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떠나기 2년 전,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내가 매우 못생겼다고 했다. 신혼 시절 장만한 리오네 알토 구역 산 지아코모 데이카프리가 꼭대기에 있는 집에서 아버지는 속삭이듯 그렇게 말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나폴리의 모든 공간도, 얼어붙을듯 차가운 2월의 창백한 햇살도, 아버지가 내뱉은 문장까지도나만 혼자 그곳에서 살며시 빠져나왔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여전히 문장과 문장 사이에 빠져 헤매고 있다. 내게 완성된 이야기를만들어주려는 문장들 사이에, 실은 무의미한 문장들일 뿐인데,
진정 나의 것은 아무것도 담지 못했는데,
나는 이야기를 제대로 시작하지도 완결 짓지도 못했다. 내 글은 혼란일 뿐, 이야기가 제대로 전개되고 있는지, 그저 구원 없이 일그러진 고통의 나열일 뿐인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지금 글을 써 내려가고 있는 이마저도, - P9
소설의 첫 문장인 저 대목이 이 소설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지식인 중산층 가정의 조반나라는 소녀의 어린 시절은 누구보다 훌륭해 보이고 완벽해 보이는 부모로 인해 충만하다.
하지만 그 부모의 세상이 거짓으로 곳곳에 균열이 가 있는 걸 발견하는 순간 아이의 유년은 끝나버린다.
아버지의 저 한 마디로 조반나는 부모의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고 찾게 된다.
나폴리는 우리 나라의 일반적인 도시와 전혀 다르게 산비탈 고지대에 중산층이 사는 아파트나 주택, 상류층의 저택들이 존재한다.
조반나가 다른 세계를 보기 위해서는 그 언덕길을 내려와야 한다.
같은 도시 안에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나폴리의 거리는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거리 어디쯤에서 조반나는 빅토리아 고모라는 다른 세계를 엿보기 위해 달려가지 않았을까?

하지만 우리가 이미 예상하듯이 세상은 사춘기 소녀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 세계든 저 세계든 갖가지 이유로 어른들은 모두 서로를 속이고 자기 스스로를 기만하고 살 뿐이다.
또 한편으로는 모두가 상처입은 영혼들이다.
어른의 정신 세계라고 해서 그다지 아름답거나 훌륭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오히려 더 타인과 자신에 대한 기만으로 똘똘 뭉쳐 있다.
게다가 이 소설석 어른들의 일탈 내지는 기만은 사실상 한 술 더 뜬다.
사춘기 소녀에게 아버지의 외도와 그로 인한 부모의 이혼, 이후 혼자 남은 엄마의 이해하고 싶지 않은 집착과 자기 기만이 작은 일은 아니지 않은가?
더더군다나 아버지의 새로운 상대가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의 엄마이고, 아버지의 가장 친한 친구의 부인이라면... 에휴~~~
게다가 새로운 롤모델로 잠시 떠오른 고모 역시 기만적인 어른인 건 마찬가지다.
유년기에 알았던 것처럼 주변의 어른들이 전혀 존경할만하지 않고, 지극히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건 정말 아 싫다.
그저 어른들이 내가 생각했듯이 대단한게 아니네, 그저 평범한 사람이고 저런 단점도 있네 수준이 아니잖아.....
그래서 조반나의 사춘기는 격렬할 수밖에 없다.
그 격렬한 사춘기의 심리와 감성을 정말 이 책은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
조반나는 당연히 어른이 아니므로 어른의 거짓된 삶에 저항하는 방식도 생각도 세련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자기중심적으로 흘러가는 생각과 행동, 문득 문득 튀어 나오는 하지말아야 할 행동과 말들, 후회하지만 그 후회조차도 합리화해가는 모습, 그리고 비틀어지고 절대화되는 짝사랑의 감정들
아 정말 난 엘레나 페란테가 지금 사춘기를 겪고 있는 천재소녀가 아닌가 생각했다.
조반나가 어른들의 세계를 벗어나고자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지점에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알을 깨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다. 조반나는 이제 알을 깨고 한발을 내딛었다.
이 소녀의 새 출발이 그녀의 마음에 들지 어떨지는 아무도 모른다.
부디 어른들의 거짓된 삶이 아니라 자신의 진실된 삶에 안착할 수 있기를....
지금도 어른들에게서 상처받는 모든 아이들에게 위로는 되지 않을지라도 응원을 보내고 싶다.