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서 저녁으로 시간이 흐르고, 때가 되면계절이 바뀌듯이, 너무 당연해 이유를 붙일 까닭없이, 그 사람과 나는 만나왔다. 그 사람이 일하는대형마트의 휴무일에 맞춰 우리의 만남도 대체로보름마다 이뤄졌다. 함께 앉아 있던 놀이터 주변에 개나리가 피어 있으면 보름쯤 뒤에는 공원에서 만개한 벚꽃이 보이고, 다시 보름쯤 뒤에는 동네 곳곳에서 봉오리를 터뜨리는 목련을, 그다음보름쯤 뒤에는 집집마다 하나쯤은 있는 자목련을, 그 다음엔 어디든 보이는 나무마다 내려앉은 연둣빛을 볼 수 있었다. - P11

나 혼자 애쓴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나 혼자 바르게 산다고, 나 혼자 제대로 산다고 해서 변할 리가 없었다. 나는 누구보다 분리수거를 철저하게하고,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집안일을 했지만 나의 노력은 너무 쉽게 보잘것없는 것으로 전락되었다. 내가 식구들의 일상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에 화가 났다. - P37

부모의 기대를 받지 않은 나는어떤 삶을 살든 부모에게 평가받지 않았다. 잘하라는 북돋움도, 못한다는 질책도 받지 않았다. 무엇이 되라는 강요도 없었지만 무엇이 되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도 상관이 없었다. 아무여도 상관이없었다.
- P59

나는 하고 싶은 게 없는 것이아니라, 하고 싶은 걸 못 찾은 것도 아니라, 그저내가 하고 싶은 걸 모른 척 무시하고 안 보이는 척외면해왔던 것이다.
- P62

그러나 아무도 나의 노동을 경제적 가치로 인정하지 않았다. 집안일이란 집에 있는 사람이면 하는 일, 바깥 일이없는 이가 하는 일이거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어서 아무도 하기 싫은 일이 되어버렸다. 가치로 환산할 의미조차 없는 일로 치부되었다. 그러니 나는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점점 더 말수를 잃었고, 내 의견은 좀처럼 누구에게도 마음을 끌지 못했다.
- P104

그런 말을 듣다 보면 집에 붙박인 이유에 회의감이 들곤 했다. 내가 없어져봐야 알 테지. 내가사라져봐야, 나 없이 생활해봐야 내 존재의 필요에 대해 깨닫겠지……라는 생각이 무시로 들었다. 그러나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때려치워도 나갈 곳이 없었다. - P108

-인생은 길고, 넌 아직 피지 못한 꽃이다. 주저앉지 마. 엄마가 하란 대로 하지도 말고,
그러곤 뚝, 통화가 끊겼다.
- P117

누군가와 헤어지고 새로 만나는 것두가 그 시기에 걸맞은 때에 행하는 것이 보편의삶인데, 내가 보편의 삶을 살지 못해서 나에게는늦거나 이른 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현실적인벽에 맞닿으면 자꾸 잘못된 결과가 되고 말았다.
- P120

그러니까 나는 시를 쓴다는 포즈만 취해왔던것이다. 시와 같은 편이 되거나 시와 같이 어울려야 하는데 나는 늘 속내를 알아내고야 말겠다는듯이 멀찍이서 노려보기만 했다. 작품 하나하나마다 나를 그려 넣고, 나를 새겨야 하는데 그마저도 용기 내지 못했다. 시를 쓰지도 못하면서 시 쓰기를 꿈꿨다는 건 시의 그림자에 숨어 내 언어가사라지는 줄도 몰랐다는 뜻이었다.
- P166

필사 노트는 계속 늘어났다. 혼자 지내게 되었다고 곧바로 시가 써질 리 없었다. 그러나 나는 혼자 있는 동안 온전히 나에게 몰입할 수 있었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밤새 언어에 대해서, 시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었다. 이런 생활이 얼마나 지속될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으므로 하루하루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시집을 읽거나, 몽상을 하거나, 끊임없이 단어를 열거하거나, 심지어 잠을 자는 것마저도 최선을 다했다.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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