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나는 실제로 편두통을 앓았고, 오후 1시까지 늦잠을 잤다. 두통의 원인은 안나 카레니나처럼 ‘할 일 없음‘이었다. 레나는 할 일이 없었다. 화단에 물이라도 주면 좋으련만……. 하긴 집안일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녀가 일한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집에는 운전기사와 경비원도 있었다. 안젤라는 그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주인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에게는 저마다 목표와 높은 이상이 있었다. 뇌물을 줘서 아들의 군복무를 면제받으려는 이도 있고, 딸이 전문의 자격증을 따도록 뒷바라지하는 사람도 있으며, 러시아제 가젤을 사기 위해 돈을 모으거나 작은 사업을 시작하는 데 돈이 필요한 사람도 있었다. 저마다 추구하는 게 다를 뿐이었다.
- P61

"나는 그가 매일 날 보고 기뻐하면서 ‘당신이 최고야. 난 당신만 사랑해……..‘라고 말해 주면 좋겠어."
안젤라는 오븐을 끄면서 ‘안나 카레니나랑 판박이야. 라고 생각했다. 주인 남자는 육즙이 너무 많이 빠지는 걸 안 좋아했다.
- P79

"난 우정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우정은 게오르기만으로 충분해요. 난 열정이 필요하다고요."
"열정은 돈을 주고 사면 되죠." 라이사가 지적했다.
"대가성이 있는 사랑 말고요. 나는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요. 바보 이반이 세 개의 솥에 들어갔다 나와서 젊은 이반 왕자로 변한것처럼 그렇게 되고 싶다고요."
"당신의 솥들은 똥으로 가득 찼을 거예요. 그 안에서 헤엄칠지말지는 당신이 결정할 문제죠."
- P83

사브라스킨은 안젤라를 성장시켰다. 그는 ‘존재하기‘와 ‘소유하기‘에 대해 알려 주었다. ‘존재하면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할수도 있다. 그래도 ‘존재해야 한다. 반면 모든 것을 가졌지만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안젤라는 사브라스킨의 눈동자를 쳐다보면서 그의 말을 경청했다. 사브라스킨의 날개가 자라고 있었다.
그는 피그말리온처럼 자신의 작품을 조각했고, 자신이 만든 작품에 마음을 빼앗겼다.
- P155

안젤라는 순간 바다 위에 우뚝 솟아 있는 높은 바닷가가 떠올랐다. 해변이 파헤쳐질 것이다. 허름한 흰색 집도 철거될 테고 마당도 사라질 것이다. 대신 일자리가 생길 것이다. 누군가는 기뻐하고, 또 누군가는 속상해할 것이다.
하지만 바다는 흔들리지 않는다. 바다는 달에 의해서만 동요될뿐이니까..….
- P175

모성애는 축복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돈과 집안일을 도와줄사람이 있을 때라야 비로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법이다. 이 모든 것이 있고 아이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아무것도 없이 힘만든다면 스스로 사람이 아닌 비 맞는 한 마리 말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다.
- P182

"스탈린 때가 나았어요." 마리나가 결론을 내렸다.
"스탈린 때는 강제수용소가 있었어요." 안나는 마리나가 잊은부분을 상기시켰다.
"난 잘 모르겠어요. 내가 아는 사람은 아무도 거기에 수용되지않았으니까요."
사람은 자기 경험을 토대로 세상을 이해한다. 마리나의 지인중에는 수용소에 끌려간 사람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 사정은 그녀가 알 바 아니었다.
- P287

마리나는 문득 사람들이 사는 이 지구 역시 개미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다른 개미들 틈에서 들기 힘든 짐을 끌고 가는 것이다. 누군가 쓰러진 나무에 앉아서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P319

사실 그녀에게 전화를 거는 이유는 호기심이 아니라 연민이었고, 나를 실제 모습보다 더 나쁘게 생각하는 게 싫었다. 모든 사람에겐 이상적인 자아가 있는 법이다. 나는 누군가 내 이상적인 자아를 폄하하면 당황한다. 더 낮고 더 약한 새로운 이상을 재단할지, 내 이상을 폄하하는 사람들과 교제를 중단할지 고민한다. 두번째 방법이 좀 더 쉽기는 하다. 하지만 마라는 지금 나보다 더 힘든 상황이고, 그렇게 해서 그녀의 기분이 풀린다면 얼마든지 희생할 준비가 돼 있었다.
- P389

그녀가 가끔 꿈에 나타나는 날이면 하루 종일 그녀를 생각하며머릿속으로 대화하는데, 우리가 논쟁의 끝을 보지 못해 계속해서논쟁을 이어 가는 듯 묘한 기분이 들곤 한다. 또 하나는 죄책감이다.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 내가 잘못한 게 뭘까? 나도 모르겠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계속해서 내 삶을 살아가지만, 늘 뒤를 돌아봐서 마치 목을 뒤로 꺾은 채 앞을 향해 걷는 기분이 든다.
- P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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