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점에서 우리 시민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여서 그들은 자신들만 생각했다. 다시 말해, 재앙을 믿지않는다는 점에서 그들은 인본주의자들이었다. 재앙은 인간의 척도로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들은 재앙을 비현실적인 것, 곧 지나가버릴 악몽에 불과한 것으로 여긴다. 재앙이 지나가버릴 때도 있지만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악몽에서 악몽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사라지는쪽은 사람들, 누구보다도 인본주의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미리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민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못한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자기들에게는 여전히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생각은 재앙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들은 계속 사업을 했고, 여행 준비를 했고, 제각기 의견을 갖고 있었다. 미래와 여행, 토론을 금지하는 페스트를 그들이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자유롭다고 믿었지만, 재앙이 존재하는 한 그 누구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 P51

당시 용기와 의지, 인내심이 얼마나 급격히 허물어졌던지, 그들은그 수렁에서 결코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해방의 날은 결코 생각하지 않고 더이상 미래도 바라보지 않은 채, 말하자면 항상 두 눈을 내리깔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고통을 숨기고 방어자세를 취하면서 싸움을 포기하는 그런 신중한 방법도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하고 싶었던 의기소침한 상태는 편할 수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앞으로 다가을 재회를 상상하면서 페스트를 잊을 수 있는 수많은 순간들을 사실상포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심연과 정상上 중간에 좌초되어 매일같이 정처 없이 헤매고 메마른 추억 속에 버림받은 채, 산다기보다는 차라리 떠다니면서 고통의 대지 속에 뿌리박지 않고는 힘을얻을 수 없는, 방황하는 유령처럼 살았다.
- P91

그러나, 이것이 가장 중요한 점인데, 아무리 불안하고 고통스러워도, 또 텅 빈 마음을 견뎌내기가 아무리 어려워도, 초기에는 그래도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사실 냉정을 잃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 시민들의생각은 자기들이 기다리는 사람에게로 완전히 기울어 있었다. 모두가하나같이 고뇌에 빠져 있는 가운데, 그들은 사랑의 이기적인 성격 덕분에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었고, 페스트를 생각할 때도 페스트 때문에 이별이 끝도 없이 계속될까봐 염려스럽다는 정도였다. 그래서 전염병이 한창일 때도 그들은 건전한 여유 같은 것을 누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침착함으로 착각했다. 절망감 때문에 공포심을 느끼지 않게 되었으니 불행에도 장점이 있었던 것이다. - P95

문이다. 그러면서도 질병은 곧 멈출 것이고 자기들은 물론 가족들도그 병에 걸리지 않을 거라는 기대도 여전했다. 따라서 뭔가를 반드시해야 한다는 생각은 아직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에게 페스트는 예기치 않게 찾아온 것처럼 언젠가는 떠날 불쾌한 방문객에 불과했다. 그들은 공포에 사로잡히긴 했지만 절망하지는 않았다.  - P113

초기에는 이번 질병도 다른 질병들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종교가 제 역할을 할 수 있었지만,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자 향락을 떠올린 것이다. 낮 동안 사람들의 얼굴에 어려 있던 모든 불안은 뜨겁고 먼지투성이인 황혼녘이 되면 일종의 격렬한 흥분으로, 모든 시민을 흥분시키는 서투른 자유로 귀착되고 만다.
나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게 어떻단 말인가! 나 같은 인간에게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죽음은 그들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하나의 사건이다.
- P145

인간은 악하지 않고 오히려 선한 존재지만, 사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간은 많이 알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는데, 그것을 미덕이나 악덕이라고 부른다.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자기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고 사람을 죽이는 것을 스스로 허용하는 무지의 악덕이다. 살인자의 영혼은 맹목적이며, 통찰력을 최대로 발휘하지 않으면 진정한 선도 아름다운 사랑도없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타루의 주도로 만들어진 보건대가 아무리만족스러워도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또 이런 이유 때문에 서술자는 의지와 영웅심을 침이 마를 정도로 과도하게 찬양하지는 않을 것이며, 적절한 정도로만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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