워질 것이다. 모든 기억은 낡아가고, 시간의 흐름 앞에서 그 가치를 시험당하며, 남을 가치가 없는 기억은 지워진다.
- P264

인지 공간이 모든 지식을 제공하는데 왜 개별적인 인지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야?
별들을 기억하기에 하나의 인지 공간은 너무 작거든.
그래서 우린 그 기억들을 나눠 가져야 해.
- P266

불변하는 진리는 모두의 인지 속에서 동일해야 한다고사람들은 여전히 믿는다. 하지만 스피어가 정말로 분열일까? 스피어를 갖게 된 우리는 정말로 같은 격자를 보고도다른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공동 인지 공간을 거닐면서도각자의 스피어를 통해 진리에 대한 다른 해석을 하게 될지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은 분열이 아니라, 더 많은 종류의 진실을 만들어내는 다른 방법일 수도 있다.
만약 이 인지 공간이 우리의 확장된 사고라면, 그 사고가 우리의 개별적인 영혼에 깃들지 못할 이유는 어디 있을까?
- P268

우리는 다르게 보고 듣고 인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말로각자 다른 인지적 세계를 살고 있다. 그 다른 세계들이 어떻게잠시나마 겹칠 수 있을까, 그 세계 사이에 어떻게 접촉면 혹은 선이나 점, 공유되는 공간이 생겨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지난 몇 년간 소설을 쓰며 내가 고심해온 주제였다. 그 세계들은 결코 완전히 포개어질 수 없고 공유될 수도 없다. 우리는 광막한 우주 속을 영원토록 홀로 떠돈다.
- P322

하지만 안녕, 하고 여기서 손을 흔들 때 저쪽에서 안녕, 인사가 되돌아오는 몇 안 되는 순간들, 그럼으로써 한 사람을 변화시키고 되돌아보게 하고 때로는 살아가게 하는 교차점들.
-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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