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포착의 목적이 기록, 선전, 그 밖의 무엇이든 피사체가 보여주고들려주는 이야기에 온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만이 빈약하고듬성듬성 구성된 공식 역사의 빈틈을 풍부하게 메워가며 진실에 접근할수 있다. 어떤 사진들은 여전히 대한민국 공식사에서 환영받지 못하거나 심지어 부정되지만, 머잖아 역사의 수면 위로 떠오를 새로운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지 않을까?
- P22

정리하면 만주군 출신 군 수뇌부와 경찰의 일본 계엄령에 대한 이해와 역사적 경험의 계속이 계엄법 없는 계엄 선포를 현실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한발 더 나아가, 계엄 선포의 적법성과 불법성 논쟁을 떠나 계엄법 없는 계엄 포고가 만들어낸 법의 공백 공간에서의 적나라한 폭력에 주목해야 한다. 군은 계엄 지역을 외부와 차단하고 봉쇄한다. 언론을 강력히 통제하고, 치안 및 질서 유지를 이유로 성향에 따라 미리 분류해놓은주요 인사들을 예비검속(또는 예방구금)한다. 그 끝은 특정 공간의 초토화다. 그 공간에 잠시라도 스쳤던 주민들은 약식 군법회의, 또는 ‘손가락총‘으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요동쳤다.
- P65

한국전쟁 동안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의 선포 · 운용 · 해제는 지역별, 시기별로 어지럽게 이뤄졌지만, 전반적으로 계엄 상태는 유지됐다. 그런데계엄 상태는 전쟁 상황과 거의 관계가 없었다. 대부분 허구적 · 정치적계엄이었고, 설령 군사적 계엄이었더라도 그것이 적을 상대하는 전쟁수행에 그리 효율적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전쟁 수행을 위한 여타의 전시법과 차별적인 계엄법의 진정한 효용은 어디에 있을까?
그건 바로 군이 계엄 선포권자 대통령 아래에서 모든 행정, 사법, 심지어 입법의 권한을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것이다.  - P73

맥아더 주연의 전쟁 스펙터클을 전형적으로 드러내는 사진 1), 사진2>와 달리 그 뒤 사진 4장은 아군과 적군, 민간인 남녀노소 할 것 없이전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참혹한 현실 속에서 살아남았던 이야기들을들려준다. 그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는 귀들이 많아질 때, 그 귀를 가진
‘우리가 많아질 때, 맥아더로 시작해 맥아더로 끝나는 인천과 섬, 바다.
의 냉전 경관을 평화 경관으로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상륙작전을재현하는 전쟁 축제가 월미도 공원과 바다에서 볼거리로 진열되는 모습이 매우 불편하게 느껴지고, 왜 불편한지 이성적으로 스스로 납득하고남을 설득할 수 있을 때, 자유진영의 세계평화라는 허상에서 벗어나 냉전 분단 경계에 인접한 지역 주민들의 삶과 생활권에 진짜 평화가 찾아 올 것이다. - P107

종전을 간절히 바라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 시작 중 하나가 국군의 날을 38선 돌파라는 시점과 연루시킨 기념의 정치로부터 해방시켜야 하지 않을까? 10-1, 더 나아가 6·25‘ 처럼 우리에게 너무나익숙한 기념의 시간은 점점 사라져야 할 기표다. 그렇지 않으면 휴전선의 철조망을 걷어내더라도 38선은 여전히 분단(분리)과 적대 · 증오의 흔적으로 강력히 작동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탈분단 평화는 요원한 것이다. 새로운 국군 창설의 날과 종전일을 기다린다.
- P117

백선엽이라는 영웅신화는 전사한 병사들과 군적 없이 동원된 학도병뿐 아니라 죄 없는 주민들과 피란민, 그리고 보급품과 부상병을 지게로 날라야 했던 노무자들의 주검으로 쌓인 것이다. 애국 명명 뒤에 가려진, 산더미를 이룬 주검의 사연들과 진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적지만,
한국전쟁의 영웅이 필요한 사람들은 많다. 여전히 우리는 전쟁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
- P151

판문점에서의 정전 합의로 한반도에 총성이 멎었지만, 용조도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북한군 인민군 포로들은 1953년 8월 일반포로 교환때 판문점을 거쳐 북한으로 올라갔지만, 곧바로 새로운 포로들이 섬에들어왔다. 국군 귀환포로였다. 용초도 포로수용소가 국군 귀환포로 집결소로 용도 변경된 것이다.
- P176

《동아일보》 보도(1953. 9. 19)에 따르면, 귀환군 집결소설치와 운영의 목표는 귀환포로들을 "사상적으로 확고한 인증을 받은 용사"로 거듭나게 하는 데 있었다. 그러니까 포로들이 공산주의 "세뇌교육"
을 받았다는 것을 전제로 사상 검증했다. 가령 적의 노래를 배우고 불렀거나, 강압에 의했더라도 노역에 동원되었기나, 수용소 자치위원장 또는간부로서 활동했거나 하는 식의 사항을 체크했다. 포로를 심문하고 동료를 고발하게 하고, 이를 다시 해명하게 하는 식의 부역자 색출 방식으로진행되었다. 국군 특무대와 함께 포로 심문을 수행했던 미군 방첩대CIC파견대가 생산한 각종 심문보고서와 요원보고서는 이를 잘 보여준다.
- P185

전쟁 동안 피란민은 국가로부터 보호받기는커녕 ‘버림받은 국민과비국민의 경계에 놓여 있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대통령의 말에 피란가지 않았던 사람들은 3개월 동안 적 치하에 있었고, ‘역도들을 도운 자(부역자)라는 천형이 내려졌다. 적을 피해 피란했던 사람들이라고 크게처지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미린민들 속 ‘오열‘, 불순분자, 흰옷을 입고변장한 적이 아님을 입증해야 했다. 그렇지 못하면 ‘골‘로 갔다. 미군 전선에는 얼씬도 거리지 말아야 했다. 미군은 살 길 찾아 이동 제한을 위반했던 피란민들에게 하늘과 땅에서 무차별 발포했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용산 전쟁기념관 곳곳에 새겨져 있는 자유 피란민 서사, 즉 반공 자유를 찾아 공산당 마굴에서 탈출한 이야기를 ‘우리‘
는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 P197

 반공 우익 청년단 등을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거의 실시간으로원폭 투하 소문이 돌았다. 이렇게 볼 때, 미군과 국군의 흥남 철수 때 부두로 몰려들었던 20만 명의 피란민들 속에는 "공산 마굴을 피해 "자유의 땅으로 가는 반공 기독교 성향의 주민이나 자유 피란민들뿐 아니라 남북의 보복 학살의 틈바구니에서, 처참한 불의 바다를 만드는 쪽의뒤편에 가고자 했던 피란민들이 다수 있었다고 봐야 한다.
- P206

헤스가 유럽과 한국에서 수많은 전투 출격 횟수를 기록하는 동안 고아원과 피란민들을 오폭한 적이 있고, 이에 대한 양심의 가책으로 고아에게 특별한 관심과 배려를 베풀며 자신의 죄과를 용서받으려 했다는글도 있다. 뭐가 되었든 난 고아들의 아버지로서 최신을 다했던 그 마음은 ‘숭고한 구원자‘의 그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이젠 그 마음마저 전쟁고아를 활용한 미군의 사상심리전 프레임에서 어떻게 재현되었는지도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난 그렇게 사상심리전으로 재현된 구원 이미지가 대량 파괴의 이면이자 사후적 수습이었다고 생각한다. 미군은 전쟁을 수행하면서 적군뿐만 아니라 비전투 지역에 대량으로 인적·물적 피해를 낳았고, 점령 후에는 민간 구호와 원조(작전)를 수행하는 모순적 상황을 연출했다. 이모순을 봉합하는 길은 하나였다. ‘적‘에겐 무자비한 파괴자이지만, ‘우리에겐 선의의 구원자라는 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이다.
- P223

 여성사의 시각과 방법으로 한국전쟁을연구한 이임하에 따르면, 한국전쟁은 남성 국민을 ‘병사형 주제로, 여성 국민을 ‘위안형 주체‘로 젠더화했다. 위안 · 위무 위문은 위안하는 주체의 계급에 따라 민간 외교의 활동으로 지장된 오락, 유흥, 성의 제공인지, 유엔군 위안소에서 은혜로운 미군의 노고에 감사하고 보답하는유흥과 성의 제공인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김활란, 모윤숙, 임영신, 박마리아 같은 여성 지도자들은 여학생이나대한여자청년단, 대한부인회의 젊은 여성들을 동원해 병사들을 위무·위문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주로 파티 대행업‘에 나서 유엔군 장교와외교관 등 영향력 있는 남성들을 ‘위안 했다.
- P227

 이승만 정부, 그리고 아시아·태평양전쟁, 일본 오키나와와 한국 점령에 이어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군위안부‘ 제도의 관리 방식에 동화된 미군,
그들은 전쟁에 동원된 여성들에게 ‘포주‘의 위치와 다를 바 없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전쟁의 일상, 일상의 전쟁에서 살아남아 살고자 한인생 전체가 국가가 관여한 성폭력으로 얼룩진 ‘위안부‘ 여성의 삶을 우리는 어떻게 대면하고 기록 기억하며, 응답해야 할까??
- P23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