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 국경분쟁이 심하던 시절이었다. 소련은 중국 유물이중국인들이 여기에 살았다는 근거로 쓰여 자칫 영토분쟁의 빌미가 될까봐 이볼가 성터를 흉노에 잡혀온 ‘중국인들의 포로수용소라는 공식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2011년 내가 일본과 몽골에서 흉노 성터 연구를 발표하자 한 일본인 노학자는 그 내막을 듣고서자신은 이제까지 이볼가 성터를 포로수용소로 알고 있었다며 허탈해했다. 국가 간 학문적 교류가 전무하던 시절의 해프닝이다.
이볼가 성터 발굴 이후 부랴트공화국과 몽골의 성지 곳곳에서는옥저 계통의 온돌을 설치한 주거지가 속속 발견되었다. 흉노가 살던 추운 북방 초원에서 옥저의 온돌은 꽤 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 P159

모든 나라들은 자신들의 지배구조를 강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인 장치가 필요하다. 신라도 국력을 강화하면서 부여계와는 다른 그들만의 선민의식이 필요했다. 이에 진한 시기부터 이어져왔던북방과의 교류를 전면에 내세워 자신들의 정통성을 강화하고자했다. 신라가 흉노를 선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당시 유라시아 초원은 흉노의 영향을 받은 유목민들이 강력한 무기를 앞세워세력을 키웠다.  - P174

무덤의 생김새만으로 기원을 찾으려 하는 것도, 신라인이 우연히 똑같은 고분을 만들었다고 우기는 것도 둘 다 의미 없다. 신라인들이 유라시아의 적석목곽분 제작 기술을 받아들여 경주에서재창조했다고 보는 게 맞는다. 1500년을 변함없이 그 자리에 단단히 지키고 있는 거대한 돌무더기는 유라시아의 기술을 신라의 것으로 바꾼, 신라인들의 지혜가 집약된 산물이다.
- P180

흉노의 영향을 받아 왕족들이 편두를 하는 나라들에는 또다른 공통점이 있으니, 바로 금관이나 금동관을 쓴다는 점이다. 신라와 가야의 금관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신라의 금관과 유사한유물이 발견된 아프가니스탄의 틸리아 테페(Tilla Tepe)에서도 편두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흑해 연안에 살며 금관을 썼던 사르마트인(Sarmat)들도 편두를 했다.
- P222

그 배경에는 20세기 초반에 서양에서 유행한 우생학과 인종주의가 있다. 그들은 순수한‘ 유럽인을 찾아야 했다. 열등한 타민족과 섞이지 않은 고대의 우월한 사람들이 신아 지역에 모여 있다고생각했고, 서구의 인류학자들은 경쟁적으로 파미르고원과 티베트고원을 탐사했다.  - P241

유목민들은 다른 부족들을 정복할 때에 반드시 적의 무덤을 파괴하고 도굴했다. 전쟁에서 이겨도 정복해야 할 도시나 요새가 없기 때문에 유목민들이 모이는 장소인 조상들의 무덤을 파괴했던것이다. 무덤 속에서 황금 유물이 나오면 전리품으로 나누어가졌다. 그 과정에서 황금 유물들이 사방으로 전해지며 잘못된 황금의나라 전설을 부추겼다. 그렇게 수천년간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했던 황금의 나라 이야기는 특별할 것이 없다.
- P258

수많은 핸디캡을 딛고 그가 마야 문자 해독에 성공할 수 있었던이유는 다른 나라의 문화를 차별 없이 보고, 인류의 보편성에 눈길을 주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이후에 서양의 수많은 학자들은 크노로조프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에서 연구하면서 새롭게 발굴된마야 문자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마야의 언어도 발전할수 있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반면 크노로조프의 천재성은 마야의 문자가 세상의 다른 글자와 마찬가지로 수백년간발달해왔다는 단순한 진리를 발견한 데 있었다.  - P274

어용학자를 바라보는 서양의 관점은 상당히 비판적이다. 예를들면 지금까지도 서양에서는 학문 연구에 있어 나치에 부역했던학자들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며, 그들의 이름은오로지 비판을 위해서만 인용된다. 이러한 냉정한 평가는 그 사람들의 개인적 능력이나 성품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제국주의 고고학의 폐해는 그들이 성격 파탄자거나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관점을 암묵적으로 따라가는 연구 경향이 결국 수천만명을 고통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 P296

 일제는 이 용어를 한반도에 도입하면서 한국인은 제대로 된청동기나 철기를 쓰지 못한 열등한 민족이라는 의미로 곡해해서사용했다. 쉽게 말하면, 석기 - 청동기 철기로 이어지는 발전 단계없이, 한반도의 바닷가에는 빗살무늬토기로 대표되는 신석기시대문화에 머문 사람들이, 내륙의 산과 평야에는 청동기를 거의 사용하지 않거나 장식용으로 일부 사용한 민무늬토기 문화에 머문 사람들이 문명을 이루지 못한 채 동시에 살았다는 뜻이 된다. 석기시대에 뜬금없이 중국과 일본에서 건너온 철과 청동을 같이 사용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금석병용기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 P297

정작 일본의 현지인은 미개하다고 치부하고 ‘위대한 일본인‘ 조상이 있다고 주장하는 논리는 일부 우리가 가진 한반도에 대한 인식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최근까지 한국에서도 북방 유라시아는원래 우리의 영토‘였다며 근거가 빈약한 주장이 떠도는데, 그 뿌리는 일본 군국주의가 주장하던 침략의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고대에 사람들이 교류하고 공존했던 사실을 현대 국가의 영토로 치환시켜 논하는 것은 오히려 고대 한국 문화의 진정한 의미를 퇴색시키려는 일본 군국주의의 논리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것일 뿐이다. - P298

1980년대 이후 개혁개방을 앞세운 중국의 정책과 함께 훙산문화는 그 의미가 변질되었다. 각 지역에 다양한 문화가 존재한다는 구계유형론은 한족 중심의 중국 문명을 강조하는 다원일체론(多元一體論)으로 바뀌었다. 다원일체론은 마치 여러 지류의 물길이 하나의 큰 강으로 합쳐지듯 현재 중국 영토 안에 있는 모든 문명이 중화 문명이라고 하는 큰 문화로 이어진다고 본다. 다원일체론이 계냥하는 지역은 주로 티베트, 신장, 몽골, 만주와 같이 최근에 중국의 영토에 편입된 곳들이다. - P319

이후 다원일체론에 포함되는 지역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양쯔강 유역의 량주문화에서도 옥기가 발견되면서 다원일체론에 추가되었고, 2010년대 이후에는 백두산 일대도 ‘장백산문화론‘이라 불리며 중국의 문명 재편 과정에 포함되었다. 중국의 이런 역사 만들기는 훙산문화의 재발견에서 출발했다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촉발된 홍산문화에 대한 중국인의 관심이 지금은 반대로 중국의 팽창주의적 역사관을 여는 단초가 된 셈이다.
- P321

터키가 세계적인 그리스와 근동 문명을 마다하고 굳이 머나먼알타이, 나아가 동아시아에서 자신들의 기원을 찾는 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계기가 있었다.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오스만튀르크가 멸망하고 지금의 터키가 들어선 사건이다. 신생국가 터키는 강력한 서구화 정책을 취하는 한편 머나먼 미지의 땅에 자신의 고향을 둠으로써 터키의 정체성이 서양으로 휩쓸리지 않도록하는 양면 정책을 실시했다.
머나먼 극동 지역의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여기며 아낌없는 호감을 표시하는 것은 현대 유럽의 일부로 살면서도 정체성은 아시아에 두는, 그들의 이중적인 역사인식의 발로인 셈이다. 유라시아동편에 자신의 기원을 둔 터키의 사례는 미지의 땅에 대한 동경과고대사에 대한 역사인식이 현실의 치열한 일부분임을 생생하게 증명한다.
- P32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